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현안을 놓고 대립을 거듭하고 있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23일 모처럼 '화끈한 정치개혁'(?) 합의를 도출해냈다. '기업 돈'을 다시 받기로 한 것이다.
***우리-한나라의 '합작 정치개혁'(?), 기업돈 다시 받기**
김 일병 총기 참사, 남북장관급회담 개최, 공공기관 지방이전지 발표 임박 등 초대형 뉴스들에 세간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던 23일 오후, 국회에 모인 국회 정치개혁특위(위원장 이강래)는 "법인과 단체의 정당-정치인에 대한 직접 후원금 제공은 현행대로 금지하되, 기업이 중앙선관위에 공개적으로 기탁금을 내면 의석 비율에 따라 각 정당에 정치자금을 나눠주는 비지정 공탁제를 부활키로 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정치개혁'(?)에 전격합의했다.
이처럼 선관위가 국고보조금 배분방식에 따라 국회의원 의석 수, 총선 득표 비율 등을 기준으로 기탁금을 배분할 경우,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 90%이상이 돌아가게 돼 있다. 이렇듯 생기는 떡고물이 엄청나다 보니, "비난은 한 순간, 현찰은 영원"이라는 식으로 눈 질끔 감고 우리-한나라가 야합을 강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 비난여론이 부담스럽긴 부담스러웠는지,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 번개같이 일을 저질렀다. 국회의장 자문기구인 정개협 일각에서 이를 시도하려다 하다가 국민의 호된 질책을 받고 '없던 일'로 한 게 불과 두 달전인 지난 4월의 일이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은 설마 우리-한나라가 이런 야합을 할지는 상상도 못했고, 다른 곳에 눈이 팔려있던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대다수 언론도 24일이 되도록 이같은 합의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고 있다. 외형상 속 뻔히 들여다 보이는 여야의 '꼼수'가 먹혀드는 양상이다.
그런데도 이같은 '기업 돈 다시받기' 야합에 붙는 타이틀은 '정치개혁'이다. 이 야합을 만들어낸 국회기구 이름이 다름아닌 '정치개혁특위'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연초부터 "배고파 못살겠다" 난리치더니...**
대선 불법정치자금 수사로 부패 정치권에 대한 국민 분노가 들끓던 지난해 1월28일의 일이다.
한나라당과 우리당이 주축이 된 당시 국회 정치개혁특위 정치자금법 소위는 "정경유착을 원천봉쇄하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기업이나 단체 명의로 국회의원 개인후원회는 물론, 각 정당의 중앙당 및 시도지부 후원회에 정치자금을 일절 후원할 수 없도록 하기로 합의했다. 기존법은 기업에 대해 중앙당 및 시.도지부 후원회, 개인 후원회에 대해 최대 2억5천만원까지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었다.
여야는 이같은 합의를 발표하며 "기업 돈과의 결별은 고심끝에 내린 혁명적 결단"이라고 자화자찬했고, 국민들도 "이제야 정치권이 좀 깨끗해지려냐" 기대하며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이 합의는 그해 3월 정치자금법 개정을 통해 정식 발효됐다.
하지만 채 1년도 안돼 연초부터 정치권 곳곳에서 "배고파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오더니, 급기야 우리-한나라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또하나의 '대국민 사기극'**
이들의 야합이 특히 국민에게 더 큰 배신감을 안겨주는 것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깨끗한 정치'와 '초심'을 국민앞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4.30 재보선 참패로 궁지에 몰린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뜻에 승복해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며 "의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불법정치자금을 국고에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나라당도 며칠 전 "왜 한나라당에는 돈을 주지 않냐"고 기업인들에게 술병을 던진 곽성문 의원 사건이 일파만파의 파문을 일으키자, 국민앞에 백배사죄하며 '깨끗한 정치'를 다짐했었다.
하지만 며칠도 안가 이런 '약속'이 눈앞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17대 국회는 '재벌의 국회'**
의원 3분의 2가 물갈이된 17대 국회는 출범하며 '국민의 국회'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17대 국회는 역대 어느 국회보다도 노골적인 '재벌의 국회'다.
과거분식회계 유예, 경제인 사면, 기업도시법 통과 등등, 17대 국회가 한 일은 경제회생을 명분으로 내세운 친재벌 행위의 연속이었다.
지난해말 전국적 땅투기의 결정적 계기가 된 기업도시법을 통과시킬 때, 일부 의원들은 "벗을 바에는 화끈하게 벗고 도와주자"는 얘기를 공개석상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할 정도로 이들의 친재벌 행위는 안하무인이었다.
이들은 이렇듯 노골적으로 재벌을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급부'를 챙길 합법적 길이 막혀있자 평소 대단히 갑갑해 했다. 일부 의원은 사석에서 "코 묻은 개인 후원금 몇 푼 갖고 정치를 어떻게 하냐. 돈 펑펑 버는 기업 도움을 받아야지"라는 푸념을 노골적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23일 우리-한나라의 '기업돈 다시받기' 야합인 것이다.
***반드시 실명 투표하라. 그 면면이 궁금하다**
2002년 서울 월드컵때 국민의 숙원이던 16강전에서 승리한 직후 거스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해 국민들을 감동케 하고 열광케 했다. 8강, 4강, 더 나아가 그 이상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자, 새 목표의 제시였기 때문이다. 당시 히딩크가 말한 '배고픔'은 강렬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한나라가 '기업돈 다시받기' 야합을 하면서 내세운 '배고픔'은 국민에게 '절망'이다.
의원들의 '배고픔'이 과연 진짜 배고픔인가. 의원이 되면 이 정도는 생기겠지, 혹은 이 정도 '폼나는'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기대감' 또는 '목표치'의 미달에 따른 불만 토로가 아닌가.
매일같이 '민생'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의원들이 과연 지금 다수 국민이 수년째 겪고 '극한 경제고통'과, 세기말적 부동산투기에 따른 양극화로 폭발직전인 '계급적 적개감'을 알고나 있는가. 알고 있다면 과연 이런 야합을 백주대낮에 할 수 있단 말인가.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카라마초프의 형제들>을 보면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가난한 이가 되려 하진 않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 일각에 유행처럼 번지던 '휴머니즘'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질타다. 이는 지금 '기업돈 다시받기'에 합의한 우리-한나라에도 그대로 적용가능한 구절이기도 하다.
의원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배고프다 말한다. 그러나 국민 다수는 당신들의 '배부른 배고픔'을 넘어서 죽기 일보직전이다. "부동산 폭등에 폭동으로 대응하자"는 글이 인터넷에 파다한 비상상황이다.
의원들이여, 한가지만 부탁하자. '기업돈 다시받기' 정치자금법을 개정할 때 반드시 실명 투표를 해주기를 바란다. 과연 얼마나 배고픈 의원들이 '기업돈 다시받기'에 찬성하는지, 그 면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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