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0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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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엄친아'가 '돈'을 걱정한 이유?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대제학이 걸었던 길①
☞연재 지난 기사 바로 가기 :트위터 시인? 16세기 조선에선 '일기=시'였다!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①효종은 즉위 초반 나라를 바로잡고 부강하게 하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다소 편협한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조정에서는 외척이나 관료가 중심이 되었고, 군비나 노비추쇄처럼 민생과 배치될 수 있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특히 김홍욱 장살 사건을 전후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트위터 시인? 16세기 조선에선 '일기=시'였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⑥
☞연재 지난 기사 바로 가기 : '말'은 막고 '벌'은 세게 하면… 짐승의 길!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예전에는 대문에 붙여놓았는데, 요즘엔 문자로 받고 있다. 새해의 첫 절기인 입춘을 맞아 크게 복 받고, 정월의 양기를 받아 경사스러운 일이 많으라는 뜻이다. 정월은 아래에 양(陽)이 셋 있는 달이므로 주역의 괘(卦)로 말하면 위가 땅(地 음
'말'은 막고 '벌'은 세게 하면… 짐승의 길!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⑤
문곡 김수항이 효종 7년(1656)에 올렸던 상소는 황해 감사 김홍욱이 직언을 하다가 장살 당한 일에 대한 비판, 효종의 군비와 노비추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이 해가 병신년이었는데, 문곡의 상소는 여러 모로 곱씹어볼 만한 데가 있다. 우리 나이로 치면 28세에 불과하던 젊은 관료였지만, 그의 상소에는 당시 조선 사회를 이끌어가려던 사람들의 핵심적인
대통령 기자회견에 '국민'이 되풀이 등장하는 이유?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④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연재 모아보기김홍욱(金弘郁)이 강빈 신원을 주장했다가 효종에게 국문을 당하였고, 결국 매를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왕정(王政)의 작동에 대해 고민할 주제를 준다. 김홍욱은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다. 관찰사는 통상 2품에 해당한다. 재상(宰相)의 반열에 속한다. 그런데도 효종은 부왕(父王) 인조, 그리고 자신과 관련하여 가장
조선의 진짜 '훈남'들이 여기에…샘나고 또 고맙다!
[2013 올해의 책] 이정철의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프레시안 books'는 개편 작업을 준비하며 예년보다 1주 일찍 송년호를 꾸렸습니다. 이번 송년호(170호)에서는 '프레시안 books'의 기자, 기획위원, 연재 필자 열두 명이 각자가 꼽은 '올해의 책'을 이야기합니다. 판매 순위나 화제성보다는 책과의 만남의 밀도, 이 사회에 던지는 화두를 중심으로 꼽은 '올해의 책'과 함께 2013년을 기억하고자 합니
"나 죽거든, 두 눈 빼내어 조선 망국을 보겠습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③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연재 모아보기 4.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③전사(前史)가 없으면 역사가 아니다. 황해감사 김홍욱의 상소가 올라오는 데까지도 전사가 있었다. 효종 5년 대 파란을 일으킨 상소 이전에도 김홍욱(金弘郁)은 효종과 묘한 긴장감을 연출했다.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인조의 만장(輓章 추도사)을 썼는데, 그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만
탄핵, 비판의 원칙과 예의!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②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연재 모아보기효종 초반, 문곡에게도 일이 많았다. 효종 2년(1651), 23세 되던 해 정월에 둘째 아들 창협(昌協)이 태어났다. 후일 숙종 때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숙종이 장씨를 위해 무리하게 궁궐에 별당을 짓는 일을 비판했던 아들이다. 그로 인해 문곡이 기사환국 때 사약을 받게 되었다고 사관이 실록에 기록한 바 있다.
'나라꼴' 망가뜨리는 방법,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①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연재 모아보기인조실록 편찬문곡은 장원급제했기 때문에 출육(出六)이라 하여 곧장 6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첫 관직은 성균관 전적(典籍)이었고, 곧 병조좌랑으로 옮겼다. 10월에 실록청 낭청으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실록청은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으로, 춘추관의 소속기관으로 보면 된다. 낭청은 실무를
성균관 유생들의 '험난한' 나날! 수업거부 끝에 결국?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④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③시험 보이콧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에서 시작된 논란은 점차 지방에까지 격화되어 갔다. 경상도에서는 공도회(公都會), 즉 관찰사가 주관하는 소과, 초시를 열고 제술 시험을 보려고 했으나, 도내 유생들이 모두 시험에 응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성균관 태학생들이 경상도 유직(柳稷) 등이 율곡과
"율곡 이이는 이단이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③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 꽃은 피나니 ②곡절 끝에 효종이 즉위하였다. 인조가 궁궐 안의 조귀인(趙貴人) 세력이나 친청파(親淸派) 김자점(金自點) 세력에 편중되어 국정을 운영하면서 조선의 정세와 행보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소현세자의 죽음도 급작스러웠거니와 뒤를 이어 벌어진 옥사로 인한 세자빈 강씨(姜氏)의 죽음에 대해서는 억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