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죽은 뒤 중국 황제가 집정 대신을 부를 때마다 모두 두려워 감히 가지 못했는데, 이때에 문하부 시중 이색은 창왕이 중국에 직접 조회하는 문제와 왕의 즉위를 승인받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스스로 중국에 가겠다고 청했습니다.
창왕은 이색과 밀직사 첨서(僉書) 이숭인(李崇仁)을 중국에 보내 새해 하례를 드리면서 이를 추진하도록 했습니다. 이성계는 이색을 칭찬했습니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구나!”
이색은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고가 있을까봐 이성계의 아들 하나를 데리고 가려 했습니다. 이성계는 이방원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데려가게 했습니다.
중국에 가는 길에 여관에서 중국 관리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색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나라 최영이 정예 군사 10만을 거느렸으나 이성계는 그를 파리 잡듯 손쉽게 잡았으니, 당신 나라의 백성이 이성계의 한없는 덕을 무엇으로 갚겠소?”
중국에 이르니, 평소부터 이색의 명망을 듣고 있었던 황제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원나라에 벼슬해 한림(翰林)으로 있었으니 응당 중국말을 알겠구나.”
이색은 곧 중국말로 대답했습니다.
“왕이 직접 조회하기를 청합니다.”
황제가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얘기냐고 물으니 예부(禮部) 관원이 이 말을 전해 아뢰었습니다. 이색이 오랫동안 입조하지 않아 말이 잘 통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네 중국말은 변방의 납합출하고 똑같구나.”
돌아오는 길에 발해(渤海)에서 객선(客船) 두 척과 동행했습니다. 반양산(半洋山)에 이르렀을 때 회오리바람이 크게 불어 객선 두 척이 모두 침몰했습니다. 이방원이 탄 배도 거의 침몰 직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당황해 허둥거렸으나, 이방원은 태연자약했고 결국 온전히 돌아왔습니다.
이색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이 황제는 마음속에 주관이 없는 임금이다. 내 생각에 황제가 틀림없이 물을 것이라 여겼던 일은 묻지 않았고, 황제가 묻는 것은 모두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실록은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비웃었다고 전합니다.
“큰 성인(聖人)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파악하고 논할 수 있는가?”
이때에 토지 제도가 크게 허물어졌습니다. 남의 땅을 빼앗아 어떤 집안은 땅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들로 이어졌습니다. 매서운 고통이 날로 심해져 백성들이 서로 원망했습니다. 창왕 원년(1389), 이성계는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과 더불어 사전(私田) 혁파를 주장해 관철시켰습니다.
앞서 종친인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 왜적에게 사로잡혀 갔다가 몇십 년이 지난 뒤에 돌아왔습니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습니다. 이숭인은 왕환이 가짜임을 밝히려다가 무고죄에 걸려 도망쳤습니다.
옥졸(獄卒)이 그 아들 이차약(李次若)을 뒷결박하고는 아버지를 찾아내라며 등을 후려쳐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이현(梨峴)을 지나다가 마침 이성계를 만나자 옥졸은 이차약을 길가 집에 숨겼습니다. 이차약이 큰 소리로 구원을 청하자 이성계가 놀라서 불러 묻고는 옥졸에게 말했습니다.
“어찌 아들을 추궁해 아버지를 찾는단 말인가?”
곧 풀어주라 명령하고 수행원 한 사람을 시켜 이차약을 집으로 돌려보내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시중 이임과 함께 임금에게 아뢰었습니다.
“즉위 초에 마땅히 너그럽고 어진 정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숭인 등을 용서하소서. 또 이숭인이 서연(書筵)에서 강론을 모셔 오래 임금을 가르쳤으니, 업무를 보게 하소서.”
그제서야 이숭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창왕은 이성계에게 지시해 칼을 차고 신을 신고 탑전에 올라올 것과 알현 예를 올리면서 이름을 말하지 않도록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은 50 냥과 채색비단 10 필, 말 1 필을 내리고, 교지를 내려 권장하고 타일렀습니다.
이해 11월, 김저(金佇)가 황려부(黃驪府, 여주)에서 몰래 우왕을 만나니 우왕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평소 곽충보와 사이가 좋으니, 네가 가서 일을 꾸미라. 이성계를 없애면 내 뜻을 이룰 수 있다.”
김저가 와서 곽충보에게 알렸습니다. 곽충보는 거짓으로 응낙하고는 이성계에게 달려와 알렸습니다. 김저와 정득후(鄭得厚)를 체포하도록 했는데, 정득후는 김저와 같이 모의하고 밤에 몰래 이성계의 집에 갔다가 붙잡히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김저는 순군부(巡軍府) 옥에 가두었습니다. 진술에 변안열 등의 이름이 오르자 대간(臺諫, 사헌부와 문하부 낭사)이 변안열을 목베라고 청했습니다. 이성계는 힘껏 구하려 했으나 창왕이 듣지 않았습니다.
앞서 왕의 직접 조회를 청하러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윤승순(尹承順) 등이 돌아와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으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낸 공문을 전했습니다. 다른 성씨를 왕씨의 후계로 삼았음을 문책해 직접 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이성계는 삼사 판사 심덕부, 찬성사 지용기(池湧奇)ㆍ정몽주(鄭夢周), 정당문학 설장수(偰長壽), 평리 성석린(成石璘), 문하부 지사 조준(趙浚), 자덕부(慈德府) 판사 박위(朴葳), 밀직사 부사 정도전(鄭道傳) 등과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군사를 배치해 놓고 의논했습니다.
“신우 신창은 본디 왕씨가 아니니 제사를 받들게 할 수가 없다. 더욱이 중국 황제의 명령까지 있으니, 가짜 임금을 폐하고 진짜 임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는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가장 가까운 왕족이니, 그를 세워야 할 것이다.”
우왕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서 왕으로 인정치 않고 신우 신창으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공민왕의 정비(定妃) 궁으로 몰려갔습니다. 우왕을 강릉(江陵)에 옮기고 창왕은 강화에 내쫓아 서민으로 만들며 왕요를 맞아 왕으로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恭讓王)입니다.
공양왕은 심덕부를 시중으로, 이성계를 그 밑의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습니다. 실록은 당초 이성계를 시중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성계가 사양해 이렇게 조정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2월, 사재시(司宰寺) 부령(副令) 윤회종(尹會宗)이 글을 올려 우왕 창왕을 목베도록 청했습니다. 실록은 이 부분에서도 이성계의 ‘알리바이’를 마련합니다. 공양왕이 여러 재상들에게 일일이 물었으나 모두 잠잠했는데, 이성계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미 강릉에 안치했다고 중국에 보고했으니 중간에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신들이 있는데 신우가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 해도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공양왕은 우왕이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으니 자신도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공양왕은 이성계를 포상하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공양왕은 또 아홉 공신에게 녹권(錄券, 공신증)을 내렸습니다.
이성계는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으로 삼고, 화령군(和寧郡) 개국충의백(開國忠義伯)의 작위를 주었습니다. 식읍(食邑) 1000 호(戶)에 땅 200 결(結), 노비 20명을 내렸습니다. 그 녹권은 개국공신 배현경(裴玄慶)의 예에 따라 중흥공신(中興功臣)이라 일컫고 포상 내용을 적었습니다. 가족에게 작위와 벼슬을 주고, 자손은 영구히 죄를 용서하며, 하인들도 정해진 숫자만큼 등용한다는 내용입니다.
공양왕 2년(1390) 1월, 임금이 경연 관원을 두면서 이를 총괄하는 경연 영사로 이성계를 임명했습니다. 또 8도의 병마를 거느리게 하고, 군영을 설치해 교대로 지키게 했으며, 군비(軍費)로 월급을 주게 했습니다.
3월에 이성계가 병으로 사직했습니다. 공양왕은 4월에 대궐 내시를 보내 문병하고 억지로 나오게 했습니다.
아홉 공신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칭찬했습니다. 대궐 말 1 필, 백금 50 냥, 비단과 명주 각 5 단(端), 금띠 한 개를 내리고는 내전(內殿)에서 위로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또 회군의 공을 적어 교지를 내리고 표창했으며, 토지 1백 결을 내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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