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의 맛
땅 끝 마을이다. 유라시아의 극서이다. 오래, 세계사의 변방이었다. 13세기 유라시아를 대일통한 몽골세계제국의 영향도 미미했다. 동아프리카의 기린이 베이징으로 이동하는 몽골식 세계화에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유럽 중에서도 주변이었다. 그나마 동지중해는 활달했다. 서아시아와 밀접했다. 베니스와 제노바는 동방무역으로 번영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다마스쿠스와 긴밀했다. 하지만 지중해의 서북, 리스본은 한적했다. 적막하고 적조한 깡촌이었다.
유라시아의 변방이자 지중해의 변두리였지만, 대서양과 면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사'로 뻗어나가는 첨단이 될 수 있었다. 인도양으로 우회하는 항해로도 리스본에서 출발했다. 15세기 지중해는 여전히 이슬람의 호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상징적이다. 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다.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되었다. 이슬람제국 이스탄불의 선진문물이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르네상스를 촉진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로, 중국으로, 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남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봉을 돌아서야 겨우 인도양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바람을 잘못타서 대서양을 지나게 된다. 얼떨결에, 엉겁결에 아프리카 마주 편 아메리카에 당도했다. 대서양(신해양)과 인도양(구해양), 유라시아(구대륙)와 아메리카(신대륙)를 잇는 선봉대가 된 것이다. 리스본이 지구사의 전위가 되는 혁신도시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지구촌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세계지도를 펼치면 포르투갈식 지명이 여럿이다. 남아메리카의 최대국가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쓰는 나라가 되었다. 대만의 별칭은 여전히 '포모사'(Formosa)이다. 같은 이름의 도시가 아르헨티나에도 있다. 극동의 섬나라 일본의 나가사키에 조총과 야소교를 전파해준 것도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밀레니엄 직전까지 장장 500년의 영화를 누렸던 유럽 해양제국의 원조였던 것이다.
그 상징적인 인물로 바스코 다가마를 꼽을 수 있겠다. 벨렘(Belem)에 그의 무덤이 자리한다. 지중해와 대서양이 합류하는 곳이다. 전망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특히 에그타르트의 원조라는 'Pasteis de Belem'이 유명하다. 달콤한 타르트와 시나몬 롤에 에스프레소 커피를 곁들인 리스본의 대표 메뉴를 자랑한다. 커피는 아라비아에서 전파된 것이다. 시나몬은 스리랑카에서 건너온 것이다. 설탕은 말라카에서 전해졌다. 인도양과 접속함으로써 유라시아 극서 변두리 사람들의 후각과 미각이 살아났다. 세계를 달리 바라보는 시각도 일깨웠다. 더 많은 향신료와 더 맛있는 식도락과 더 큰 이윤에 대한 욕망이 모험과 탐험을 촉발한 것이다. 그 탁 트인 망망대해를 내다보면서, 시나몬 롤 한 입을 베어 물었다. 특유의 계피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달달한 설탕이 혀끝에서 녹아내린다. 땅 끝 사람들을 감탄시킨 인도양의 풍미이다. '세계의 맛'이다. 세계사를 전환시킨 제국의 감각이다.
2. 최초의 지구제국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포르투갈에서 왔습니다.
인도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껌뻑거렸다. 금시초문, 여태 들어보지 못한 나라이다. 유독 턱수염이 더부룩하고 머리칼은 붉은 빛이 돌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괘념치 않았다. 워낙 많은 이들이 고아를 찾았다. 이방인들의 출몰이 원체 잦은 곳이었다. 아라비아인들도, 아프리카인들도, 아시아인들도 익숙하던 바이다. 모로코에서 왔다는 이븐 바투타는 인도에서 행정관까지 역임했다. 중국에서 왔다는 정화는 붓다와 시바와 알라를 모시는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 중의 하나, 신출내기려니 했다. 제국의 교체는 대저 내륙에서 불어왔다. 유목민과 정주민 간 길항이 유라시아사를 추동했다. 바다는 권력 쟁투보다는 교역과 교류의 장소였다.
질문했던 인도인도, 대답했던 유럽인도 아랍어로 소통했다. 통역을 맡은 이는 북아프리카의 오래된 항구도시 튀니스 출신의 무슬림이었다. 아랍어가 인도양 세계의 보편어, 국제어였던 것이다. 고아의 주민에게 포르투갈은 낯선 이름이었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인도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인도를 찾아서 먼 길을 떠나온 것이었다. 부의 원천, 세계의 중심이었다. 중심은 주변을 몰랐지만, 변방은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인도를 향하여, 아시아를 향하여 바람을 뚫고 파도를 넘어 기어이 고아에 당도한 것이다. 리스본에서 장장 10개월이 걸렸다. 1498년의 일이다.
수많은 바닷사람들이 인도양 세계의 교역망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포르투갈 인들은 달랐다. 인도양을 대서양과 결합시켰다. 인도양과 태평양도 연결시켰다. 1498년 바스코 다가마와는 다른 방향으로 아메리카에 이른 이가 콜럼버스이다. 제노바 출신인 콜럼버스 역시도 포르투갈 해양 공동체의 일원으로 접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리스본에서 살기도 했다. 그가 결혼한 여자도 포르투 산투(Porto Santo) 섬의 주지사 딸이었다. 그 집안이 축적해둔 항해지식과 항해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1518년 최초로 지구를 일주한 마젤란도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이로써 리스본은 지구촌의 허브가 되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연결시켰다. 이디오피아의 고산과 아마존의 정글이 접속되었다.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허브를 유럽에 전파하고, 교황에게는 코끼리를 선사했다. 아프리카에서 노획한 노예를 아메리카에 팔았고, 그 노예들이 탄광에서 채굴한 은을 아시아에 널리 유통시켰다. 아시아의 상품이 리스본을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아메리카의 은이 리스본을 통하여 아시아로 확대되었다. 중국의 차(茶, cha)가 인도에서는 쨔이(चाय)로, 아랍에서는 샤이(شاي)로, 유럽에서는 티(Tea)가 되어갔다. 몽골이 대륙을 평정했다면, 포르투갈은 바다를 섭렵한 것이다. 여지껏 세계사를 이끌었던 육상제국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최초의 해양제국이 발진했다.
고아에 인도국(Estado da India)을 세운 것이 1505년이다. 해양제국 식민지 경영의 전범이 되었다. 고아를 점령함으로써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잇는 서인도양의 상업망을 장악할 수 있었다. 동인도양은 벵골만이다. 말라카와 스리랑카 너머 중화세계까지 연결되었다. 마카오에 도달한 것이 1514년이고, 나가사키까지 이른 것이 1543년이다. 반세기 후, 임진왜란(1592)이 일어난다. 조총으로 열도를 통일한 도쿠가와 신정권이 반도와 대륙 진출까지 도모한 것이다. 야소교 선교사로부터 중국과 인도, 아랍에 이르는 인도양세계의 고급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하지만 때가 너무 일렀다. 명청 교체를 통하여 중화세계는 복원되었다. 중화세계의 붕괴는 청일전쟁(1894), 300년 이후의 사태였다.
인도에서도 무굴제국은 건재했다. 고아는 델리에 견주자면 변방이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지나 영국에 이르러서야 인도를 완전 정복할 수 있었다. 세포이항쟁과 아편전쟁, 메이지유신까지 3세기의 세월이 더 소요된 것이다. 그럼에도 Estado da India가 '서세동점'의 시발이었다는 의의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상업과 해군을 결합시켰다. 비교우위에 따른 시장경쟁이 아니라, 군사적 우위에 바탕하여 시장을 조작했다. 스리랑카의 시나몬도 말라카의 후추도 시장가보다 저렴하게 구매해서 유럽에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인도양세계의 몬순바람을 타고 작동하던 '자연무역'을 대신하여 '자유무역'을 입안한 것이다. 포르투갈을 모방한 네덜란드 역시 동인도회사를 발족시키고 '항해의 자유'(Mare Liberum)를 표방했다. 게임의 룰을 바꿈으로써 무슬림을 배제한 배타적 연결망을 창출한 것이다. 자유무역이 자연무역을 대체함으로써 홍해와 페르시아만은 활기를 잃어갔다. 인도양 연결망이 달라지면서 지중해의 세력균형도, 유라비아(유럽과 아랍)의 역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권력과 지식은 불가분이다. 포르투갈에서 <아시아>(Da Asia)가 출간된 것이 1552년이다. 백여 년 포르투갈이 축적한 아시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망라한 백과사전 격이었다. 포르투갈은 물론이요, 유럽 전체의 개항과 개국을 촉발한 획기적인 저서였다. 네덜란드도, 프랑스도, 영국도 쇄국 상태를 거두고 경쟁적으로 아시아로 축을 옮겼다(pivot to Asia).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학습이 유럽의 근대화를 추동한 것이다. 유럽의 개화사상, 계몽주의가 출발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인구 백만에도 미치지 못한 소국이었다. 중국의 대도시 난징이나 항저우보다도 규모가 작은 나라였다. 고작 170명, 리스본을 떠났던 그 소박한 출항이 세계사를 바꾼 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크게 흔들었다.
3. 최후의 십자군
역사의 역설은 리스본의 개항과 유럽의 개국을 이끌었던 그 선발대들이 정작 개화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반대였다. 척사파였다. 유럽에 불고 있는 르네상스의 바람을 거부하는 반동파였다.
1516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로 이사한다. 64세, 만년이었다. 그림 석 점을 가지고 간다. 두 작품은 종교화였고, 다른 하나는 초상화였다. 훗날 <모나리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바로 그 그림이다. 다빈치는 이탈리아의 활기찬 도시국가에서 태어났다. 동방무역으로 아시아의 신식문물을 일찍이 접할 수 있었다. 사상적 혁신과 예술적 창조의 영감이 되었다. 그의 프랑스행은 르네상스의 북진을 의미했다.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들도 경쟁적으로 이탈리아의 그림과 조각, 서적을 구입했다. 다빈치의 대표작 <최후의 만찬> 또한 파리로 공수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탈리아와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르네상스의 허브가 이스탄불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오스만제국 견문단'을 파견한다. 사절단을 통하여 칼리프 슐레이만에게 조공도 바쳤다. 프랑스와의 연합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술탄은 거절한다. 지중해 르네상스 세계의 유일패권국으로 하위동맹국을 거느릴 필요가 없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도 사절단을 이스탄불에 보냈다. 당시 영국은 종교개혁의 와중이었다. 오스만과 연합함으로써 가톨릭 교황에 맞서고자 했다. 칼리프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처사였다. 유대교도, 천주교도, 이슬람교도 모두가 아브라함에서 비롯한 형제종교이다. 종교개혁이 종교전쟁으로 비화하는 신/구교 간 다툼이 낯설었다. 다종교가 공존하는 오스만제국의 내실을 더욱 다질 것을 다짐했다. 슐레이만 개인적으로는 신교에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우상숭배를 배척하고 책의 힘(=이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이슬람에 더 가깝다고 여긴 것이다.
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와는 전혀 딴판이 벌어지고 있던 곳이 이베리아 반도였다. 십자군 원정이 예외적으로 성공한 장소였다. 다마스쿠스 정복은 실패했지만, 리스본만은 수복할 수 있었다. 지중해 문명권의 중심 지역은 죄다 상실했지만, 극서의 일각만이라도 취한 것이다. 유난하고 유별난 곳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복수심을 더욱 부추키는 사태였다. '제2의 로마'마저 상실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괴담이 파다하게 퍼져갔다. 이슬람문명권 너머 동양에 고대의 기독교왕국이 존재한다는 전설이다. 짐작컨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던 몽골제국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지 싶다. 그 동양의 기독교왕국과 연합함으로써 인도양을 장악한 이슬람제국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몽상을 꾸었다.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중세인의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인도양을 건넌 것이다. 이슬람이 전수해준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고대의 기독교왕국을 찾아 나선 척사파들이 대항해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다. 고로 대항해시대는 중세와의 단절이 아니었다. 중세의 지속이자 세계적 확산이었다. 복고주의자들이 최첨단이 된 것이다. 그들이 낯선 땅 고아를 '동양의 로마'라고 불렀던 까닭이다.
바스코 다가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야말로 4세기를 이어온 십자군의 적통, '최후의 십자군'임을 자처했다. 고아의 힌두 왕에게 선물한 것도 십자가와 성경이었다. 호의로 그치지 않았다. 개종을 (강)권했다. 기독교 왕국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곳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의 소속이 바로 산티아고 기사단이었다. 1498년 이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전사(前史)가 1498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가 유럽과 조우하며 경험하는 세계사의 전조가 된 것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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