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은 도망쳐 돌아와 도성의 화원(花園)으로 들어갔습니다. 최영은 맞서 싸우려고 백관에게 무기를 가지고 곁에서 호위하도록 지시하고 수레를 모아 거리 입구를 막았습니다.
6월 1일, 이성계는 숭인문(崇仁門) 밖 산대암(山臺巖)에 주둔한 채 유만수를 보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조민수의 좌군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갔으나 최영이 맞아 싸워서 모두 물리쳤습니다. 이성계는 유만수를 보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틀림없이 패해 달아날 것이다.”
과연 그 말대로였습니다. 이때 이성계는 들에 말을 놓아 먹이고 있었는데, 유만수가 도망쳐 돌아오자 주위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이성계는 대답도 않고 장막 안에 계속 누워 있었습니다. 좌우의 사람들이 두 번 세 번 아뢰니, 그제서야 천천히 일어나 음식을 들고 말에 안장을 얹고 군사를 정돈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출발하면서 또 사기 진작 행사를 가졌습니다. 1백여 보 밖의 키 작은 소나무를 활로 쏘아 승패를 점치는 것이었습니다. 화살 한 개에 소나무 줄기가 바로 끊어지자 군사들이 모두 축하했으며, 한 부하 장수가 꿇어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영공을 모시고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이성계는 숭인문으로 입성해 좌군과 협격(挾擊)하면서 진군했습니다. 도성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와 군사들을 맞으며 위로하고 수레를 끌어내 길을 뚫었습니다. 노약자들은 산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 기뻐 고함을 지르며 펄펄 뛰었습니다.
조민수는 검은색의 큰 기, 이성계는 노란색의 큰 기였습니다. 검은 기는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했습니다. 조금 뒤에 노란 기가 선죽교(善竹橋)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최영의 휘하 장수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차지하고 있다가 노란 기를 바라보고는 도망쳤습니다.
이성계는 마침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소라를 한 번 불었습니다. 이때 행군하던 여러 부대가 모두 뿔나팔(角)을 불었으나 유독 이성계의 군대만이 소라를 불었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은 소라 소리를 듣고 모두 이성계의 군사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군사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에워쌌습니다. 우왕은 영비(靈妃) 및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습니다. 곽충보(郭忠輔) 등 서너 사람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냈습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했습니다. 최영은 임금에게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습니다. 이성계가 최영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내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의(大義)에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해 원망이 하늘에 뻗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서로 마주보면서 울고는 최영을 고봉현(高峰縣)으로 귀양보냈습니다. 시중 이인임이 일찍이 이성계를 가리켜 나랏님이 될 것이라고 말해 최영이 듣고 매우 화가 났으나 감히 말하지는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옳았다고 탄식했습니다.
두 도통사와 36 명의 대장들이 대궐에 나가 신고했습니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은 도성에 있는 원로 재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만났으며, 이성계는 이색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문 밖으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우왕은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삼고, 이성계를 우시중으로 삼았습니다.
전교시(典校寺) 부령(副令)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해 이성계를 만나서는 ‘곽광전(霍光傳)’을 바쳤습니다. 곽광은 한(漢)나라 때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람이니, 이는 말하자면 우왕을 폐위하자는 주장인 셈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조인옥(趙仁沃)에게 읽으라 해서 들었는데, 조인옥이 다시 왕(王)씨를 왕으로 세우자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우왕은 밤에 내시 80여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이성계 및 조민수 변안열의 집으로 달려가 잡으려 했으나, 이들이 모두 성문 밖 진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허탕을 치고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시도에서 실패한 우왕은 결국 쫓겨나 강화로 가고, 군부는 우왕의 아들 창(昌)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실록은 이 과정에서 이성계가 왕씨의 후손을 골라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조민수가 우왕의 장인 이임(李琳)과 인척 관계여서 우왕의 아들을 고집했고, 이색에게 물은 뒤 의논을 정해 창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왕,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손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중에 창왕도 왕씨가 아닌 가짜 임금이라고 쫓겨나기 때문에, 이성계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겠지요.
이때 이성계의 본처 한씨는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 농장에 있고 강(康)씨는 포천 철현(鐵峴) 농장에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나중의 태종―은 전리사(典理司) 정랑(正郞)으로 서울에 있으면서 변고가 터졌다는 말을 듣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곧 말을 달려 포천으로 갔습니다.
일 보는 종들이 벌써 다 흩어져 도망쳐버리고 없었습니다. 이방원은 한씨와 강씨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방원은 말을 탈 때나 내릴 때나 모두 직접 부축하고, 스스로 허리춤에 익힌 음식을 차고 가며 봉양했습니다. 강씨의 두 딸과 두 아들도 모두 나이 어렸으나 함께 따라갔습니다. 이방원은 직접 안아서 말에 태우기도 하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직접 말을 끌기도 했습니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양식이 모자라 길가의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철원(鐵原) 관문을 지나다가 관리들이 잡으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밤중에 몰래 떠났습니다. 감히 남의 집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들판에 유숙했습니다.
이천(伊川)에 있는 한충의 집에 이르러 가까운 마을의 장정 1백여 명을 모아 담당을 나누고 부대를 편성해 변고에 대비하면서 말했습니다.
“최영은 일에 밝지 못한 사람이니 틀림없이 나를 뒤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오더라도 두렵지 않다.”
이방원은 이레 동안을 거기서 머물다가 일이 안정됐음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앞서 최영은 영을 내려 정벌에 나간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고자 했으나, 곧 일이 급박해져 그러지 못했습니다.
창왕은 이성계를 동북면 삭방강릉도 도통사(都統使)로 삼고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의 칭호를 내렸습니다. 이성계는 병으로 사직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창왕은 또 이성계의 공을 칭송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창왕은 8월에 이성계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로 삼았으며, 10월에는 상서사(尙瑞司) 판사를 겸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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