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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철학자와의 대화 "근대와 자본 틀을 폐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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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철학자와의 대화 "근대와 자본 틀을 폐기하라"

[유라시아 견문] 울라마와의 대화 <上>

1. 아라비안 나이트

테헤란에 둥지를 튼 것이 2016년 5월이었다. 그 후 이스탄불과 알렉산드리아로 거처를 옮겼고, 아라비아 반도의 주요 나라와 도시들도 살펴보았다. 아랍어 공부를 시작한지는 1년이 넘었고, 페르시아어도 반 년 이상 배웠다. 나름의 목표도 세웠다. 이슬람 문명의 文史哲(문사철)을 대표하는 책 한 권씩, 아랍어로 읽어내는 것이다. 문학에서는 <천일야화>가 첫 손에 꼽힌다. 역사라면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이 으뜸일 것이다. 철학이라면 역시나 <코란>이 아닐 수 없다. 하루에 30분씩, 하얀 달빛 아래 아랍어 원전을 읽어가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8개월째 펼쳐졌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절반도 이르지 못했다. 완독한 것은 달랑 한 권이다. <천일야화>는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신밧드와 알리바바, 알라딘과 지니 등 익숙한 이야기들이 많다. 야시시한 일화들도 적지 않아 몰입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술은 일절 마시지 못하고, 맵고 짠 음식도 좀체 드문 곳이다. 헬스장이나 요가원을 가도 남녀를 분별하니 운동할 맛이 뚝 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음식으로도 해갈되지 못하고, 시각적으로도 충족되지 않은 욕구 불만을 술탄의 하렘을 상상하며 달래었던 것이다. 반면으로 <역사서설>과 <코란>은 힘겨운 독서였다. 내용도 평이치 않을 뿐더러, 참고해야할 각주도 많아서 속도가 한참 더디었다. 결국 유혹에 기울고 말았다. <역사서설>은 영역본으로, <코란>은 일역본으로 때웠다. 세 권을 원전으로 독파하기에 250일은 턱없이 부족했다고 자위한다. 천 번의 밤을 아라비아에서 지세야 했을 것이다.


더불어 읽어간 책들도 요긴했다. 재발견한 책들이 적지 않다. 먼저 일본의 비교문명학자, 우사메오 다다오가 있다. <문명의 생태사관>이 대표작이다. 꼭 10년 전, 도쿄에서 읽었더랬다. 미니홈피에 독서 기록도 남아 있다. 일본을 구세계와 분리시키고 서구와 연결시키는 탈아론의 연장선이라며 매몰찬 비판을 가했다. 이참에 재독하니 헛다리를 짚었음이 확연하다. 딱 그 시절 수준으로 책을 읽었다. 이제는 더 중요한 입론이 눈에 든다. 구세계를 4개 문명권으로 파악했다. 중국 세계, 인도 세계, 러시아 세계, 그리고 지중해/이슬람 세계이다. 근세에는 청 제국, 무굴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으로 등장했다. 특히 지중해와 이슬람을 하나로 묶어낸 안목이 빼어나다. 한창 지중해를 내해로 삼아 유럽과 아랍을 아우르는 '유라비아'적 시각을 연마하던 와중이었다. 향후 세계사의 전개를 '구세계의 재건'이라고 전망한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명의 생태사관>은 1958년부터 집필하여 1967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다. 냉전기의 한복판, 좌/우라는 얕은 이념 대결에 함몰되지 않고 거시적으로 세계사를 조망했던 문명사학자의 통찰이 빛을 발한다. '국가의 진보사관'을 돌파하여 백 년을 내다본 탁견과 혜안에 연신 감탄하던 이스탄불의 밤이었다.


우사메오 다다오보다 더 앞선 사람도 있다. 20세기 최고의 역사가라고도 불리는 아놀드 토인비이다. 1948년에 <Civilization on Trial>(문명의 시련, 국내에는 '시련에 처한 문명'으로 번역 출간)을 출간한다. 그 중에서도 "이슬람, 서구, 그리고 미래"라는 논문이 돋보인다. 양차 세계대전이 성찰을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이슬람을 높이 평가했다. 인류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이슬람적 가치의 보급이 긴요하다는 것이다. 예견도 보태었다. 서구화된 세계에서 만국의 노동자가 먼저 반기를 들고(프롤레타리아트 혁명)나면, 반(反)서구적 지도권을 요구하는 목소리의 하나로 이슬람이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앞으로도 국가간 전쟁이 계속된다면 칼리프가 재림하여 그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지도 모른다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쫙 돋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IS가 칼리프의 복원을 선포한 것이 2014년이었다. 유럽의 토인비와 아랍의 칼리프, 그 기묘한 조합이 빚어내는 흥분으로 잠을 못 이루던 카이로의 밤이었다.


토인비를 계승한 이로는 어네스트 겔너도 있다. 석박사 시절에 그의 논문을 몇 차례 읽어본 적이 있다. 민족주의 이론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말년에 저술한 책이 <자유의 조건>(1994)이다.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는 전혀 다른 전망을 담고 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즉 포스트-소비에트의 공간이 자유민주주의로 수렴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슬람이 재부상할 것임을 적확하게 예상했다. 서구의 시민사회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이슬람의 '움마'를 제시했던 것이다. 서구의 시민사회와 동구의 소비에트에 견주어 움마의 강점으로 꼽은 것은 성과 속의 튼튼한 결합이다. 사회과학적 정책과 종교적 구제를 동시에 제공하는 개념으로서 움마를 주목하라고 갈파한 것이다. 일생을 민족주의 연구에 천착했던 노학자의 귀결이 이슬람의 움마였다니! 만시지탄을 금치 못했던 알렉산드리아의 밤이다.


아놀드 토인비, 우사메오 다다오, 어네스트 갤너, 이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예견했던 바, 이슬람은 목하 도저하게 (재)부상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서 배제되었던 이슬람이 공적 공간에 재진입하여 주도권을 장악해간다. 지난 백 년 동안 단련되고 숙련된 '개신 이슬람'이 전통적 이슬람을 대체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 밖으로의 파장 또한 여실하다. 알자지라는 이미 CNN에 버금가는 16억 아랍어 공론장의 허브가 되었으며, 이슬람 은행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유럽과 미국까지 역수출되고 있다. 마셜 호지슨의 대작 를 빌려 말하자면, '이슬람의 모험'은 21세기에도 줄기차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새 천 년의 개막과 함께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슬람 세계의 재이슬람화는 이미 '신상태'이자 '뉴노멀'이 되었다.


하여 고대-중세-근대라는 '교조적인 진보 사관'은 미련 없이 버려도 좋겠다. 노예제-봉건제-자본제라는 부연 설명 또한 파기하는 편이 이롭다. 1400년 이슬람 문명사를 파악하는데 한 치도 들어맞지 않는다. 내 나름으로 세운 틀은 이슬람화-탈이슬람화-재이슬람화의 대서사이다. 진보적 아랍 민족주의와 보수적 왕정 국가들로 분열되어갔던 이슬람 세계가 1979년 이란 혁명 이래 재이슬람화로 합류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대국에 합치한다.


물론 나 홀로 궁리하여 세운 입론일 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입문자이자 초심자일 뿐이다. 조력자가 있었다. 묻고 되묻고 거듭 여쭈었던 선생님, 울라마가 계신다. 지금은 두 손으로 헤아려도 모자라는 숫자이다. 그들과의 대화를 녹음한 분량만 사흘을 넘는다. 몽땅 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현명하지도 못할 것이다. 일단 질문의 수준부터 천차만별이다. 처음에는 몹시 조야하고 조잡했다. 시간이 흐르고 공부가 쌓이면서, 꼴과 격을 갖추어 갔다. 내가 곱씹고 되씹어서 소화한 수준으로 재구성하여 전달키로 한다.


표기는 '울라마'로 통일했다. 국적 또한 생략한다. 그 편이 민족과 인종, 국가에 연연하지 않고 이슬람의 진리를 탐구했던 울라마 본연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천일야화에는 한참 모자랐던 250일, 동방객사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기록해둔다.

▲ 다마스쿠스 출신인 하산 이븐 알리. ⓒ이병한

2. 울라마

이병한 : 1979년 이란의 왕정국가를 타파하고 '이슬람 공화정'을 세운 인물이 이슬람 학자 호메이니였습니다.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 군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이도 울라마 출신의 와하비 대통령입니다. 2011년 이집트의 군사독재자 무바라크 정권을 전복시키고 집권한 사람도 무슬림 동포단 출신의 모르시였죠. 중동의 이란,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각 지역의 대국들에서 공히 이슬람학자들이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맞서서 '문명 간 대화'를 촉구하여 2001년을 원년으로 삼았던 이란의 하타미 대통령 역시도 울라마였습니다. 새 천 년 터키의 재이슬람화를 선도하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발화도 정치인의 연설보다는 울라마의 설교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가히 '울라마의 귀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울라마가 어떠한 존재인가, 명료하게 상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부나 목사, 승려 같은 성직자인가 하면, '율법학자'라는 번역어가 있는 것처럼 법조인의 성격도 강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학자이자 교육가이기도 하지요. 울라마는 누구인가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울라마 : 아랍어로 지식/학문을 뜻하는 말이 '이르무'입니다. 학문에 종사하는 이를 '아리무'라고 하고요. 울라마는 아리무의 복수형입니다. 이슬람 학자들을 울라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병한 : 하지만 교수나 지식인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울라마 : 이슬람학의 근거는 <코란>입니다. 더불어 <코란>에 근거해서 나온 이슬람법(샤리아)에 바탕합니다. 즉 울라마는 알라의 사도이자, 샤리아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리아는 알라의 계시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부단한 학문적 노력의 축적입니다. 울라마를 '만 권의 서책을 독파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코란>을 현실 사회에 적용시키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기록으로서 샤리아를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병한 : 테헤란대학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샤리아를 보았는데요. 그 어마어마한 분량에 압도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종의 판례집이라고 할까요. 무려 1400년간 여러 장소에서 발간되었던 판례집을 참조하여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이 울라마라고 하겠습니다.

울라마 : 그래서 이슬람을 성직자가 아니라 법학자가 지탱하는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나 기독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가령 바티칸에는 교황이 있지요. 교황이 임명하는 추기경이 있고, 추기경 아래 사제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에는 그런 계서제형 조직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메카에도 메디나에도, 예루살렘에도 신앙공동체를 조직하고 관리하는 집단이 없습니다. 신앙공동체로서의 종파가 아니라 법해석을 달리하는 학파가 있을 뿐입니다.

이병한 : 칼리프 역시도 알라의 뜻을 대리 수행하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칼리프와 울라마의 관계는 어떠한지요?

울라마 : <코란>에서 이미 울라마를 왕족보다 상위에 두고 있습니다. 울라마는 교사, 재판관, 설교사 등 다양한 전문가 집단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국가의 고위 관료로 편입된 경세가형 울라마도 있고, 마을의 모스크를 관리하며 생계를 해결하는 훈장님형 울라마도 있었죠. 다만 국가를 경영하든, 마을을 다스리든, 알라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겠습니다.


이슬람 사회는 울라마와 칼리프, 움마로 나뉩니다. 칼리프는 '칼을 쥔 사람'입니다. 움마는 일반 신도들입니다. 그 사이에 '붓을 든 사람들', 울라마가 있습니다. 그들이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 사이의 균형자 역할을 합니다. '칼을 쥔 사람'이 전횡을 부리면 움마의 편에 서서 압정을 비판합니다. 반대편으로 힘이 기우는 혼란기에는 다른 쪽으로 힘을 보탬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칼리프는 국가의 지도자이지만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즉 코란을 해석하는 권한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제정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입법권은 울라마에게 귀속되어 있고, 행정권만이 칼리프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만약 칼리프가 이슬람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그를 파면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원칙적으로는 울라마에게 있었습니다.

이병한 : 이슬람판 '역성 혁명'에 가까운 발상이네요. 그 칼리프가 폐지된 것이 1924년입니다. 오스만 제국이 해체됨으로써 '무슬림 공동체=움마' 또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움마 대신에 수많은 '국민국가'들이 들어섰고, 그 국가들의 수장은 대통령이나 총리라고 불리었습니다. 칼리프와 움마가 부재함으로써 울라마의 역할 또한 미미해졌고요. 그 빈자리를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근대적인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대신하게 됩니다. 이른바 '세속화'이죠.

울라마 : 20세기는 '유물론의 세기'였습니다. 세 명을 대표로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가 마르크스요, 둘째가 프로이트이며, 셋째가 니체입니다. 마르스크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판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왜곡된 투영이라고 분석했으며,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며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 이성과 과학에 근거한 이상 국가 소련을 건설한 인물은 레닌과 스탈린이었고요. 신과의 일체의 관계를 끊고 등장한 노동자 국가의 탄생(1917년)은 칼리프의 폐지(1924년)와도 직결되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 사파비드 제국, 무굴 제국의 3대 이슬람 제국의 상당 부분이 소련의 내부 내지는 위성국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그러나 유물론의 실험은 20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실패로 마감합니다. 소련이 와해된 자리에 동방정교와 이슬람, 불교 등이 되살아났습니다. 신의 죽음으로 출발한 20세기가 영성의 귀환으로 막을 내린 것입니다. 따라서 소련의 해체를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만 간주한 것 역시도 단기적이고, 일면적이며, '냉전적인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이성의 독재로부터 영성의 부활로 접근하는 편이 더 합당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전위에 서 있는 것이 이슬람세계이고요. 즉 이슬람의 시각에서 20세기를 회고하면, '세속화의 실험이 실패한 세기'로 정리됩니다.

이병한 : 탈세속화와 재영성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울라마 : 애당초 이슬람에서는 성/속의 분리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바티칸의 교황처럼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 없으니, 종교와 정치를 분화시키자는 세속권력의 요구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스크 역시도 교회와 다릅니다. 신도들을 교인으로 등록시키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중앙 집권은커녕 차라리 아나키즘에 가깝습니다.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도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누구나 무슬림이 되는 것입니다. 특정 교구의 신부나 목사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알라와 직접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스크의 실상 또한 교회보다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주민 센터에 더 가깝습니다. 울라마는 그 마을사람들이 도덕적인 삶, 경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조력자였고요. 그래서 하루에 다섯 차례씩 모스크에서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주중에는 세속의 법률에 따라 살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을 알라의 뜻에 부합하게 사는 것이 무슬림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삶입니다. 성과 속, 영성과 이성, 천상과 지상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분화시킨 정교 분리의 원칙이야말로 근대의 신앙입니다. 잘못된 신앙, 즉 우상 숭배이지요. 유물론의 세기, 20세기가 증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모두 정교 분리를 달성했다는 유럽 열강들이 야기한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냉전 또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섬기는 양대 진영의 다툼이었습니다. 정교 분리를 이루지 못했다는 이슬람 세계에서 20세기의 대참화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이병한 : 하지만 1971년의 동/서 파키스탄 전쟁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은 이슬람 국가간 전쟁이지 않습니까? 1980년부터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역시도 이슬람 국가간 전쟁입니다. 두 전쟁 공히 100만 이상의 희생자를 낳았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무굴 제국 이후의 남아시아를 '대분할 체제', 오스만 제국 이후의 서아시아를 '대분열 체제'라고 표현하는데요. 그 화근이 유럽의 제국주의, 미국의 세계 정책에 있었다는 점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이슬람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울라마 : 동/서 파키스탄 전쟁도, 이란-이라크 전쟁도, '국가간 전쟁'이지 이슬람의 전쟁이 아닙니다. 1970년대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모두 이슬람을 방기한 세속주의 근대국가였습니다. 서파키스탄은 펀자브 문화에 기초하여, 동파키스탄은 벵골 문화에 기반하여 세워진 '국민국가'입니다. 양국이 분단된 것 역시도 양쪽 모두가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민족적 동질성과 언어적 동질성을 따지는 근대국가였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의 이라크 또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바쓰당이 이끄는 근대국가였습니다. 세 개의 이슬람 제국이 60여 개의 국민국가들로 분열된 것이 무슬림이 경험한 20세기의 비극인 것입니다.


다만 두 차례의 전쟁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움마 간의 전쟁, 즉 '이슬람 세계의 내전'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무슬림의 각성을 촉발한 데 있습니다. 더 이상 유럽의 식민주의, 소련과 미국의 신식민주의 탓만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독립 이후에 도리어 서구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말았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는 독립하였으되, 사상적으로는 식민화가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혹자가 '친밀한 적'이라고 했었죠. 그 내재하는 적이 바로 민족주의와 세속주의, 사회주의 등이었습니다. 그러한 근대의 이데올로기들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이슬람의 부흥을 촉구하는 효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이슬람의 견지에서 보자면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부국강병 노선 또한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실체 없는 화폐를, 민족주의는 부질없는 국가를 맹목하는 것이죠. 국가는 고작 100년, 200년 명멸하는 잠정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자본도 국가도 자신의 욕망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 이 세계를 아집의 고해로 만드는 도착을 야기합니다. 유물론, 무신론, 무종교야말로 탐진치(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종합 산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무슬림이 헌신해야 하는 대상은 오로지 영원히 존재하는 신, 알라의 뜻입니다. 부강 또한 응당 무슬림 전체, 움마에 귀속되어야 합니다. 경제적인 풍요도, 강성한 군사도 일국만이 누린다면 이슬람적 공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병한 : '이슬람 세계의 내전'이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저는 국공 내전부터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까지의 30년 동아시아 냉전사를 '탈중화와 재중화의 길항'으로 포착했었는데요. '중화 세계의 내전'이라고 간명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부국강병을 '우상 숭배'에 빗대는 발상 또한 동아시아의 '천하위공(天下爲公)'과 통하는 것 같아서 솔깃합니다. 부국강병의 일국주의와 천하위공의 세계주의가 길항하는 구도로 20세기의 유라시아 전체를 독해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울라마 : 무신론의 세기에 두 개의 물신이 횡행하게 됩니다. 하나가 만물을 화폐로 환산해버리는 맘몬의 자본주의요, 다른 하나가 지상의 신으로 군림하는 리바이어던으로서의 국가이지요. 자본주의가 활개치고 국가주의가 폭주할 수 있었던 근간에 유물론이 자리했던 것입니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두 물신을 동시에 타파해야한다고 주창한 이로는 마르크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분리하지 않고 '정치경제학'을 세운 것이겠죠. 그러나 그는 끝내 영적 해방까지는 사유하지 못했습니다. 자본과 국가의 철폐, 노동의 해방만을 설파했죠. <공산당선언>의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이병한 : 언뜻 에리히 프롬의 현대 사회 진단과도 통하는 말씀 같습니다. 그도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두루 섭렵한 후에 '소유냐, 존재냐'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참 존재의 방식으로 계급투쟁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을 설파하기도 했고요.

울라마 : 역설적인 것은 마르크스가 염원해마지 않았던 노동해방의 국가가 걸프 만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들 산유국들은 오일 머니에 기초해서 완전복지국가를 이루었어요. 도로 건설부터 집안 청소까지 육체노동은 죄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해 줍니다. 국가의 재정이 풍부하니 납세의 의무마저 없어요. 세금도 안 내는데 교육도 무료이고, 의료도 무료입니다. 그래서 이들 국가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을 영위할 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소비 중독이 만연하지요. 두바이와 도하, 아부다비에서 경쟁적으로 세계 최대의 쇼핑몰이 들어서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지만 영성의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이들 산유국에서조차 재차 이슬람이 부흥하고 있는 근본적인 연유라고 하겠습니다. 영성의 충족 없이 인간은 결코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이병한 :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79년 이란 혁명 사이를 '이슬람의 암흑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궁금한 것은 그 60년, 두 세대에 걸친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울라마의 귀환'이 가능했던 기저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울라마를 동아시아에 견주면 유학자나 사대부정도 될 것 같은데요. '선비의 귀환' 같은 현상은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동아시아의 민주화를 추동했던 이들은 여전히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등을 익힌 근대적 지식인이나 청년 학생들이었습니다.

울라마 : 무슬림 동포단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28년 이집트 아스완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마드라사(좀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하는 전통식 학교) 등이 폐지되면서 울라마의 사회적 기반이 허물어지던 때였죠. 기존의 울라마 가운데는 유럽 유학 이후 전향하여 정당을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쓰당이 대표적이죠. 독립 초기까지만 해도 이들이 역사를 주도해갑니다. 이집트와 시리아 등 아랍 민족주의 국가에서는 좌파 근대화론자들이, 걸프만의 왕정국가에서는 우파형 개발독재론자들이 나라를 이끌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아랍이 유럽에 역전당한 까닭을 이슬람의 '후진성'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동일했습니다. 탈식민화의 방편으로 탈이슬람화를 더욱 가속시켰던 것입니다.


반면 무슬림 동포단은 민간 단체에 가까웠습니다. 즉 울라마가 아니라 움마가 주도한 민중적이고 민주화된 이슬람이 부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좌/우파 근대화 세력들에 의해서 배척당했죠. 정권의 잠재적 위협이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덕분에 더더욱 기층 사회로 하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 모스크의 재건, 코란 독서회의 조직, 병원 운영, 고아와 빈곤자 지원, 스포츠 클럽 활동 등 풀뿌리 이슬람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아스완에서의 실험에 성공한 무슬림 동포단은 카이로로 본부를 옮겼고, 순식간에 수백만을 거느리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합니다. 이 조직의 지도자들이 차세대 울라마, 신진 울라마로 성장해간 것이고요.


이 자생적 움마로부터 단련된 울라마들이 정치 권력을 대체해 가는 과정이 '이슬람의 민주화'입니다. 즉 이슬람의 '민주 혁명'은 곧 '움마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트로츠키의 어법을 빌리자면, '계속 혁명'과 '영구 혁명'을 성공시키고 있는 세력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이슬람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이 재차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글로벌 움마를 회복해가고 있는 것이고요.

이병한 : 세계적인 네트워크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울라마 : 무슬림 동포단은 주로 아랍 국가들에 퍼져 있습니다. 더불어 비(非)아랍 국가들의 이슬람 개혁주의 단체들과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죠. 현재 터키의 집권당인 공정발전당의 모체가 되었던 조직도 무슬림 동포단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공정영광당도 마찬가지고요. 말레이시아의 이슬람당과도 인적, 지적 연결망이 촘촘합니다. 풀뿌리 운동이면서 동시에 초국적인 운동입니다. 자연스레 기존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움마의 복원으로 이어지고요.

이병한 : 저는 그간 1979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21세기를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같은 해에 일어났던 이란의 이슬람 혁명도 마찬가지 비중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습니다. 산술적으로 중국인/화교/화인 15억보다 무슬림 16억이 더 많을 뿐더러, 개혁개방이 세계체제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키고 있는 반면에, 이슬람 혁명은 세속적 세계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동력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근본적인 도전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즉 중국의 부상은 영국-미국을 잇는 패권국의 교체라는 점에서 근대세계 체제의 반복일 수가 있지만, 이슬람의 부흥은 자본주의/민족주의/국민국가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심층적인 충격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레 화제를 움마로 옮겨보겠습니다. (계속)


(☞'울라마와의 대화' 다음 편(中) 바로 가기)

▲ 무스캇 출신인 알 사이드.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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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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