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 히잡의 날
지난 2월 1일은 '세계 히잡의 날'이었다. 2013년부터 시작되었다. 올해 유독 이목이 집중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슬람 7개 국가에 대한 반(反)이민 행정 명령을 내림으로써, 나라 안팎으로 소란을 일으켰던 시기였다. 평소에 히잡을 쓰는 무슬림 여성들과, 하루만은 히잡을 써보려는 비무슬림 여성들이 뉴욕에 집결하여 반(反)트럼프 시위에 나선 것이다. 비단 뉴욕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150개 국가, 300여 도시에서 히잡의 날 행사가 동시에 개최되었다. 종교와 인종, 국적을 망라하여 아메리카의 국수주의를 지탄하는 글로벌 페스티벌이 된 것이다.
히잡에 처음 주목한 것은 이스탄불에 머물 때였다. 이슬람 패션 주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슬람 패션 브랜드의 박람회 격이다. 오가는 길에 두어 차례 아이쇼핑도 했다. 무료로 배포하는 패션 잡지 <알라>도 손에 들었다. 터키에서 발행되는 월간지라고 한다. 모로코부터 인도네시아까지, 이슬람 세계 전역의 패션 산업 종사자들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아랍어 특별판으로 제작되었다. 흥미로운 기사들이 적지 않았다.
온라인 히잡 아울렛인 'E-Terettur'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사우디의 벤처 자본을 투자받아서 창업에 성공한 20대 여성이 청년 사업가로 주목받고 있었다. 터키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 'Modanisa'도 60여 개 국가에 히잡을 수출하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 무슬림 소비자들이 애용하는 해외 직구의 메카가 된 것이다.
하나만 설피 알고, 둘은 모른다. 둘을 겨우 알아도, 열은 미처 모른다. 아라비안나이트가 펼쳐진 250여 일 동안거듭 되새겼던 생각이다. 오만과 편견이 켜켜이 쌓여 있다. 히잡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흔히 여성 억압의 상징처럼 간주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리 간단치가 않다. 20세기 내내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을 썼던 것이 아니다. 이란과 터키 같은 개발독재형 우파국가들에서도,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나 나세르의 이집트 같은 좌파 독재국가에서도, 히잡 착용은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국가가 국책으로 히잡을 벗겨냈던 것이다. 그 독재 권력에 맞서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열혈 여성들부터 히잡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억압은커녕 저항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의상을 통한 인정투쟁은 민주주의가 착근하면서 남성 지도자들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에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양복을 입거나 군복을 입었다. 지금은 드물다. 갈수록 전통적 복장으로 갈아입고 있다.
즉 히잡 쓰기는 천 년이나 고인 물이 아니다. 백 년의 격변 끝에 재귀한 새 천 년의 새 물결이다. 뉴웨이브이고, 누벨바그이다. 자부심과 자긍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1923년 건국 이래 철저한 세속주의 원칙을 관철시킨 터키에서 히잡이 대세가 된 것도 신중산층이 부상하면서이다. 구중산층은 군사 독재 정부에 부역하는 서구파였다. 민주화를 추동한 것은 재이슬람화를 견인하는 신중산층이었다. 이 신중산층 여성들이 패션과 이슬람의 결합을 욕망했던 것이다. 두툼해진 지갑으로 이슬람 브랜드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옷차림을 통하여 경건한 무슬림 여성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단정한 옷차림을 고수하되 고혹적인 품격도 갖추기를 원한다. 그만큼 다양한 색상과 다채로운 스타일의 히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히잡 패션은 2000년대 이후 급성장한 신종 산업이다.
그 히잡 다시 쓰기의 물결이 아랍을 지나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지중해 건너 유럽이었다. 왈가왈부 치열한 곳도 유럽이다. 그 중에서도 유별난 나라가 프랑스이다. 2016년 여름, 부르키니(무슬림 여성이 입는 수영복)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파리의 논쟁을 이스탄불에서 지켜보았다. 시좌(視座)가 바뀌니, 그간 보이지 않던 사각(死角)이 눈에 들었다.
2. 니스 : 세속주의 vs 식민주의
논쟁이 촉발된 장소는 니스였다. 아름다운 해양 휴양지이다. 무장한 백인 남성 경찰들이 부르키니를 입은 무슬림 여성들을 물 밖으로 끌어냈다.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복장이라며, 옷을 벗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무슬림 여성은 반발했다. 만인들에게 자신의 맨살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프랑스 헌법에 명시된 세속주의를 위반했다며 경찰서로 연행했다. 적지 않은 벌금까지 부가되었다.
제동을 건 것은 법원이다. 부르키니 착용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바닷가에서 어떤 옷차림을 하든, 개인의 자유라고 했다. 사법부의 판단에 정치권이 가세하여 딴죽을 걸었다. 사회주의자 마뉴엘 발스 총리는 법원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성토했다. 부르키니는 여성의 노예화를 상징하는 옷이라는 것이다. 좌파가 불을 지피자, 우파는 기름을 부었다. 무슬림 이주자들이 프랑스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반(反)이슬람으로 좌우합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참에 헌법을 고쳐서라도 부르키니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다. 극우파의 선봉에 섬으로써 다시금 대권을 취하고자 했다.
프랑스에서 유독 논쟁이 뜨거운 이유가 있다.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했던 나라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좀처럼 세속주의가 관철되지 못했다. 19세기 내내 공화정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도저했다. 그 반동의 최전선에 교회가 자리했던 것이다. 따라서 혁명파들은 더더욱 '성(聖)과 속(俗)'과의 분리를 신조로 삼게 되었다. 프랑스인이냐, 기독교도이냐,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좌파와 우파 간에는 똘레랑스를 베풀어도, 앙시앙 레짐의 부역자들에게는 관용을 허용치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는 지난 백 년 동안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가 되었다. 그 잣대를 다른 종교, 이슬람에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국민이냐, 무슬림이냐, 선택을 강요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변형도 등장했다. 19세기와 20세기, 프랑스의 '문명화 사업'(mission civilisatrice)을 철저하게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슬람이 화근이 된다는 역사 수정주의이다. 즉 부르키니 논쟁의 근저에는 세속주의를 빙자한 식민주의가 자리한다. 더 깊숙이는 인종주의도 똬리를 틀고 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미개한 무슬림들을 해방시키고 개조시켜야 한다는 200년 전 사고방식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일개 국가에 불과한 프랑스의 가치가 보편종교 이슬람보다 우월하다는 전제가 내장되어 있다. 알제리에서, 시리아에서, 프랑스에 맞서 반제국주의 운동을 펼쳤던 여성들이 히잡을 다시 씀으로써 정체성과 주체성을 재건해갔던 탈식민의 역사성을 철저하게 소거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히잡의 정치성은 프랑스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지난 2년, 내가 살펴본 유라시아의 도처에서 저항과 해방의 상징으로 히잡이 환기되고 있었다. 중국의 인민으로만 호명되기를 거부하는 신장 위구르의 여성들도, 인도의 국민으로만 불리지 않기를 원하는 카슈미르의 여성들도, 버마족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아웅산 수치의 미얀마 국민이 되기를 우려하는 로힝야족 여성들도 히잡을 씀으로써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이슬람사상의 내재적 논리로써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세속의 국가는 부단하게 변하는 것이다.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일시적인 것이다. 근원적인 정체성은 무슬림이다. 탈민족주의적이고 초국가주의적인 글로벌 움마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뿌리 깊은 것이다. 20세기 만연했던 '세속주의 근본주의'만으로는 쉬이 재단하기 힘들다고 하겠다.
3. 리우 : 비키니 vs 부르키니
지중해 건너 유럽의 자폐적인 논쟁을 무색하게 만든 것은 대서양 너머 라틴아메리카였다. 브라질의 수도 리우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남미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이다. 더불어 역대 올림픽 가운데 여성 선수의 비율이 가장 높은 올림픽이기도 했다. 47.7%로 남녀 비율이 대등해졌다. 그 일등공신이 바로 히잡이었다. 2012년 올림픽 위원회가 히잡을 공식 인정함으로써,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 국가대표들이 대거 참여할 길이 열린 것이다. 이슬람 국가로만 한정되지도 않았다. 현재 무슬림이 살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의 펜싱 대표 이브티하즈 무하마드 또한 히잡을 쓰고 참여했다. 단체전 동메달을 땄지만, 금메달리스트를 능가하는 주목을 받았다.
독일과 이집트가 겨룬 비치발리볼 경기도 화제를 모았다. 한쪽은 비키니, 다른 쪽은 부르키니를 입고 실력을 겨루었다. 팬티와 탑만 걸치지 않아도 바다 스포츠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르키니를 처음 고안했던 무슬림 디자이너 아헤드 자네티의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남의 나라에서 낯선 음식을 먹고 설익은 말로 살아가야 하는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푸는 편이다. 헬스장과 요가원을 꼬박꼬박 다닌다. 이란처럼 남녀가 아예 분리된 곳도 있다. 가급적 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려고 한다. 내가 좋은 것을 남에게 권하기 보다는,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다 싶었다.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만 운동을 하노라니, 군대인양 하였다. 카투사 출신인 나는 논산훈련소에서나 경험했던 바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발길이 뜸해졌다. 터키와 이집트에서는 같은 장소를 사용하되, 여성들이 몸을 꽁꽁 가리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족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시각적인 즐거움이 덜했다. 곁눈질을 거두고 운동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중국인이에요?" 중국어로 물었다. "아닌데요. 한국 사람입니다." 중국어로 답했다.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중국의 스마트폰 기업 'OPPO'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아랍어와 중국어에 영어가 뒤섞인 외계어로 대화하는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는 히잡을 할 때도 있고,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왜 답답하게 히잡을 쓰고 운동을 하냐고 물었다, 된통 혼이 났다. '무슬림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던 것이다. 조금도 갑갑하지 않단다. 모자 쓰고 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답답한 것은 너 같은 엉큼한 숫컷일 뿐이라고 반격한다. 자신은 도리어 자유롭다고 했다. 흘낏거리는 남성의 끈적끈적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에 휩쓸리지도, 소비주의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샴푸와 린스, 컨디셔너를 매일 같이 쓰지 않아도 되고, 염색과 드라이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도 들이지 않게 된단다. 자신의 신체를 남성의 시선을 매개한 자본의 논리에 정복당하지 않겠다는 여성적 주체성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본인이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남자 앞에서만 머리를 푼다. 당당하다 못해 당돌한 응수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두루는 니캅이 선사하는 해방감도 설명해 주었다. 타인의 시선, 평판에서 완벽하게 차단된단다. 눈만 배꼼 들어내니 가방부터 신발까지 조금도 치장하지 않아도 된다. 하이힐을 신어 발가락이 구부러지고 골반이 틀어지는 형벌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여성성을 발산시키라고 부추키는 성형산업, 미용산업, 다이어트산업의 유혹도 차단할 수 있다. 남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남의 시선으로 의식을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히잡을 쓰는 날이면 더더욱 자신이 무슬림 여성이라는 자각을 더하게 된다고도 했다. 무슬림적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반듯하고 경건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보태게 된다는 것이다.
히잡을 쓰고 있기에 더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똘망똘망한 눈빛 앞에서 나는 마땅하게 대꾸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자유주의 근본주의'에 은근슬쩍 묻어가려했던 흑심마저 발로 난듯하여 부끄러운 마음까지 일었다. 졸지에 모자라고 못난 사내로 쭈그러진 것이다. 하나만 설피 알고 둘은 모르며, 둘은 겨우 알아도 열은 미처 모른다, 는 그날 밤에 처음 떠오른 말이다.
4. 이슬람 시크 : 네오 클래식 패션
내가 몰랐던 그 열의 세계로 '히자비스타'도 있다. 히잡과 패셔니스타를 결합한 말이다. 이미 이슬람 금융이나 할랄산업만큼이나 비중이 상당했다. 유명한 디자이너도 많다. 스웨덴의 이만 알데베가 첫 손에 꼽힌다. 부모님은 요르단인이다. 아버지는 울라마였다. 스톡홀름의 모스크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 늘상 까만색 히잡만 쓰는 아줌마들의 옷차림이 지겨웠다고 한다. 무슬림 패션의 현대화를 진지하게 궁리하게 된 것이다. 전통의 고수도 아니고, 탈이슬람화도 아니다. 처음에는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스웨덴 민족주의자 모두가 그녀가 선보이는 히잡 패션을 거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리비안 아이돌'의 대명사가 되었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H&M의 히잡 디자이너가 바로 그녀이다.
미국에서는 라비아 Z가 유명하다. UAE 출신이다. 9.11 이후 히잡을 벗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이슬람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경건한 무슬림으로서 미국인이 되기를 원했다.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히잡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자유 의지의 표출이고,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 또한 히잡의 현대화를 꾀한다. 지금은 DKNY와 유니클로, 망고의 히잡 디자이너가 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중동, 북아프리카, 유럽, 동남아시아, 남아시아까지 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딜야라 사드레이바는 러시아의 무슬림 여성이다. 터키나 중동에서 수입되는 히잡 의상들이 마땅치가 않았다. 러시아의 기후와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옷을 수선해서 입다가 창업까지 이르렀다. 'Bella Kareema'라는 유명한 브랜드까지 되었다. 러시아에서의 성공은 물론이요,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런던과 두바이, 파리와 밀라노, 뉴욕과 상하이를 오가며 패션쇼를 연다. 내가 이스탄불에서 보았던 것도 그녀의 패션쇼였다. 전통과 현대의 접목, 이슬람적 보편과 로컬 문화의 융합이 콘셉트였다. 그래서 무슬림 여성만 겨냥하지도 않는다. 모든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하여 히잡을 차용할 뿐이다. 이런 민간의 저류가 있었기에 '세계 히잡의 날'까지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6년 글로벌 이슬람 경제 보고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 소비자들이 의복에 2조3000억 달러를 소비했다고 한다. 2030년에는 3조5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독일, 프랑스 유럽 3대국을 합친 것을 능가하는 수치이다. 재차 이슬람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2070년이면 인류의 절반이 무슬림이 된다. 그 무슬림의 절반은 또 여성이다. 세대 구성도 인상적이다. 무슬림의 평균 나이가 30세이다. 유럽과 미국은 45세이다. 패션에 관심이 높은 이 젊은이들마저 성과 속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유럽은 종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비중이 30%까지 떨어졌다. 미국은 50% 수준이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여전히 88%가 종교를 중요하다고 여긴다. 히잡 패션산업이 갈수록 유망한 까닭이다. 시장은 이미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D&G 같은 명품 브랜드도 히잡 컬렉션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슬람적 시크'(Islamic Chic)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조국 근대화'를 위하여 국법으로 히잡을 벗겨내었던 20세기에서, 글로벌 트렌드로써 히잡을 다시 쓰는 21세기로 반전하고 있는 것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네오 클래식이 재기하고, 재귀한다.
이 흥미로운 역(逆)세계화의 풍경을 지속적으로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알자지라를 애청했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머무는 장소는 달라져도 채널만은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세계화=재이슬람화'의 추세를 살피는 유용한 학습 수단이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알자지라의 본부도 방문해 보았다. 카타르의 도하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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