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8월과 1945년 8월, 파리와 서울은 각각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두 도시가 해방 다음날 한 일은 완전히 달랐다. 파리는 곧바로 재판정을 열었고 서울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 '지켜보기'가 지금까지 8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파리, 총살형 집행이 빠른 도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은 런던 망명 시절부터 이미 각본을 짜 두고 있었다. 독일이 항복하기도 전인 1944년, 프랑스 임시정부는 나치부역자 처벌법을 만들었고 해방과 동시에 전국에 특별재판소를 세웠다. 속도가 무서울 정도였다. 뉘른베르크 국제재판보다 2년이나 앞서 프랑스는 이미 자기 손으로 부역자를 심판대에 세우고 있었다.
가장 먼저 끌려나온 건 나치부역 언론인들이었다. 여론전부터 정리해야 뒤가 편하다는 계산이었을 텐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비시 정권 수반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1차대전 영웅이라는 이력 덕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총리를 지낸 피에르 라발(Pierre Laval, 1883~1945)은 감형의 기미조차 없이 그해 10월 총살당했다. 사형 집행 직전 청산가리를 삼켰다가 위세척으로 살아난 뒤 다시 형장에 끌려간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는 죽는 것도 국가가 허락한 방식으로만 죽게 했다.
부역혐의로 재판받은 사람이 10만 명을 훌쩍 넘었고, 사형이 선고된 사람만 6000명이 넘었다. 물론 이 숙청도 흠은 많았다. 해방직후 '자생적 숙청' 국면에서는 즉결 처형도 벌어졌고, 부역 경력을 세탁하고 살아남아 훗날 장관까지 지낸 인물도 있었다. 그래도 프랑스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약 8년에 걸쳐 이 문제를 국가차원에서 끝까지 다뤘고, 1964년에는 아예 반인도범죄에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까지 만들어 놓았다. 청산은 늦어도 끝은 봐야 한다는 태도였다.
서울, 훈방이 빠른 도시
이승만(1875~1965) 정권은 정반대의 속도로 움직였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고 10월에 반민특위를 꾸렸다. 위원장은 2·8독립선언 주역인 김상덕(1891~1956). 반민특위는 출범 두 달 만에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1903~1994)을 시작으로 친일 경찰 노덕술(1899~1968) 등을 잡아들이며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문제는 이승만이었다. 그는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에 어긋난다는 희한한 논리를 펴며 공개적으로 견제에 나섰고, 급기야 1949년 6월 6일 새벽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조사관들을 연행하고 서류를 압수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대통령이 자국 수사기관을 습격하게 만든 셈인데, 이 습격의 배후로 지목된 게 다름 아닌 내무부 차관이었다. 도둑이 경찰서장을 겸직한 꼴이다.
결국 공소시효는 원래 계획보다 1년 가까이 앞당겨져 1949년 8월 31일로 조기 마감됐다. 반민특위가 실제로 다룬 사건은 600여 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그중 극소수였고 그나마도 대부분 곧 사면됐다. 프랑스가 8년을 들여 처리한 일을 한국은 여덟 달 만에 접었다. 속도경쟁이라면 한국의 압승이지만, 이건 자랑할 속도가 아니다.
왜 이렇게 달랐나?
답은 뻔하다. 프랑스는 저항한 세력이 정부를 세웠고, 한국은 청산해야 할 세력이 정부의 뼈대가 됐다. 드골에게 부역자처벌은 곧 자기 정통성의 증명이었다. 반면 이승만에게 친일관료와 경찰 없이는 정권이 하루도 굴러가지 않는 구조였다. 노덕술 하나만 잡아도 경찰 조직전체가 흔들릴 판이었으니, 애초에 끝까지 갈 수 없는 게임이었다.
오늘 한국에 남는 숙제
이 비교에서 한국이 가져갈 교훈은 명확하다. 청산은 타이밍이다. 정통성이 살아있을 때, 즉 해방과 새 헌법질서가 갓 세워졌을 때 끝을 봐야 한다. 미루면 미룰수록 청산대상이 국가기구 안으로 스며들어 스스로 방어망을 짠다. 반민특위의 좌절 이후 한국사회가 친일파들의 국립묘지 안장이나 훈장서훈 문제로 80년 가까이 씨름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벌써 스무 달 가까이 흘렀다. 반민특위는 출범한 지 여덟 달 만에 두 손을 들었지만, 지금 한국은 그 여덟 달을 이미 두 배 넘게 지나왔다.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이 프랑스식의 철저한 과거청산 8년을 향해 가고 있느냐, 아니면 결국 1949년 반민특위 강제해체의 재방송으로 끝나느냐다. 군대를 동원해 헌정질서를 깨려 한 윤석열과 그 일당을 이번에는 흐지부지 훈방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반민특위가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정의는 늦으면 늦을수록 청구서가 아니라 청구불능 통지서로 바뀐다. 그리고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세상이 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