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생 : 포스트-오스만 증후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아랍연합공화국의 첫 당사자가 이집트와 시리아였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혁명 직후 나세르가 처음 통합하길 원했던 나라는 수단이었다. 나일강을 공유하는 이웃국가였다. 영국이 그어둔 작위적인 국경선을 지우고자 했다. 그러나 수단이 수긍하지 않았다. 일국으로 홀로서기를 고수했다. 반면 시리아는 달랐다. '역사적 시리아', '대(大) 시리아'의 기억이 선명했다. 프랑스가 주입한 딱딱한 국경이 어색했다. 1947년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토착적인 정치집단이 등장한다. 바로 바쓰당이다.
1947년 4월, 다마스쿠스에서 창당했다. 당의 제1강령부터가 아랍은 불가분의 통일체라는 것이다. 창당 목표 또한 아랍의 단일국가 건설임을 분명히 했다. (소)시리아 건국은 그 초석이었을 뿐이다. 인공적인 국민국가의 틀을 허물고 아랍의 통일국가를 만듦으로써 아랍 문명의 가치와 도덕을 회복코자 한 것이다. 곧장 레바논과 이라크, 요르단 등에도 산하 기구를 설립한다. 즉 바쓰당은 태생부터 일국주의 정당이 아니었다. 모스크바를 북극성으로 삼는 공산당 못지않은 아랍판 국제주의 정당이었다. 본디 바쓰(البعث)란 아랍어로 '再生'(재생)을 뜻한다. 아랍의 대일통을 실현함으로써 포스트-오스만 증후군(서아시아 대분열 체제)에 시달리는 아랍세계의 回生(회생)을 도모한 것이다.
1951년까지 여러 국가들에 바쓰당의 지부를 세워가던 차, 1952년 아랍의 최대 국가 이집트에서 나세르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아랍 민족주의를 먼저 표방한 것은 바쓰당이었지만, 나세르와 같은 카리스마적인 리더는 없었다. 소비에트연방에는 레닌이, 중화인민공화국에는 마오쩌둥이, 유고연방공화국에는 티토가 있었다. 아랍에서는 나세르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영감을 자극하고 촉발시키는 예언자형 정치인에 근사했다. 시리아의 바쓰당도 나세르와 합작키로 결정한다. 1958년 두 나라가 전격적으로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아랍연합공화국의 좌절을 이스라엘(과 미국)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겠다. 당장 시리아부터가 통합 3년 반 만에 이탈해 나갔다. 용두사미에 그쳤던 것이다. 대일통보다는 흡수통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시리아는 이집트와 대등한 대접을 원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원체 규모의 차이가 컸다. 당시 2600만의 이집트에 견주어 시리아는 400만의 소국이었다. 대국 이집트의 제도들이 일방으로 시리아에 이식되었다. 사실상의 병합이었다. '이슬람의 집'을 복원하지 못하고, 근대국가를 확장한 것에 그쳤던 것이다. '대서양부터 아라비아해까지'라는 원대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홍해마저 통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랍의 재통합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1963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바쓰당이 동시에 집권하자 대통합 논의가 재개되었다. 3월 14일, 카이로에서 삼국협상 회의가 열린다. 3년 만에 좌초한 아랍연합공화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훨씬 구체적인 통일 방안이 논의되었다. 나세르의 권위를 인정하되, 이집트로의 수렴이 아닌 통합국가모델을 강구했다. 그렇다면 20세기 후반 아랍세계의 대일통이 실현되지 못한 근본 원인 또한 제 탓보다는 남 탓이 더 컸음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아랍세계를 통합하려는 구심력보다 아랍세계의 분열을 획책하는 외부세력의 원심력이 더 강했다. 이른바 서세동점, 지난 백년의 멍에이다.
2. 아랍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시리아는 프랑스산 인공국가이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를 한 바구니 안에 구겨 넣었다. 북부의 알레포는 투르크 문화가 짙다. 경제망도 아나톨리아와 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남부의 다마스쿠스는 베이루트나 예루살렘과 더 긴밀했다. 이라크 역시 영국산 인공국가이다. 오스만제국의 세 주를 억지로 합친 것이다. 북부의 모술은 터키/시리아와 친근하고, 남부의 바스라는 이란/페르시아 문화권에 가깝다. 그리하여 식민지 시절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무력에 의해서, 탈식민 이후에는 아사드와 후세인의 철권통치가 아니고서는 국가로서의 틀이 유지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병통을 타개하기 위해 제출된 방편이 바로 아랍 민족주의였다. 아랍 민족주의는 아랍주의와는 다르다. 아랍주의는 문화적 개념이다. 아랍세계의 공속감을 뜻한다.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부터 동쪽으로는 아시아의 페르시아만까지 드넓게 펼쳐진 역사-공간이다. 이 소박한 아랍주의에 정치적 의미를 주입시킨 것이 바로 아랍 민족주의이다. 아랍의 대일통을 천명으로 삼는 회심의 정치 프로젝트이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이론가로 사티 알 후스리(ساطع الحصري)를 꼽을 수 있다.
후스리는 무슬림 공동체 움마를 기각했다. 실재하는 것은 민족뿐이라고 했다. 보편종교가 아니라 민족문화에 바탕해서 정치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에 기초해서는 근대국가/국민국가(=전쟁의 집)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응당 '이슬람의 집'을 고수하는 울라마의 수구성도 맹렬하게 질타했다.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신아랍인'을 양성해야 했다.
그 아랍 민족주의의 첫 실험장이 이라크였다. 1920~30년대 후스리는 이라크의 교육부 개혁을 주도한다. 이라크를 '아랍의 프러시아'로 만들고자 했다. 60여 년 전, 독일이라고 하는 신생국가를 창출한 프러시아처럼, 이라크를 아랍통일의 디딤돌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바그다드가 누리는 상징성이 워낙 대단했다. 아바스 왕조의 영광이 서린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중세의 암흑에 갇혀 있던 9~10세기 바그다드는 르네상스가 만개하는 세계도시였다. 동유라시아에 장안이 있다면, 서유라시아에는 바그다드가 있었던 것이다. 장안에서 불교 경전들이 산스크리트에서 한문으로 번역되고 있을 때, 바그다드에서는 그리스 고전들이 희랍어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천 년 전 바그다드의 영광을 환기시키며 아랍의 재기와 중흥을 다짐했던 것이다.
후스리가 주력했던 분야는 언어와 역사였다. 현대표준아랍어를 확립한 인물이 바로 후스리이다. 그의 고투가 있었기에 지금도 20개가 넘는 아랍 국가들이 단일 언어로 소통한다. 아니 전 세계 무슬림이 소통하는 16억 공론장이 후스리로 말미암아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표준어의 정립 다음에는 역사를 새로이 썼다. 과거를 재인식함으로써 미래가 열리는 법이다. 1931년 이라크에서 편찬한 저서가 바로 <아랍민족의 역사>이다. 아랍인들이 세계문명, 인류문명에 미친 공헌과 공로를 강조했다. 군사적, 과학적, 문화적 성취를 한껏 과시했다. 반면 오스만제국은 극히 소략하게 다루었다. 터키공화국으로 떨어져나간 이스탄불도 경원시했다. 아랍세계의 중심축으로 바그다드를 높인 것이다. 언어공정과 역사공정을 마무리 짓고는 정치공정도 개시했다.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국제기구를 설립한 것이 1935년이다. 훗날 아랍연맹(1945)으로 결실을 맺는 모태 조직이었다.
아랍연맹이 공식 출범하자 후스리는 거처를 이집트의 카이로로 옮긴다. 1947년부터 아랍연맹의 문화국을 담당했다. 아랍세계 전체에서 통용될 수 있는 통일교육 마련에 진력했다. 1953년에는 아랍연구소를 발족시켜 소장을 역임한다. 학부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도 했다. 카이로 유학을 마친 유수한 학생들이 모국으로 돌아가서 '아랍 민족주의'에 헌신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1950~60년대 후스리의 저작들은 아랍 세계 도처의 대학에서 필독서로 꼽혔다. 아랍 민족주의의 최전성기를 이끈 '시대의 은사'였던 것이다. 20세기 아랍사상사를 정리한 영미권의 서적에서는 후스리를 '아랍의 피히테'라고 즐겨 묘사한다. 적절한 수사가 아닌 것 같다. 굳이 유럽에 빗대자면 유럽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후스리가 사망한 것은 1968년이다. 나세르가 서거한 것은 1970년이다. 아랍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이론가와 실천가가 연이어 숨을 거두었다.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세계의 정세 또한 급변했다. 영감어린 정치가 사라지고, 실무적인 '국제정치'가 들어섰다. 국제회의 또한 대의를 내세우기보다는, 각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협상장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를 대체하여 일국주의가 대세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걸프만 산유국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석유파동으로 오일머니가 쏟아진 것이다. 아랍 근현대사에서는 1970~80년대의 자본( ثروة, 싸르와)이 1950~60년대의 혁명(الثورة, 싸와라)을 잠식했다고도 표현한다. 걸프만 산유국들은 스스로를 '신아랍'으로 내세우며, 낡은 이념에 집착하는 이집트-시리아-이라크를 '구아랍'으로 강등시켰다. 아랍세계의 대의명분일랑 아랑곳없이 부국강병으로 질주하는 신진국가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나라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상징하듯 세워진 포스트모던 도시들이 바로 두바이, 도하, 아부다비 등이다. 카이로, 바그다드, 다마스쿠스와는 전혀 딴판인 탈역사적인 무국적 도시들이라 하겠다.
곧 구아랍도 신아랍을 따라간다. '아랍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에서도 일국주의가 만개했다. 그 시절을 이끈 독재자들이 바로 무바라크와 아사드, 후세인이다. 아랍세계의 대일통을 방기하고 지방을 할거하는 군벌통치에 흡사했다. 구아랍에서도 일국주의가 승하면서 고투하게 된 것은 팔레스타인이다. 나세르 시절 카이로에서 유학했던 아라파트부터가 더 이상 아랍 민족주의에 기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출범시킨 새 조직이 팔레스타인 민족해방기구(PLO)이다. 아랍세계의 통일과 아랍문명의 복원이 아니라, 팔레스타인만의 민족해방운동으로 전변한 것이다. 아랍연맹조차 립 서비스에 그칠 뿐, 실질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팔레스타인 해방에 열성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랍세계의 외부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이다. 이란(이슬람 공화국), 파키스탄(이슬람 사회주의), 말레이시아(이슬람 경제) 등에서 더 큰 열의를 보인다. 아랍 국가들이 '내정 불간섭'이라는 일국주의 국제정치에 결박되어 있는 반면에, 이슬람을 바탕으로 국가의 꼴을 개조하고 있는 비아랍국가들에서 내/외를 가리지 않던 무슬림 공동체(움마)의 속성을 먼저 회복해가고 있는 것이다. 본디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고 하겠다. 근대적인 개념의 '중동'(Middle East)과 전통적인 이슬람세계의 차이라고도 하겠다.
3. 자할리야 : '무지의 시대'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 이래 아랍문화원을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알자지라>의 사설과 칼럼을 읽는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카이로도 아니고 알렉스에 와서 아랍어 신문을 읽어가는 모습이 신기했었나보다. 원장이 호의를 베풀었다. 기왕 공부하는 김에 정통을 접해보라는 것이다. 몸소 시간을 내어 20세기 아랍 사상사를 함께 읽어간다. 苦盡甘來(고진감래), 신문읽기와는 비교가 안 될 공력을 쏟아야했지만, 그만큼 얻는 바도 크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 대청제국과 오스만제국 이후 아랍민족주의와 중화민족주의의 비교연구 등, 대학으로 돌아가면 논문으로 쓸 만한 소재와 주제를 한껏 얻어간다.
아랍문화원의 풍경 자체도 흥미롭다. 로마박물관 바로 옆에 자리한다. 이곳도 한때 로마제국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지중해세계의 일원이었다. 올해에는 지중해 영화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리기도 했다. 이집트가 지중해세계보다는 아랍세계의 속성이 짙어진 것은 역시나 이슬람의 도래 이후라고 하겠다. 천년의 유산이다. 그런데 비단 아랍세계로만 한정할 수 없음이 핵심이다. 아랍문화원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이슬람세계의 광대함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모로코와 수단 등 북아프리카 출신부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출신까지 구성원들이 다채롭다. 그 중에는 몰디브에서 온 유학생도 있었다. 그간 몰디브는 신혼여행지로만 알던 곳이다. 이슬람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렉산드리아에 와서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가히 인도양은 '이슬람의 바다'라고도 할 수 있었다.
즉 '청년 이집트'의 이집트 민족주의는 '소민족주의'(일국주의)이고, 후스리와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 역시 '대민족주의'(지역주의)일 뿐이다. 양자 모두 이슬람 문명에 바탕한 보편주의에는 이르지 못한다며 이슬람의 귀환을 갈파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출신인 나로서는, 핫산 알 반나의 주장에 더 큰 호감을 느낀다. 후스리의 '아랍 민족주의'를 중국에 빗대어 보자면 '한족 민족주의'에 그친 것이다. 아랍연합공화국이라는 것도 산동성, 광동성, 절강성 등을 통합한 한족통일국가의 수립에 가깝다. 만주족, 몽골족, 장족, 위구르족을 아우르는 '중화민족'의 개념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후스리는 늘상 양복에 넥타이를 매었고, 나세르는 군복을 착용했음에 눈길이 닿는다. 나세르주의도, 바쓰주의도, 아랍 민족주의도 결국은 세속화=근대화를 섬기는 유로파의 한계를 담지했던 것이다. 성과 속을 아울렀던 이슬람세계의 사대부, 울라마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아랍 민족주의조차도 '서구에서 수입된 잘못된 관념'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학자-정치인이 등장한 것은 1979년이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한 바로 그 해에 중동정치의 지각변동이 이란에서 일어난다. 호메이니가 이슬람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무슬림을 분리시켜 서로가 서로를 향해 싸우게 만드는 이이제이의 책략이라고 성토했다. 민족도, 민족주의도 이슬람에서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와 주권, 민족주의, 국가간체제 등을 싸잡아 '무지의 시대'에서 비롯한 적폐라고 비판했다.
이슬람 문명사에서 '무지의 시대'(جاهلية, 자할리야)란 이슬람의 도래 이전을 일컫는다. 즉 서구적 근대(민족주의=신부족주의)가 이식되었던 지난 20세기를 '제2의 자할리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해결책은 이슬람"(알이슬람 후와 알할)임을 설파한다. 새 천년의 출발을 알렸던 9.11 사태(2001)도, 칼리프의 복원을 선언한 IS의 등장(2014)도 1979년 이슬람 혁명의 후폭풍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8월 알자지라에서 아랍세계 9개국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이슬람법(샤리아)이 국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50~70%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과반수 이상이 재이슬람화에 수긍하고 있는 것이다.
4. 1916 : 역성혁명
그렇다면 1916년의 아랍대봉기와 1911년 무창봉기로 시작된 신해혁명 사이에도 흡사한 면이 있었다고 하겠다. 신해혁명 역시 메이지유신과 같은 '부국강병'을 추구한 혁명이 아니었다. 여전히 '천하위공'을 으뜸의 가치로 삼는 역성혁명이었다. 다만 그 방편이 달라졌다고 하겠다. 의회제와 총통제 등 공화정을 수용함으로써 중화문명을 더욱 완미하게 성숙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한족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이 들어섰던 것이다. 아랍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스탄불이 아닐지라도 바그다드나 카이로, 메카로 천도함으로써 이슬람 문명을 지속시키고 재생=역성혁명을 원했던 것이다. 당시 아랍봉기에 가담한 이들은 오늘날처럼 개별국가들로 쪼개져서 '전쟁의 집'을 지속하는 '중동'으로 전락되기를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중동'이라는 20세기형 지정학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이슬람의 집'이라는 문명세계를 회복해가는 대반전의 물꼬 또한 1979년 이란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문명과 공화제를 접합시켜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독특한 고금합작의 정체를 만들어낸다. 이슬람 공화국의 출현으로 기성의 아랍 왕정국가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랍 민족주의보다도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공화정과 왕정,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아니라, 이슬람과 이교도(사이비 이슬람)의 대결로 갈등의 축을 전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호메이니는 서방에 기생하며 이슬람을 일국의 체제 이데올로기로 왜곡시키고 만 '이교도 국가'들에 대해 지하드를 선포했다. 아랍 민족주의의 태양이 저무는가 했더니, 이슬람의 초승달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이란으로 가기로 한다. 1979년의 테헤란부터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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