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풍
1999년 12월 20일,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된다. 442년만이었다. 17세기에는 명과 청이 교체되었다. 20세기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대체했다. 중원의 주인이 네 번이나 바뀌는 동안,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땅을 지속했던 것이다. 일국의 마지막 식민지가 사라진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2년 전 1997년에는 홍콩 또한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홍콩과 마카오에 오성홍기가 나부낌으로써, 유럽의 아시아 지배, 서세동점의 시대가 저물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던 것이다. 그렇게 20세기의 마지막 성탄절이 지나고, 새 천년의 첫 춘절이 밝아왔다.
모든 식민지가 마카오마냥 순탄하게 이양되지는 않았다. 마카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고아는 무력 충돌 끝에 인도군이 탈환했다. 1961년 12월 20일이다. 신사적인 품격과 언행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네루 총리마저 무력행사를 불사했던 것이다. 그만큼 포르투갈은 식민지에서 고분고분 물러나지 않았다. 남아시아만서도 아니다. 인도양 건너 아프리카에서는 사정이 더 고약했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더러운 전쟁'을 지속했다. 물론 포르투갈만 비난할 수는 없겠다. 악명 높기로야 프랑스가 으뜸이다. 동남아의 베트남과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잔혹한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 호치민과 파농의 결사항전 끝에 프랑스를 몰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가 아니었다. 인도차이나에는 곧 미국이 등장했고,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제국주의 적폐 청산은 지난한 과업이었다.
개입의 명분이 없지는 않았다. 냉전을 구실로 삼았다. 혹은 동서냉전을 핑계로 남북지배를 지속하고자 했다. 물론 소련과 중국이 경쟁적으로 매력 공세를 펼치고 있었음도 사실이다. 사회주의 국제주의와 제3세계주의를 내세워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들었다. 포르투갈은 1949년 이래 줄곧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었다. 멀리로는 동티모르부터 가까이로는 앙골라까지, 반공주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렇다고 포르투갈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던 것도 아니다. 1933년 이후 줄곧 독재정권이었다. 포르투갈이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NATO 가입국인 터키도, 스페인도, 그리스도 죄다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는 파쇼국가들이었다. 즉 민주주의가 파시즘에 승리했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류 서사 또한 일면적이다. '서구사'의 감각이지, '서양사'는 아니다. 지중해와 아라비아해를 잇는 서양국가의 태반이 제1세계보다는 제3세계 국가에 더 흡사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에서 수행하는 더러운 전쟁에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청년 장교들이었다. 끓어오르는 독립 요구를 힘으로 묵살하는 일에 더 이상 피를 흘리는 것이 유익하지도 유망해보이지도 않았다. 소장파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반란을 기획한다. 1974년 4월 25일, 행동을 개시한다. 황혼부터 새벽까지, 정권을 접수했다. 무혈혁명에 가까웠던 이 날을 역사는 '4.25 혁명'이라고 기록한다. 카네이션 혁명, '리스본의 봄'이라고도 한다. 적도 이남 식민지에서 불어온 역풍이 식민본국의 혁명을 촉발한 것이다. 그렇게 '서양'의 민주화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2. 냉풍
군사독재의 적폐도 철폐되기 시작했다. 검열이 폐지되고, 망명했던 좌파 지도자들이 속속 귀국했다. 1년의 정권 이양기가 지나면 청년 장교들과 좌파 세력들이 연합하는 진보 정권의 창출이 유력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위치가 '내재적 발전'을 허락지 않았다. 유럽의 장래와 냉전의 향방에 관건적인 장소였다. 시점 또한 중차대했다. 1974년이면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패배가 확실해지던 무렵이다. 1년 후, 남베트남은 물론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인도차이나 전체가 적화된다. 동남아에 이어 남유럽까지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스페인과 그리스,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마저 소련으로 기운다면, 극서를 제외한 유라시아 전체가 붉은 대륙이 되는 것이다. 닉슨 대통령의 탄핵 정국으로 뒤숭숭하던 워싱턴에 비상경보 벨이 울렸다.
재차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반공의 책사, 키신저이다. 1972년 중공과 화해함으로써 소련을 봉쇄하는 작전을 세웠던 그에게도 포르투갈 혁명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재차 지구본을 돌리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릴 궁리를 짰다. 남유럽의 급변 사태에 남아메리카를 참고하기로 했다. 전례가 없지 않았다. 칠레에서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집권한 것이 1970년이다. 남아메리카의 도미노를 방지해야 했다. CIA 개입으로 정권을 전복시킨 것이 1973년이다. 리스본에서도 산티아고를 반복코자 했다. 그러나 만류하는 참모들이 많았다. 남아메리카와는 달리 남유럽은 소련과 너무 가까웠다. 자칫 체제전환을 노린 개입이 전면적 충돌을 야기할지 몰랐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인 사이에서 독재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던 미국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결국 프로젝트는 실행되지 못하고, 기밀 서류로만 남게 된다.
그 키신저의 기획안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만약 포르투갈이 공산국가가 된다면, 아조레스를 분리 독립시켜야 한다는 구상도 있다. 포르투갈은 잃더라도 아조레스만은 사수코자 한 것이다. 그만큼 사활적이었다. 미군 기지가 자리했기 때문이다. 1974년 4월 25일, 혁명 당일에도 미국 대사는 리스본에 없었다. 아조레스 기지를 순시하고 있었다. 1973년 10월, 이스라엘-아랍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전략 폭격기가 출격한 곳이 바로 아조레스였다. 유럽만이 아니라 중동을 관할하는 대서양의 핵심 근거지였던 것이다. 미국이 유럽과 아랍을, 유라비아를, 서유라시아를 지배하는 교두보였던 것이다. 태평양에 하와이가 있다면, 대서양에는 아조레스가 있었다. 그 아조레스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리스본의 내정에 깊이 개입해야 했다. 플랜 B는 서유럽에 견주어 경제 수준이 한참이나 떨어졌던 포르투갈을 유럽경제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서양의 서구화', 포르투갈을 서구로 감싸 안음으로써, 동구로 기우는 일을 차단코자 한 것이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성공의 열매 또한 달콤했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섬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아조레스 기지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1991년 걸프전에서도 아조레스 기지를 마음껏 사용하며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내었다. 1995년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유고 내전에도 깊이 개입할 수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도 재차 폭격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가 만나서 이라크 공습을 결정한 장소가 바로 아조레스였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자회견에 나선 이가 포르투갈의 총리 보로소(Borroso)였다. 미국과 영국에 포르투갈이 합작하여 이라크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보로소는 백악관에도 초청받아 지극한 환대를 누렸다. 대통령 부부는 물론이요,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 콘돌로자 라이스 등 네오콘의 수뇌부와 만찬을 즐겼다. 기지 제공에서 나아가 포르투갈군 파병까지 결정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가짜 뉴스'에서 비롯한 전쟁 범죄에 직접 가담한 꼴이다. 그 대가로 보로소는 2004년 포르투갈 총리에서 EU 집행위원장으로 전격 승진한다. 극서의 포르투갈 총리가 EU의 수장에 오른 것이다. 2006년에는 극동의 한 외교부장관도 UN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공히 이라크전쟁에 부역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3. 열풍
구질서의 타파보다 신질서의 수립이 더 어렵다. 재건은 혁명보다 더 난망한 과제이다. 수성이 창업보다 더 힘들다. 반세기 독재 이후 신체제의 비전이 뚜렷하지 않았다. 민주화 세력들도 정작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지에 대한 명료한 상이 없었다. 포르투갈은 '1974년 체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직면하게 된다. 서서히 개발독재국가가 시장만능국가가 되어갔다.
1977년 3월 28일, EEC 가입을 신청한다. 남쪽을 거두고 북방외교를 펼쳤다. 식민지를 상실한 포르투갈의 새 길을 유럽에서 구한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를 거느리던 제국에서 유럽의 변방으로 소속을 변경했다. 점점 더 서구 국가들과 국제기구의 입김이 드세졌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했다. 서유럽은 이미 1950~60년대 복지국가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복지국가의 위기를 타개하는 처방책, 신자유주의가 굴기했다. 1979년 영국에서 '철의 여인' 대처 정권이 탄생한다. 1980년 미국에서도 레이건이 당선되었다. 영미식 세계화와 유럽 통합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대처는 포르투갈의 유럽 편입에 호의적이었다. 비단 그녀의 신혼여행지가 리스본이었다는 사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영제국에서 영국으로 쪼그라든 처지였다. 이베리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대유럽으로 경제영토를 넓히고자 했다.
포르투갈의 사회당 정권도 대세를 거스르기 힘들었다. 대안은 없다(TINA)고 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 그 오른편, 유럽으로 가는 길이 포르투갈을 선진화시키고, 현대화시킬 것이라고 다독였다. 포르투갈의 오른쪽에는 스페인이 있다. 1986년 1월 1일, 양국의 국경 표지가 바뀐다.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별이 그려진 EC 표지가 세워졌다. 노랑 풍선과 파랑 풍선이 하늘로 떠올랐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따라 풍선이 떨어진 땅은 더 이상 포르투갈만이 아니었다. 그날부로 '유럽의 땅'이 된 것이다. 고위 관료들은 안도감에 흡족했다. 4.25 혁명 이래 마침내 국가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극서의 포르투갈이 서구의 일원이 된 것이다. 역사도 그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듯 했다. 3년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냉전체제가 극적으로 종식되었다. 동유럽도 남유럽을 따라 서유럽화, 서구화의 길(=역사의 종언)에 들어섰다.
리스본이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된 것은 1994년이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새 단장에 나섰다. 오늘날 알록달록한 리스본의 색감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현대 도시의 이미지를 고취했다. 과거 식민지제국의 영화를 회고하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달리는 혁신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극서의 잿빛 도시에서 핫하고 힙한 글로벌 도시로 재탄생했다. 1998년에는 엑스포도 개최한다. 지하철 신노선 구축을 비롯하여 교통망의 현대화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엑스포가 열렸던 장소의 역 이름은 오리엔트(Gare do Oriente)라고 지었다. 유럽의 부상이 바로 이곳 리스본에서 시작되었음을 환기시켰다. 타구스(Tagus)강을 잇는 다리의 이름은 바스코 다가마라고 붙였다. 그가 출항했던 바다에도 다리를 놓고, '4.25 다리'라고 불렀다. 동양에서 서구로, 독재에서 민주로, 전통에서 현대로. 오리엔트역과 바스코 다가마 다리, 4.25 다리, 리스본은 의미가 풍부한 도시가 되었다.
엑스포의 테마도 리스본과 어울렸다. <대양-미래를 향한 유산>(The Oceans: A Heritage for the Future)이었다. 연중 방문객이 천만을 돌파했다. 포르투갈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숫자이다. 카페와 식당의 종업원들도 영어와 프랑스어에 스페인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리스본이 세계도시의 하나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 버금가는 이베리아의 대표도시로 등극한 것이다. 엑스포 열기가 한풀 꺾인 겨울에는 북유럽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주제 사라마구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긴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은 포르투갈인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가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적었다. 아무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진즉에 끝난 것이다.
그 쾌거 속에서 1999년 1월 1일, 유로화가 도입된다. 전면 사용까지 3년의 유예기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해 1월부터 포르투갈 화폐였던 에스쿠도(escudo)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20세기의 마지막 성탄절 선물은 죄다 유로화로 지불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유럽 열기, 유럽 열풍이 정점을 찍으면서 새 천년, 신세기를 맞이한 것이다. 저 멀리 남중국해, 마카오의 상실을 크게 애감해하지 않았다.
4. 삭풍
유럽화와 세계화의 성취를 상징하는 인물이 루이스 피구였다. 1990년대 말부터 스페인리그를 평정한다. 1997년부터 바르셀로나에서 뛰면서 팀을 리그 정상에 올렸다. 2000년, 그는 엄청난 논란을 야기하며 라이벌 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그리고 마드리드를 우승으로 이끌며 발롱드르를 차지한다. 바로 그 해부터 그의 통장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유로화가 입금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FIFA 선정 올해의 선수가 되었다.
반면으로 그의 고향 마을 농부들의 삶은 강퍅해졌다. 유럽의 다국적 식품 기업의 진출로 시장이 잠식당했다. 피구가 바르셀로나의 유니폼을 입었던 1997년부터 이미 언론에서는 '두 국가' 현상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리스본처럼 유럽화 된 글로벌 도시와 포르투갈적인 지방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도시만 21세기로 진입하고, 나머지 지방들은 20세기에 남아있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뚜렷해졌다. 글로벌과 로컬 간 격차사회가 불거진 것이다. 그러나 그 불만을 달래는 것은 재차 화려하고 성대한 국제대회였다. 2004년 유로 축구대회를 개최한다. 6월과 7월, 축구 열기에 휩싸였다. 개최국이 개막전에 패배하는 위기에도 기어이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끝내 결승전에서 지면서 준우승에 그친다. 루이스 피구의 전성기도 지나갔다. 포르투갈도 내리막길이었다.
구조적 병폐가 심했다. 엑스포도 유로 2004도 유럽 자금으로 치른 것이다. 빚잔치였다. 유럽이 기침하면 포르투갈은 감기에 걸릴 정도가 되었다. '종속문화'라는 말도 등장했다. 유럽의 개입 없이는 포르투갈이 홀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비판하는 개념이다. 게다가 EU의 향로 또한 위태로웠다.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EU 헌법을 부결시킨다. 부랴부랴 대체 입법으로 고안한 것이 '리스본 조약'이다. 위기에 빠진 EU의 구원투수로 리스본의 이름을 역사에 새긴 것이다. 그러나 명예인 동시에 멍에가 되었다. 갈수록 포르투갈의 인재들이 리스본을 떠나 브뤼셀이나 파리, 런던, 베를린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금수저와 흙수저는 말 그대로 '딴 나라'에서 살았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도 심해졌다. 1999년 총선은 61% 투표율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21세기 첫 선거였던 2001년 대선은 50%에 그쳤다. 좌/우간 경계도 흐려졌다. 정당 간 교체가 있을 뿐, 실생활이 크게 달라지는 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선출하는 리스본의 대표자들보다는 입김이 미치지 않는 브뤼셀의 유로파 관료들의 영향이 더 강한 것 같았다. 슬금슬금 유럽 회의론이 피어났다.
결정타는 2008년이다. 세계금융위기가 터졌다. 포르투갈은 2010년부터 파장이 본격화되었다. 신용카드도 마이너스 통장도 한도를 다했다. 인위적으로 부양되었던 부동산 시장은 급격히 얼어붙었다. 자칫 국가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결국 2011년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유럽중앙은행과 IMF가 제시하는 혹독한 구조조정과 긴축정책이 실시되었다. 구제금융에서 벗어난 것은 2014년 5월 17일이다. 그리스 같은 최악의 사태만은 면했다고 안도하고 자위하기는 힘들었다. 자괴감이 만연했다. 이러려고 EU에 가입했던가? 결사적으로 필사적으로 서구의 일원이 되려고 했건만, 돌아온 것은 개돼지(PIGS: Portugal, Italy, Greece, Spain)의 수모였다. 게으르고 무능한 남유럽 국가들이 EU 전체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질책과 핀잔이 빗발쳤다. 2014년 4월 25일, 리스본은 적막했다. '4.25 혁명' 40주년은 빛이 바랬다.
여전히 유럽화/현대화가 모자란 것인가? 아니면 유럽화 자체가 문제였던 것인가? 갈수록 후자 쪽으로 여론이 기울고 있다. 아테네처럼 거리의 폭력으로 분출되지는 않았다. 다만 별반 차이 없는 기성의 중도좌파, 중도우파 정당이 아니라 극좌파와 극우파가 동시에 약진하고 있다. 극좌와 극우가 합작하여 1974년 이전, 살라자르의 망령도 소환시키고 있다. 그는 비록 독재자였을망정, 포르투갈의 독립과 자주와 주체를 고수했다는 것이다. 유럽화 이전의 느긋했던 삶(Slow Life)을 향수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세계화의 속도에 맞추어 부단히 변화했지만, 포르투갈이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유럽은 질주했던 것이다. 피로와 과로가 누적되었다. 이제 1974년 당시의 혁명가를 부르며 탈세계화, 탈유럽화, 탈유로화를 외친다. 고립주의와 보호주의의 물결이 리스본을 집어삼킨다. 탈서구, 탈진실 시대, 포르투갈은 항로를 잃은 듯하다. 새로운 대항해의 돌파구를 열어내지 못하고 있다.
5. 돌풍
유럽에서는 라이온 에어를 애용했다. 벵골만의 에어 아시아, 아라비아해의 에어 아라비아에 견줄 수 있는 저가항공사이다. 지중해 너머 대서양까지 닿는다. 하지만 저렴한 만큼이나 비행기 또한 적은 편이다. 이베리아를 이륙하여 대서양으로 진입하면서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돌풍이 잦다고 한다. 한참 진땀을 뺀 끝에야 겨우 아조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씨 변덕이 심한 곳이다. 맑은 하늘에 바닷가에 나가노라면, 거친 파도가 일고 비가 쏟아졌다. 숙소로 철수할라 치면 다시 눈부신 햇살이 뭍을 갈랐다. 기상용 인공위성이 개발되기 전까지, 이곳 아조레스에서 수집된 기상 정보가 유럽 일기예보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1755년 11월 1일, 기상 역사상 가장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난다. 대지진이 일어났다. 쓰나미까지 덮쳤다. 특히 대서양에 면하고 있는 리스본의 피해가 극심했다. 그래서 '리스본 대지진'으로 기억된다. 건물의 8할이 무너질 만큼 초토화되었다. 이전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17~18세기 리스본은 황금색으로 빛났다. 식민지 브라질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금이 리스본으로 유입되었다. 거개를 종교 건축물 짓기에 할애했다. 로마에 버금가는 가톨릭의 중심으로 리스본을 만들겠다는 종교심의 발로였다. 20만 군인보다 20만 성직자들에게 더 많은 자원을 할당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남유럽에서 가톨릭의 위세는 여전했던 것이다. 황금 궁전과 황금 성당으로 리스본은 찬란했다.
하필이면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난 날이 만성절(All Saint's day)이었다.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축제날에 전대미문의 재앙을 경험한 것이다. 탓에 외형적인 도시 파괴로만 그치지 않았다. 정신적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기성의 사상과 관념마저 허물어졌다. 정치사회적 격변을 야기한 것이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신도시를 재건키로 한다. 신심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로 중무장한 계몽주의 계획도시를 건설코자 했다. 20년에 걸친 대사업을 통하여 개조된 리스본은 더 이상 영성으로 충만한 중세도시가 아니었다. 전통과 완전히 단절된 근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신앙(revelation)에서 이성(reason)으로, 종교에서 철학으로, 신학에서 과학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손을 잘라내었다.
다시금 리스본은 유럽의 전위가 되었다. 대지진이 일어나고 30년이 흘러 프랑스에서도 대혁명(1789)이 일어난다. 앙시앙 레짐의 적폐인 귀족들과 종교인들에 맞서 합리주의와 세속주의, 계몽주의에 투철한 자본가들이 궐기한 것이다. 돌아보면 최초의 '재난 자본주의'가 가동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라는 (구)자유주의를 ‘쇼크 독트린’으로 주입시켰다. 19세기, 마침내 유럽에서 학교가 교회를 대체하고, 이념이 신앙을 누르기 시작한다. 하여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또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관계를 통하여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돌발적이고 돌출적으로 대문자 근대(Modern)가 격발된 것이었다.
그래서 중세의 속성을 고스란히 간직했다. 절대주의가 계몽주의로 이행한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를 종교처럼 절대화하는 계몽절대주의가 되었다. 성과 속의 공진화를 꾀하기보다는 속이 성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마녀사냥을 거꾸로 세운 것이다. 세속화를 곧 근대화인양 등치시켰다. 모든 공적 영역에서 종교를, 전통을 배제시켜갔다. 구교에서 신교로, 신교에서 계몽(교)로 이행하는 진보적인 역사관도 확립시켰다. 그리고 천년 중세를 암흑기로 지우고 그리스문명을 서구문명의 기원으로 삼는 서구사의 기본 틀도 완성시켰다. 공히 가짜 역사(Fake History)이고, 가짜 근대(Fake Modern)라고 생각한다. 아테네에서도 바티칸에서도 지난 백 년간 주입된 '서구사'가 가공할 프로파간다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탈진실 시대, 탈서구 시대. 역사적 팩트를 체크하고 대안적 진실을 찾기 위해 먼저 방문한 곳은 바티칸이다. 마침 로마조약 60주년을 기념하는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을 야단치는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목하 유럽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운 지도자는 더 이상 세속 정치인들이 아니다. 기성의 좌/우파 정당들에 대한 신뢰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바닥에 떨어졌다. 지긋지긋한 20세기형 진보/보수 정치에 대한 환멸과 '새 정치'에 대한 갈애야말로 전 지구적인 '뉴노멀'(New Normal)이다. 그 신상태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교황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영성에 목마른 현대인들의 경건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4차 산업혁명시대, 구원과 구도는 더욱 갈급한 숙제가 되었다. 민주와 천주 사이, 감수성이 달라진 것이다. 성과 속의 역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베리아에서 이탈리아로 향했다. 역사의 되감기가 한창인 바티칸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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