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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래서 국가가 투자자의 소송대상이 됐구나"

[한미FTA 뜯어보기 108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3)] 현대판 상인법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실로 특이한 1990년대 이후의 신 발명품이다. 이 제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어 국제 중재재판 제도, 상인법(lex mercatoria), 투자보호 협정 등은 물론 그 전부터 있던 것이며 어떤 것은 멀리 고대 이집트와 페니키아 상인들로까지 소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제도들이 한데 뭉쳐 지금 우리 눈앞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 특히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하는 지구정치경제의 큰 흐름 속에서 보지 않으면 그 의미가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그 역사적 흐름을 날줄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최근의 세계정세를 씨줄로 하여 이 제도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살펴보자.

중세 상인법 성립의 배경

중세 유럽은 법적 제도의 일관성으로 보자면 극히 파편화되고 혼란스러운 사회였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같이 잘 만들어진 법체계로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던 비잔틴 제국과는 달리 교회법, 로마법, 실정법, 관습법 등 서로 다른 여러 개의 법체계들이 혼란스럽게 병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법체계는 12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상업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상업이라는 행위는 아주 정교한 법적인 규범과 약속의 틀 안에서만 번성할 수 있다. 법적 안정성이라는 '인프라'가 없다면 상행위는 언제든지 사기와 주먹다짐이 난무하는 난장판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중세의 상인들은 이러한 법적인 혼란상태 속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법, 즉 상인법을 만들게 된다. 큰 장터를 찾아 전 유럽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상인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시비가 붙을지, 어떤 부당한 상황에 부딪힐지 모른다. 그런데 분쟁과 시비를 항상 그 지역의 영주나 교회의 판결에 맡겨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선 기약 없이 발이 묶여 장사를 망칠 것이요, 영주들이 재판비용이랍시고 요구하는 수수료도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재판소에서 사용하는 법적 논리가 상업의 논리에 그다지 맞는 것도 아니다. 장사를 하다 보면 시비가 붙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고, 그 해결은 그저 당사자들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타협을 보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법정에서 '정의'니 '공정가격'이니 하는 복잡한 법체계 상의 논쟁에 휘말릴 경우엔 그야말로 짜증이 극점으로 치달을 것이다.

상인들은 유럽의 주요 교역로와 주요 상업중심지 곳곳에 상인법을 시행할 만한 재판소(사실 이것은 재판소라기보다는 중재기관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를 세우고, 신속하고 값싸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분쟁을 해결하는 장치를 만든다. 이런 재판소의 판사 자리에는 오랜 장사꾼 경험 속에서 상업의 온갖 관행과 실제 사례에 정통해 있고 상인들 사이에서 신용과 명망을 쌓은 이들이 앉았다. 재판에서는 분쟁이 생긴 양쪽이 각각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판사는 '정의를 실현'하기보다는 양쪽이 조속히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중재'를 했다. 그래서 분쟁의 양쪽 당사자는 재판소에서 후닥닥 문제를 해결한 뒤 각각 가던 길을 간다.

상인법에 의한 재판은 보통의 공공 재판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갖고 있었다. 먼저, 이 재판의 절차는 철저하게 분쟁 당사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재판소의 선택, 증거의 종류나 제출 방식, 사용되는 법적 원천의 종류 등이 모두 양쪽의 합의에 의해 결정됐다. 상인법에 의한 재판이 이런 특징을 갖고 있었음을 기억해두는 것이 현재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을 담당하는 국제 중재심판의 절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상인법에 의한 판결은 강제력을 통한 집행(enforcement)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당시 사회적 폭력을 행사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영주 등이 상인법의 운영 과정에 끼어드는 일이 드물었으므로 그들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다. 결국 유럽을 오가는 상인 공동체의 상호신뢰가 상인법에 의한 판결의 효력을 뒷받침하는 암묵적인 힘이 되었다. 자기가 합의한 절차를 거쳐 내려진 판결에 복종하지 않는 상인이 있다면, 상인 공동체에서 그 상인을 시쳇말로 '왕따'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특징에서 알 수 있듯이 상인법이라는 것은 결국 자립적인 논리체계와 집행체제를 갖춘 법적 원천이었다고 보기 힘들고, 어떤 이들은 아예 상인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인법으로 일컬어지는 관행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공식적인 국제법 체계의 외곽에서 벌어지는 각종 분쟁중재 과정의 규칙과 진행절차에서 중요한 모범이 되고 있다.

주권국가의 등장 이후

혼란스러웠던 서유럽 세계의 법적 질서는 17세기에 들어 근대적인 영토국가들로 이루어진 소위 베스트팔리아 체제(Westfalia System)가 성립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유럽은 이제 한 조각의 땅도 남김없이 모두 배타적인 국경선과 영토를 주장하는 영토국가의 퍼즐 조각들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런 국가들은 각기 자국 영토 안에서는 오로지 자국만이 법을 정할 수 있는 권력인 주권(sovereignty)을 가지며 그밖의 다른 어떤 법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에 따라 예전의 상인법은 국가의 법제화를 거쳐 각국에서 통일적으로 시행되는 민법과 상법으로 흡수된다. 그 밖의 여러 다른 기존의 법적 원천들도 이제 주권국가가 포고하는 법전으로 통합된다.

유럽이 이렇게 국가별로 독자적인 법체계를 가진 퍼즐 조각들로 찢어지게 되자, 각각의 퍼즐 조각 사이의 법, 즉 국가 간의 법체계는 어떻게 해냐 하느냐는 문제가 생겨났다. 이것은 이후 몇 백 년 간 유럽 법학자들을 괴롭힌 문제였고, 현실적으로 제도화하는 것도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유럽의 국가 간 관계란 이른바 '세력균형 체제(Balance of Power System)'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쟁을 통한 힘의 균형 달성'을 체제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체제였다.

무력경쟁과 전쟁의 상황에서도 구속력을 갖는 '국제법'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으로 인해 정치학자들 중에서는 아예 국제법, 즉 '주권국가 사이의 법'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몇 백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경험과 관례가 축적되어 20세기에 이르면 비록 국내법만큼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구속력을 갖는 국제법 체계가 성립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국제법은 어디까지나 주권국가들 사이의 법, 즉 '국제공법(public international law)'라는 점이다. 국제법 성립의 유일한 원천은 주권국가들이고, 주권국가들의 동의(consent)가 그 효력의 유일한 근거가 되며, 국제법이 적용되는 대상도 주권국가들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구성원에 국가만 있는 것은 아니며, 국경을 넘어서는 상호작용에 국가 간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어느 상인이 영국의 어느 회사와 큰 거래를 진행하다가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 경우에 소송이 붙는다면 어느 법을 적용해야 하는가. 프랑스의 상법을 적용해야 하는가, 영국의 상법을 적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3의 법', 즉 국제상법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적용해야 하는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법적 권력을 가진 주체는 주권국가다. 국제법이 있다면 주권국가들끼리 동의한 국제공법이 있을 뿐이다. 이 체계 밖에 따로 존재하는 국제상법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프랑스 법정에서 프랑스 상법에 따르든가, 영국의 법정에서 영국 상법을 따르든가, 아니면 제3국,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 소송을 진행하면서 네덜란드 상법을 따르든가 해야 할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판결이 나온 뒤에도 여러 상법들 사이에 모순과 갈등이 있을 수 있기에 그 판결이 각국 국내의 법과 모순될 수 있다. 국제사법(private international law)이란 다름아닌 이러한 나라들끼리의 사법 상 갈등이 있을 때 그러한 갈등을 조정하는 각 나라의 고유한 절차들의 묶음에 불과하며, 그래서 국제사법을 가리켜 '여러 법들의 갈등(conflict of law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래의 한쪽 당사자가 국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자본가가 아르헨티나에 투자해 광산을 사들였는데 아르헨티나 정부의 부당한 조치로 인해 그 광산을 억울하게 빼앗기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 영국 자본가는 아르헨티나 정부를 직접 상대로 해서 법적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국제법 상 주권국가와 개인은 법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 자본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영국으로 돌아와 영국 정부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만약 영국 정부가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면 영국 정부가 나서서 국제 중재재판에 제소할 수도 있고, 아르헨티나 정부와 외교적 협상을 벌여 문제를 풀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두 나라 정부 간의 문제이지, 문제의 영국 자본가가 직접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중반까지도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던 국제법의 전통이다.

이렇게 경직되고 복잡한 주권국가 중심의 국제법 체계는 세계적 차원에서 상거래를 펼치는 이들에게는 인기 있는 것이 되기 힘들다. 그래서 19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공식적인 국제법 체계의 가장자리에서 옛날 '상인법'의 정신이나 관행에 따라 국제상거래 관계에서 상인들 스스로가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절차에 호소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적으로 벌어지던 상인들 간의 중재를 국제체제의 한 제도로서 인정하고 그것에 법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국제상업을 부흥시키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국제 중재심판의 제도화

마침내 1923년 국제통상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의 주도로 유럽 17개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모여,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해결을 구속력 있는 중재심판에 넘기기로 합의하고 이를 각국이 법적으로 인정하기로 한다(Geneva Protocol of 1923). 그 이후 여러 번의 갱신과 발전(Geneva Convention of 1927, New York Convention of 1958)을 거치면서 제도가 점차 발전하여, 이제는 중재심판이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건 각국은 그 결정을 자국의 법률에 비추어 재검토하는 일 없이 그대로 법적 집행력을 갖는 것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 참여하는 나라도 현재까지 130개국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중재(arbitration)란 정해진 절차와 법적 원천 및 체계에 따라 진행되는 공적인 법원의 재판과는 다른 것이다. 중재에서는 첫째, 심판이 진행되는 과정과 절차가 모두 분쟁 당사자들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 둘째, 당사자들의 사적인 정보 유지와 사업기밀 누설 방지를 위해 심판의 진행은 모두 비밀에 붙여지고 분쟁의 심판을 맡은 이들은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다는 점에서 중재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분쟁해결 방식인 것이며, 중세 상인법의 전통과 여러 모로 유사하다.

결국 20세기 들어 지구경제의 확장과 더불어 중세 상인법의 관행을 닮은 사적 중재심판이 국제법적 지위를 갖춘 하나의 제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각국의 국내법에 의해 제약당하지 않는 나름의 구속력을 가지게 된 것은 실로 중요한 발전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큰 한계가 있다는 것이 국제통상회의소(ICC)의 불만이었다. 각국이 국내 법과의 일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순응해야 하는 중재심판의 대상이 민간인들 사이의 '상업적(commercial)'인 사안으로 제한돼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다시 보겠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1장에서 정의된 '투자'의 포괄적인 정의에 비하면, 이 '상업적'이라는 말로 인해 중재심판 대상의 범위가 좁아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재심판의 결정이 나왔다 해도 그 결정이 '상업적'인 범위를 넘어 예를 들어 각국 공공정책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될 경우 각국 정부는 그것을 무시할 권리를 계속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 다국적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세계 각국으로 생산영역을 확장하면서 투자대상국 정부들과 이런저런 마찰을 빚기 시작했음에 비추면 이런 한계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1965년에 열린 '투자분쟁조정 회의(ICSID Convention)'는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 회의는 기존에 확립된 사적인 국제 중재심판 제도를 이제 국가와 외국 투자자 간의 분쟁에까지 적용하기로 했다. 나아가 세계은행 산하에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Investment Dispute Settlement: ICSID)'라는 포럼을 만들고 이를 통해 국가와의 관계에서 외국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중재의 절차와 규칙 등을 정하기로 하고, 분쟁이 생길 경우에는 이 센터에 중재심판을 조직하는 역할을 맡기기로 했다.

사적 절차였던 중재심판이 급기야 주권국가와 투자자의 관계로까지 확대 적용되고 그 절차와 규칙도 제도화된 것이다. 이로써 투자자가 직접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중재심판을 통해 주권국가에 대한 구속력이 행사되도록 할 수 있는 제도의 터가 닦인 것이다.

하지만 ICSID는 오늘날의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와는 아직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나라가 ICSID에 서명했다고 해서 그 나라가 그때부터 '모든' 외국 투자자와의 '모든' 분쟁사항과 관련해 ICSID에서 마련한 중재심판에서 내려진 결정에 모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권국가는 여전히 국제법이 발휘하는 효력의 원천이었다. ICSID의 심판이 개별 국가에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 국가가 "이 건은 우리나라의 법적 권한에 속하지 않으며 ICSID의 중재심판 대상이 된다"는 식의 명시적인 의사표명을 해야 했다.

이러한 명시적 의사표명은 우선 '계약'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 외국 투자자를 받아들이고자 하는데, 마침 광업에 투자하려고 하는 외국인 A가 있고 카지노에 투자하려고 하는 외국인 B가 있다고 하자. 이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A는 꼭 잡아야 할 투자자이지만 B는 오지 말았으면 하는 투자자일 수 있다. 이 나라는 A와의 계약에서는 투자보호의 확신을 주기 위해 "분쟁이 생길 경우 ICSID의 중재에 맡긴다"고 계약에 명시할 수 있을 것이고, B와의 계약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경우 A와의 계약과 관련해서만 ICSID의 중재심판이 이 나라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다. 이 나라의 부패한 경찰과 공무원들이 B의 카지노에 달라붙어 '삥'을 뜯어간다 해도 B가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 ICSID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새로이 시도된 것이 투자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의 도입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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