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프레시안 : 1980년 전두환의 체육관 대통령 취임, 새 헌법 제정, 그리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앞세운 악법 제조까지 살펴봤다. 본격적으로 정권을 운영하기 위해 전두환·신군부는 그것 이외에 어떤 조치를 취했나.
서중석 : 이른바 제5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새 헌법을 만든 전두환·신군부는 이제 정당 만들기에 박차를 가했다. 대선도, 총선도 치러야 하니까 정당 만들기에 돌입한 것이다.
1980년 6월 20일경 전두환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등 5명에게 신당을 만드는 사업의 실무 역할을 맡겼다.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창당 실무자 5인은 곧바로 보안사에서 작업에 착수했다.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데, 보안사가 중심이 돼서 민정당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을 총재로 한 민정당은 1981년 1월 15일 창당 대회를 열었다.
민정당 등 전두환·신군부 권력에 의한 정당 만들기 작업은 한국 정당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한 세계 정당사에서도 희귀한 사례에 들어갈 것이다.
관제 야당까지 뚝딱뚝딱 만든 전두환·신군부
서중석 : 그때 박정희, 김종필은 다른 세력들이 정치 활동을 못하게 한 속에서 중앙정보부를 통해 공화당 조직 작업을 벌였는데 그 기간이 길었다. 그에 비해 민정당 창당 작업은 기간이 짧았다. 그뿐 아니라 전두환·신군부는 뚝딱뚝딱 야당까지 만들어냈다.
야당으로는 민한당과 국민당을 만들었는데, 이 작업에 중앙정보부가 많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당 격인 민한당에는 예전에 야당을 했던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지만 옛날에 야당 했던 사람들이 다 여기 들어간 건 아니다. 그중 상당수는 민정당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왜 제3당으로 국민당까지 만들었느냐. 민한당이 옛 야권 인사로 대부분 구성돼 있었기 때문에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정치 상황이 변화하면 전두환·신군부 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준여당으로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국민당을 만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전두환·신군부는 진보 정당 분위기를 풍기는 정당도 만들게 했다. 고정훈이 민주사회당, 즉 민사당이라고 불린 걸 만든 건 이러한 맥락 속에서 파악된다. 그와 함께 신정당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민사당까지 만들도록 한 것은 노동 계층이 강화되는 속에서 진보적 정치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차단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관제적인 진보 정당을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는, 이른바 심모원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렇게 민한당, 국민당은 물론 관제적인 진보 정당까지 만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각 당의 당수라든가 주요 당직자를 누구누구로 해라', 이렇게까지 정해줬다. 민정당 총재야 당연히 전두환이 하는 것이었고, 아무튼 그런 방식으로 해서 민한당 총재는 유치송, 국민당 총재는 한국화약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김종철이 맡게 된다. 민사당 당수는 고정훈이 맡았다. (유치송은 신익희 비서 출신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경제 부총리를 맡는 유일호의 아버지다. 김종철은 한국화약(오늘날 한화) 창업주 김종희의 형으로, 국민당 총재를 맡기 전 이미 국회의원을 5번(자유당 1번, 공화당 4번) 했다. 국민당에는 주로 박정희 집권기에 공화당이나 유정회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가담했다. '편집자')
정당사에 길이 남을 코미디, 1대대-2중대-3소대
서중석 : 새로 정치인으로 등장한 자들 가운데에는 자기들이 가고 싶은 당으로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모모 인사들의 경우 민정당이 좋아 보인다며 그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전두환·신군부 쪽에서 '너는 거기 가지 말고 이리 가라', 이렇게 하기도 했다. 또 어딘가에 출마하려고 하면 '너는 거기 말고 이쪽으로 출마하는 게 좋겠다',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 조정했다.
그런 속에서 윤길중도 민정당에 가게 된다. 윤길중은 이승만 정권 때 진보당에서 활동하기도 한 사람 아닌가. 예전 활동대로 한다면 윤길중을 민사당 당수로 만들면 제일 좋을 터이고, 내가 윤길중 측근한테 들은 얘기인데 윤길중 본인도 그쪽을 선호했다고 그런다. 그런데 '윤길중 너는 민정당으로 와라', 그래가지고 민정당으로 끌려가서 국회 부의장까지 하게 된다.
이렇게 민정당, 그 뒤를 쫓아간 민한당, 또 그 뒤를 쫓아간 국민당이 만들어졌는데 이건 다 전두환·신군부가 지휘하는 깃발 아래 움직이는 부대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걸 1대대, 2중대, 3소대라고도 불렀고 1중대, 2중대, 3중대라고도 했다. (유치송의 증언에 따르면, 이른바 야당 총재들이 청와대에서 조찬을 할 때 "야당 총재와"라는 말이 나오자 전두환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1·2·3당이지요." 1대대, 2중대, 3소대라는 세간의 이야기가 조금도 과장된 게 아님을 보여주는 풍경 중 하나다. '편집자')
참, 이런 기가 막힌 정당사를 우리나라가 갖게 됐다. 그런데 이런 정당들을 만든 자들, 아까 누구누구라고 얘기했는데,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주요 당직자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슴지 않고 거기에 들어가서 활동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 10대일 때 수업 시간에 우당(友黨)에 대해 교육을 받은 일이 생각난다. 교육 내용은 북한 같은 공산 독재 국가는 공산당 이외에 우호 정당, 즉 우당이라는 걸 두어서 다당제 형식을 취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다당제도, 민주주의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두환·신군부가 진행한 정당 만들기 작업이 딱 그 꼴이다. 당시 관제 야당 만들기에 관여한 중앙정보부의 한 관계자가 "야당이라기보다는 우당이 필요했다"(<남산의 부장들>)고 말한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서중석 : 한 가지 덧붙이면, 자료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투 허'(허화평, 허삼수)는 정당을 만드는 작업에서 직접적으로 역할을 맡지는 않은 것으로 돼 있다. 그래서 권정달이 이종찬 등과 함께 실무 작업을 한 것이다. 물론 보안사, 중앙정보부 쪽에서 실무를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윗선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하고 또 이 시기에 '투 허'를 배제한 상태에서 중요한 일이 진행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정당을 만드는 일에 '투 허'가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돼 있는 부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 이도성이 재미있게 써놓았더라. '투 허'는 정당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별로 안 했다는 것이다. 난 이 사람들한테는 정통 파시스트적인 면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도 '아, 우리가 권력을 쥐고 있으면 되지 정당이 무슨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 일은 권력으로 처리하면 되는 것이고 정당이라는 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면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허수아비 정당이라고 하더라도 현실 정치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고, 시간이 갈수록 중요성을 더하기 마련이다. '투 허'는 그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당을 중요시하지 않은 것 아닌가, 난 그렇게 본다.
(실무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허화평과 허삼수가 창당 주도 세력 중 하나였고, 전두환·신군부 내 다른 그룹에서 자신들을 배제한 채 창당 작업을 추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또한 허화평이 수시로 메모를 통해 창당 관련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당의 역할을 중시하지 않았어도 자신들이 전두환·신군부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취할 수 있었던 조치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정당 문제와 관련해, 훗날 전두환이 체포돼 12·12쿠데타와 광주항쟁 관련 재판을 받을 때 전두환 측 변호인이던 이양우 변호사가 피고인 전두환을 상대로 한 반대 신문 중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1996년 법정에서 이양우와 전두환 사이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오간다(이양우 물음, 전두환 답변). "피고인이 창당한 민정당은 1990년 1월 22일 (통일)민주당 및 신민주공화당과 구국의 영단으로 3당 합당을 해 민자당이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결국 오늘의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피고인이 창당한 민정당이 모체인 것이지요?"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정당이 내란 과정에서 창당된 불법 정당이라면 신한국당도 하자가 있는 정당이지 않습니까?" "족보를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신한국당 너희들, 그래 봤자 내가 만든 정당의 후예이니 날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는 전두환 쪽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전두환은 2년 만에 수감 생활을 마감하고 사면됐고, 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신한국당 세력은 여전히 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편집자')
레이건, 김대중 감형한 전두환을 취임 후 첫 손님으로 환대
프레시안 : 민정당부터 일련의 관제 야당들에 이르기까지 그에 관한 최종 지시는 전두환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1대대, 2중대, 3소대라는 희대의 코미디를 제작한 총감독은 청와대였던 셈이다. 이제 대통령 선거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대통령 선거라는 희극을 보려면 먼저 김대중 문제가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에 얘기한 대로 항소심(1980년 11월 3일)에서도 김대중은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그 직후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이 당선됐다. 그것에 이어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는 상고 기각 판결이 나왔다. 사형 확정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자서전을 보면 "뜻밖에도 그날 오후 나는 무기 징역으로 감형됐다", 이렇게 돼 있다. "뜻밖에도"라는 표현을 썼다. 무기 징역으로 감형된 것에 대해서 여러 책에서는 레이건 정부, 그중에서도 특히 리처드 앨런 국가 안보 보좌관이 많은 노력을 한 걸 얘기하고 있고 김대중 자서전에서는 이 사람과 함께 빌리 브란트 등 세계 각국의 저명한 정치인들도 노력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당시 레이건 정부가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데 있어 그냥 지지할 수는 없었다고 본다. 그래서 큰일 하나를 하고 전두환을 지지하는 형식을 취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구체적으로 앨런 보좌관이 누구를 만났는지 등은 기록에 다 나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틀에서 그런 게 있었다고 난 본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김대중을 정말 죽일 수가 있었느냐, 이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너무 말도 안 되는 걸 조작해내서 김대중을 죽이려 한 것 아니었나. 더군다나 김대중이 일본에서 한 활동을 억지로 조작해서 국가보안법 적용자로 만들어 사형을 선고한 건데, 그건 사실 일본 정부와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점들을 놓고 볼 때 사형 선고는 위협 수단이 아니었느냐, 이런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 본인으로서는 워낙 위협을 강하게 받지 않았나.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점들 때문에도 대법원 판결이 난 날 오후에 감형 조치가 나오자 "뜻밖에도"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감형은 일련의 조치들과 다 연결돼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것들과 연결돼 있었나.
서중석 : 대법원 판결이 있기 이틀 전인 1981년 1월 21일(워싱턴 현지 시각),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된 다음 날인 이날 백악관에서 전두환이 미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니까 전두환은 레이건 대통령 취임 직후 첫 번째 손님으로 미국에 가는 것에 대한 선물로, 이틀 후인 대법원 판결 직후 김대중 감형 조치로 대답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었다. 전두환은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미국을 방문했다. 2월 2일에는 레이건과 회담했는데, 갓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의 첫 번째 큰 손님으로 대접을 받았다.
이건 누가 봐도 미국이 얼마나 강하게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느냐 하는 걸 잘 보여준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두환·신군부 비판 세력들은 이제 미국에 대한 비판을 그전보다 더 강하게 하게 된다. 사실 광주항쟁 이전에는 미국이 어떤 짓을 했는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광주항쟁 때 미국이 취한 태도, 그 후 전두환이 '통대' 대통령이 될 때 미국이 보인 지지,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의 발언 등을 접하면서 미국에 대해 이전과는 점차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들에 이어서 전두환이 레이건 대통령 취임 후 외국의 국가 원수로서는 첫 번째로 백악관을 방문한 것이다. 이건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전두환에 대한 전적인 지지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속에서 김대중이 감형된 것이다.
돌아보면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아주 중요한 시기에 미국을 방문했다. 이승만은 나중에 사사오입 개헌(1954년)으로 알려진,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없애고 영구 집권을 가능케 한 개헌을 하기 직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박정희는 영구 집권의 발판이 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3선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 직전인 1969년 8월 20일에 방미했다. 전두환도 그와 비슷한 수순을 밟은 것이다. 그렇게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전두환은 이듬해(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1당에게 유리한 선거 제도에 힘입어 여유 있게 과반 차지한 민정당
프레시안 : 대선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5277명의 선거인단 중 6명이 빠진 5271명이 투표했다. 여기서 전두환은 4755표, 민한당 대표 유치송은 404표, 김종철은 3소대라 그런지 표가 훨씬 적어서 85표를 얻었고 나머지는 군소 정당 후보에게 갔다.
'제1야당 당수에게 몇 표를 찍어라', 모처에서 이런 식으로까지 만들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런 뭐가 있는 것처럼 전두환 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고 유치송, 김종철이 그 뒤를 잇는 식으로 결과가 나왔다. 아주 코믹한 모습이었다. 그런 식으로 여러 명이 후보로 나서게 해서 '박정희 때와는 다르다'는 인상을 풍기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압도적으로 표를 많이 얻은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에 당선돼서 3월 3일 미국과 일본의 강력한 지지 속에 취임식을 열게 된다. 그러면서 제5공화국으로 얘기되는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3월 25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에서 민정당은 35.6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92개 지역구에서 90명이 당선됐다. 민한당은 21.6퍼센트의 득표율로 지역구에서 57명이 당선됐다. 국민당은 득표율 13.3퍼센트로 지역구 18석을 확보했다. 나머지는 민권당, 민사당, 신정당이 각각 2명씩 당선되는 등 군소 정당 및 무소속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민정당은 35.6퍼센트밖에 득표를 못했지만 전체 의석은 151석으로 여유 있게 과반을 확보했다. 제1당이 전국구 92석의 3분의 2인 61석을 차지하게 돼 있었기 때문에 지역구 90석과 합쳐 151석이 된 것이다. 전국구를 합치면 민한당은 총 81석, 국민당은 총 25석이었다.
프레시안 : 그 후 김대중은 한국을 떠나게 되지 않나.
서중석 : 1982년 12월 10일 안기부 간부가 찾아와서 김대중한테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12월 16일 김대중은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김대중은 출국 과정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82년 12월) 23일이 출국일로 정해졌다. 23일 서울대병원 병실에서 나와서 구급차에 실려 김포공항으로 갔다. 대한항공 티켓을 구입했는데 (정작 타게 된 건) 노스웨스트항공이었다. 그 자리에서 청주교도소 부소장이", 서울대병원 이송 전 여기에 있었는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형 집행 정지로 석방한다는 걸 통지한 것이다. 그러면서 여권, 비행기 표를 줬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이렇게 조국을 떠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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