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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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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7>

새 왕조를 열던 날

드디어 고려 왕조 5백 년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공양왕 4년(1392) 7월 12일에 공양왕은 이성계의 집에 가 술자리를 베풀고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행차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 배극렴 등이 왕대비에게 가서 아뢰었습니다.

“지금 임금이 어두워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사직과 백성의 군주가 될 수 없으니, 청컨대 폐하소서.”

왕대비는 마침내 공양왕을 폐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남은이 문하부 평리 정희계(鄭熙啓)와 함께 교지를 가지고 당시 임금이 거처하던 북천동(北泉洞) 궁(宮)에 가 교지를 선포했습니다.

공양왕은 엎드려 명령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나를 억지로 임금으로 세웠다. 내가 똑똑치 못하고 일이 돌아가는 바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는가?”

그러면서 몇 줄기 눈물을 흘리고는 원주(原州)로 갔습니다. 백관이 옥새를 받들어 왕대비 궁전에 두고 모든 업무를 그곳에 나아가 처리했습니다. 왕대비는 13일에 교지를 내려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습니다.

16일에 배극렴, 조준이 신하들과 함께 국새(國璽)를 받들고 이성계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골목을 꽉 메웠습니다. 신하들 가운데 대사헌 민개(閔開)는 얼굴을 찡그리고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남은이 그를 쳐 죽이려 했으나, 이방원이 의인(義人)을 죽일 수 없다고 극구 말렸다고 합니다.

이날 마침 여러 친척 여자들이 이성계와 강씨를 찾아와 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국새가 들이닥치자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며 북문으로 해서 흩어져버렸습니다.

이성계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안뜰로 들어와 국새를 대청 위에 놓았습니다. 이성계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남에게 의지해 겨우 침실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백관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배극렴 등이 합동으로 글을 올려 왕위에 오르도록 권했습니다. 이성계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예로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이니 어찌 감당하겠소?”

그러고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은 둘러싸고 물러가지 않으며 더욱 간절히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습니다. 이날 이성계는 결국 수창궁으로 갔고, 백관이 궁궐 문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했습니다.

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임금 자리는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성계는 6조(六曹)의 판서 이상을 전각 위에 오르도록 지시하고 일렀습니다.

“내가 수상(首相)일 때도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우려했는데, 어찌 오늘날 이런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몸만 건강했다면 필마(匹馬)를 타고라도 피해갈 수 있었겠는데,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어 여기에 이르고 말았다. 경들은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내 부족한 덕을 보좌하라.”

그러고는 중앙과 지방 각급 신하들에게 그대로 일을 보도록 명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성계는 이튿날인 7월 17일 수창궁(壽昌宮)에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의 첫 임금 태조(太祖)입니다.

새 왕조가 섰으니 이를 합리화하는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임금 자리에 오르는 것은 천명(天命)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니, 그런 천명의 증거로 여겨지는 일들이 제기되고 때로는 만들어지기까지 합니다. 조선의 건국에도 그런 설화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중 경복흥(慶復興)은 깨끗하기는 하나 이미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은 곧기는 하나 조금 고지식하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을 사람은 공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 밖에 와 지리산 바위 속에서 얻었다는 이상한 책을 바쳤습니다. 그 책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 땅을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과 비의(非衣), 주초(走肖), 삼전삼읍(三奠三邑) 등의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글자들은 모두 파자(破字)라고 하는, 한문 글자를 쪼개 놓은 것들입니다. 목자(木子)는 이(李)의 파자로 이성계를 의미하고(돼지는 이성계의 띠), 비의(非衣)는 배(裴), 주초(走肖)는 조(趙), 전읍(奠邑)은 정(鄭)의 파자로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시켜 책을 가져온 사람을 찾았으나 이미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고려의 서운관에 간직한 비기(秘記)에 ‘건목득자(建木得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목자(木子)가 들어 있고, “왕씨가 멸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고려 말에 이르도록 숨겨 알려지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조명(早明)’이란 말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뜻을 깨닫지 못하다가 뒤에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한 뒤에야 ‘조명’이 곧 ‘조선’을 이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북면 의주(宜州)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개국하기 1 년 전에 다시 가지가 나고 무성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고 했습니다.

또 이성계가 전에 시중 경복흥의 집에 갔는데, 경복흥이 맞아들이고 그 아내로 하여금 나와 보게 하면서 지극한 예의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그 자손을 부탁하고 늘 그를 특별 대우했습니다. 이성계가 혹시 밖으로 정벌을 나갈 때면 경복흥은 꼭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 사직이 장차 그대 손안에 들어갈 것이니, 어려움을 꺼리지 말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공을 이루도록 하시오.”

일찍이 역술가 혜징(惠澄)이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사람들의 운명을 많이 보았으나 이성계만한 사람은 없었소.”
“타고난 운명이 제아무리 좋아도 벼슬이 재상에 이르면 끝이 아니오?”
“재상이라면 말할 필요가 어디 있소? 내가 본 것은 임금의 운명이오. 그가 왕씨를 대신해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3 군(軍)이 한양(漢陽) 땅에서 사냥하는데,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이방원이 함께 갔습니다. 노루 한 마리가 나오자 이방원이 달려가 쏘아 화살 한 개에 죽였습니다. 왕씨 종친 10여 명이 마침 높은 언덕에 모여 서서 이를 보고는 몹시 놀라서 서로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씨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아닐까?”

또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도 시중 이인임을 집으로 찾아갔는데, 나가고 난 뒤에 이인임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라가 장차는 틀림없이 이씨에게 돌아갈 것이다.”

실록은 이런 이적(異蹟) 시리즈를 ‘가뭄의 단비’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즉위 이튿날인 18일에 비가 내렸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는데, 이에 앞서 오랫동안 가물다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억수같이 비가 내려 사람들이 진심으로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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