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2월 24일 2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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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8>
관직명 익히며 쉬어 갑시다
이제까지 조선의 건국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왔으니, 여기서 잠시 쉬어 갈까요? 다른 게 아니라, 이 연재를 보면서 관직 명칭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계신 듯해서 그 부분을 좀 설명하고 넘어가려 합니다.똑같은 의문을 가지셨던 분들은 바로 감이 오실 겁니다. 아닌게
이재황 실록연구가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7>
새 왕조를 열던 날
드디어 고려 왕조 5백 년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공양왕 4년(1392) 7월 12일에 공양왕은 이성계의 집에 가 술자리를 베풀고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행차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 배극렴 등이 왕대비에게 가서 아뢰었습니다.“지금 임금이 어두워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6>
“이성계를 추대하라”
조영무가 돌아와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죽인 사실을 말했고, 이방원은 들어가 이성계에게 알렸습니다. 이성계는 화를 벌컥 내며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이방원에게 말했습니다.“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멋대로 대신을 죽였구나! 나라 사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5>
정몽주, 이렇게 죽다
앞서 정몽주는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져 온 나라의 민심이 모두 그리로 쏠리는 것이 싫었는데,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 틈에 그를 제거하려고 대간(臺諫)을 사주했습니다. 먼저 그의 날개인 조준 등을 잘라낸 뒤에 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이성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4>
겉으론 후대, 속으론 경계
겉으론 후대, 속으론 경계이성계가 정도전, 남은(南誾), 조인옥 등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대들과 함께 왕실을 위해 힘을 다했는데도 헐뜯는 말이 자주 일어나 우리가 배겨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동북면으로 돌아가 피해야겠다. 먼저 집안 사람들에게 빨리 짐을 꾸리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3>
윤이 · 이초 사건으로 물러나다
□ 이야기 13공양왕 2년(1390) 5월,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순안군(順安君) 왕방(王昉)과 밀직사 동지사인 조반(趙胖) 등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져온 소식이 고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중국 예부(禮部)가 이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파평군(坡平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2>
가짜들 쫓겨나다
□ 공민왕이 죽은 뒤 중국 황제가 집정 대신을 부를 때마다 모두 두려워 감히 가지 못했는데, 이때에 문하부 시중 이색은 창왕이 중국에 직접 조회하는 문제와 왕의 즉위를 승인받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스스로 중국에 가겠다고 청했습니다. 창왕은 이색과 밀직사 첨서(僉書)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1>
최영의 최후 “잘 가시오”
□ 우왕은 도망쳐 돌아와 도성의 화원(花園)으로 들어갔습니다. 최영은 맞서 싸우려고 백관에게 무기를 가지고 곁에서 호위하도록 지시하고 수레를 모아 거리 입구를 막았습니다.6월 1일, 이성계는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주둔한 채 유만수를 보내 숭인문으로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0>
이성계,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리다
우왕은 사람을 보내 장수들에게 금 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려주었습니다. 5월에 대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는데, 도망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우왕은 그 자리에서 목베라고 명했으나, 도망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좌,우군 도통사가 보고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9>
요동 정벌-우왕과 최영의 계략
당시에는 이인임(李仁任)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시중(侍中) 자리에 앉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정부 격인 문하부의 맨 윗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바로 그 다음 자리인 찬성사에는 도길부(都吉敷)를 앉혔으며 재정을 담당한 삼사(三司)의 윗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