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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막고 '벌'은 세게 하면… 짐승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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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막고 '벌'은 세게 하면… 짐승의 길!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⑤

문곡 김수항이 효종 7년(1656)에 올렸던 상소는 황해 감사 김홍욱이 직언을 하다가 장살 당한 일에 대한 비판, 효종의 군비와 노비추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이 해가 병신년이었는데, 문곡의 상소는 여러 모로 곱씹어볼 만한 데가 있다. 우리 나이로 치면 28세에 불과하던 젊은 관료였지만, 그의 상소에는 당시 조선 사회를 이끌어가려던 사람들의 핵심적인 가치와 지향이 담겨 있었다.

4.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⑤

효종 5년, 6년은 가뭄이 계속되었다. 소현세자의 빈궁이었던 강 씨의 억울함을 호소했던 김홍욱도 이 가뭄 때문에 내린 효종의 구언(求言)에 응했다가 횡액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가뭄이나 홍수 등이 발생하여 민심이 불안하면 이를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을 널리 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문곡은 효종이 재해를 두려워하면서 특별히 풍정(豊呈 궁궐 잔치)과 수리하는 일을 그만두고 직접 직언을 구한 데 대해 좋은 태도라고 말했다. 문제는 '위로 보고 아래로 살펴도 오히려 지난날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달라진 모습이 없으니, 천심(天心)이 감동하지 않을 것이고 재해=꾸짖음이 날로 더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예측할 수 없는 화란이 곧 닥칠 듯한 상황이 되었다. 문곡의 말을 따라가 보자.

원래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 이 하늘은 자연의 하늘, 신적인 하늘일 수도 있고, 민심(民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효종은 다만 한두 가지 공사나 행사를 중지시키고 폐지한 것으로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효종이 즉위한지 8년, 그러나 훌륭한 정치의 효과는 더욱 막막하고 타락한 정치는 날로 물이 불어나듯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문곡이 제시한 문제점과 대안은 여덟 가지였다.

조장(助長)하는 공부

효종은 그래도 자주 경연에 나아가 유신(儒臣 홍문관 관원)들을 접견하고 경사(經史)를 토론하면서 학문을 부지런히 강구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효종은 자질을 지나치게 믿는 경향이 있었다. 경연에서 강독할 때, 마음을 비우고 뜻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 항상 빨리 진도를 나가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뭔가 절실하게 체험하는 실질이 없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공부'에 허전한 데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학문에 힘쓴 실질적인 공력이 적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의 찌꺼기가 정화되지 못하였다.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때면 항상 혈기(血氣)가 이긴 나머지 일을 조처하고 명령하는 데 원칙을 잃는 것이 많았다. 문곡은 '제왕(帝王)의 학문은 필부(匹夫)와 다르다'고 강조하였다. 지엽적인 장구(章句) 해설만을 일삼고 본원(本源 마음)의 바탕에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하루에 세 번 경연을 열고 만 권의 책을 강론하더라도 몸과 마음에 아무런 보탬이 될 수 없었다.

<맹자>(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 ⓒ홍익출판사
이런 효종의 태도는 이해할만한 데가 있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어수선한 나라의 살림살이를 수습해야 했다. 가시적인 '사공(事功)'이 급선무로 느껴질 만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길에는 본말(本末)이 있다. 참된 뜻과 바른 마음이 근본이고 사업의 성과는 말단이다. 기강이나 원칙을 버려두고 공리(功利)를 추구하여 일시적인 부강(富强)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런 정치는 오히려 귀할 것이 없다. 더구나 근본이 혼란한데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은, 일시적으로 가능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초 기대할 일이 아니었다.

맹자(孟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밭일을 시켰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점을 의아하게 생각한 아버지는 밭으로 나가보았다. 아뿔싸! 아들이 싹을 잘 자라라고 뽑아놓았던 것이다. 결과는? 아버지가 도착했을 때 이미 싹들은 말라죽었다. 여기서 나온 고사가, 바로 '알묘조장(揠苗助長), 싹을 뽑아서 크는 걸 도와준 바보', 줄여서 '조장'이다. '서로간의 불신을 조장한다'고 할 때 그 표현이다.(<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왕실 재산을 늘린 결과

효종이 비운(否運 꽉 막힌 운수)을 만나 쇠란한 시대를 부흥시키려고 뜻을 품은 것은 훌륭하였다. 그렇지만 오랜 동안의 편안함에 익숙하다 보니, 태평하게 세월만 보내던 때와 차이가 없는 듯 보였다. 일례로, 공주의 저택을 잇달아 사치스럽게 짓고, 토지와 노비를 증식하며, 산택(山澤)을 멋대로 점거하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산택은 산과 습지(강을 포함)를 말한다. 원래 산이나 강은 공유지로 백성들이 땔감을 얻거나 고기를 잡아 생계에 보내는 수단이었다. 여기를 궁가(宮家 왕자나 공주의 집안)에서 점거하게 되면 백성들은 생계에 타격을 받는 것이었다. 문곡은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임금이 부귀를 보존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또 맹자의 말이 생각한다. 전국시대 양 혜왕(梁惠王)은 맹자를 초빙하고 자신의 정원을 보여주면서 "현자(賢者)도 이런 정원을 즐길 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일종의 과시였다. 맹자는 옛날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영대(靈臺)라는 누대를 지었던 고사를 들었다. 나라 한복판에 누대를 짓고 정원을 만들었는데도 백성들이 넓다고 불만을 삼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뜻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말한다. 세종(世宗)의 〈여민락(與民樂)〉이라는 교향악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은 '이 임금이 언제나 망하나', 하면서 고대한다.(<서경> '탕서(湯誓'〉

인재는 버려두고

효종이 인재를 아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즉위하자마자,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 등 산림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자문을 받고자 하였다. 송시열은 대군 시절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접근방법과 스타일이 달랐던 김육(金堉)과 김집의 불화로 김집이 낙향하였고, 효종은 잡지 못하였다. 효종은 이들을 지성(至誠)으로 설득하여 한양에 불러두었어야 했다. 또 식량을 대주고 때로 자문을 구하면서 조정에 보탬이 될 방도를 찾았어야 했다. 문곡이 상소를 올리기 바로 얼마 전에도 이유태를 부르려다가 말았다. 이에 대해 문곡은 "전하에게 본래 어진이를 좋아하는 성의가 없고 억지로 말이나 겉치레로만 하는 척하였을 뿐입니다."라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초려(草廬) 이유태(1607~1684)의 유고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초려는 양송(兩宋) 못지않은 경륜을 지녔던 학자였다. 세종시 공사 때문에 비가 오면 그의 신도비 중간까지가 물에 잠기던 일이 있었다. 세종시를 건설하면서 이 묘역을 뭉개고 신도비를 옮기려고 공사관계자들의 기만과 회유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성우 선생을 비롯한 지역 사람들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유적이 보존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문곡의 비판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효종은 조석윤(趙錫胤 1606~1655) 같은 신하를 내쫓았다. 조석윤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대제학을 지냈던 인재였다. 조석윤도 대사헌(요즘의 감사원장)으로 있으면서 강빈 신원을 언급했다가 대제학에서도 교체되고 전라도 부안(扶安)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대사성으로 복귀했지만 또 종성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시백(李時白)의 간청으로 조정으로 복귀할 즈음에 세상을 떴다.(조석윤의 일은 4.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②에서 다룬 적이 있다. ☞바로 가기 : 탄핵, 비판의 원칙과 예의!)

또한 인조(仁祖)의 묘호를 논의하던 중, 효종은 인조에게 '조(祖)' 자를 쓰는 데 반대했던 심대부(沈大孚 1586~1657))와 유계(兪棨 1607~1664)를 귀양 보냈다. 이들은 인조가 전란을 극복한 공, 즉 나라를 다시 세운 데 해당하는 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병자호란 이후 추락한 이씨 왕조의 권위에 대해 효종이 얼마나 민감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유계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양반에게도 호포(戶布)를 걷는 군역(軍役) 개혁론을 주장했던 학자였고, 이는 호포제 논의를 거쳐 균역법(均役法)으로 이어졌다. 유계는 문곡이 상소를 올리던 효종 7년에도 여전히 귀양 중이었으며, 이듬해에야 풀려나왔다.

맹자는 말했다. "치욕을 싫어한다면 덕을 귀히 여기고 학자를 높이는 것만 못하다. 현자(賢者)가 어울리는 지위에 있으며, 재능이 있는 자가 직책을 맡아서, 나라가 한가한 시기에 정책과 형벌을 분명히 한다면,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반드시 그 나라를 두려워할 것이다."(<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양병보다 양민

효종은 청나라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진 군대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군비(軍備)를 챙기다보면 자칫 백성들의 부역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연재해와 겹치면 더욱 그러하였다.

효종은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시키면서, 무기와 화약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군비 증강책의 하나로 효종은 영장(營將)을 설치하였다. 말하자면 지방군을 양성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던 셈이다. 하지만 군사를 불러 모아 쉬지 않고 연습시키자니 '한 몸에 두 가지 부역을 진' 백성들의 경우 농사를 폐하게 되고 관문(官門)에서 오래 대기해야 했다. 이들은 굶주리고 고달픈 데다 처자식을 보전하지 못하니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문곡은 '정예로운 기예는 과거보다 백배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인심을 잃는다면, 난리를 당하여 목숨 바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문곡은 효종 6년 겨울, 충청도 지방을 돌면서 지방 사정을 알고 있었다. 각 고을에서 문곡은, 무기를 수리, 제조하고 한편으로는 화약을 구워 만들며, 내포(內浦)에 성을 쌓느라 승병(僧兵)을 징발하여 사찰들이 거의 한꺼번에 텅 빌 정도였던 상황을 목격하였다. 영장(營將)이 매월 순찰하면서 주현(州縣)들은 음식과 거마의 제공으로 인해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지키는 관원은 책임이 두려워 기한에 맞추기 위해 분주히 다니면서 백성들에게 민폐만 끼치는 형국이었지,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호하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또 맹자의 말이 생각한다. "천시(天時)보다는 지리(地利)가 낫고, 지리보다는 인화(人和)가 낫다."(<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아무리 천운이 좋아도 성곽이나 해자 등 지리적 이점을 당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성곽이나 해자, 험준한 요새를 갖추었다 해도, 거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함께 협심하는 것보다 나을 수는 없다. 지난 시간에 다룬 노비 추쇄도 마찬가지 이유로 바람직한 정책이기 어려웠다.


완리창청[萬里長城] 빠따링[八達嶺] 정상에 오르는 관광객들의 모습. 저토록 길게 튼튼히 쌓았어도 저것이 북방의 침입을 막은 적은 없다. 삶의 터전은 물론, 나라를 지키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다. 성곽은 보이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종종 위정자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위정자라는 배가 뜰 수 있는 것은 백성의 마음이라는 바다 때문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노비 추쇄(推刷) 조처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말할 필요는 없으나 나라에서 얻은 것은 공천(公賤 공노비)이고 잃은 것은 민심입니다. 재물은 모였으나 백성이 흩어졌으니, 어찌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추쇄를 시행하고 문서를 점검할 때에는 일가와 이웃까지 침해하여 몽둥이와 채찍으로 극심하게 매를 쳤습니다. 노약자를 이끌고 피해 나온 자들이 길에 가득했으며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원한이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언로(言路)는 나라의 존망

언로가 막혔는가, 트였는가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문제였다. 문곡이 볼 때, "예로부터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간언(諫言)을 막음으로 인한 화(禍)보다 심한 것이 없었다." 효종은 본래 수용하는 도량이 부족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약점이 있었다. 남의 말을 들을 때에 마음을 비우고 살펴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금 자신의 뜻에 거슬리거나 말씨가 잘못되어도 그것을 들추어 엄하게 꾸짖었다. 이렇게 되면 누구라도 그 소견을 다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양상이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심해져갔다. 김홍욱(金弘郁)과 홍우원(洪宇遠)의 일은 그 정점이었다.

이후로 언로가 막혀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효종은 김홍욱을 죽였고 또 그 자손들을 금고(禁錮)하였다. 김홍욱의 장살이 부당함을 직언했던 홍우원은 효종이 처벌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감싸주는 도량을 보인 셈이었다. 그러나 홍우원을 공격했던 자들은 모두 표창, 발탁되었고 그를 구하려고 한 자는 죄를 입었다. 이런 상황을 문곡은 '위아래가 막혔다'고 표현하였다.

원기(元氣)를 세우라

이렇게 언로가 막힌 데는 사기(士氣)가 꺾인 데도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선비[士]는 조선시대 양반 계층으로, 관직을 담당하는 관료 풀(Pool)이었고 공론=여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조선전기부터 사림(士林)이라고 불리는 집단이었다. 사림의 위축은 곧 나라의 기강이 위축되는 것이고, 사림의 부패는 곧 나라의 부패와 연결되었다. 문곡은 "나라에 선비의 기상이 없으면 정론(正論)이 유행하지 않고 정론이 유행하지 않으면 선악(善惡)에 분별이 없고 시비가 뒤섞이어 사람들이 모두 절조를 잃어 급히 짐승 같은 상태로 빠져들 것"이라고 말하였다. 결과는 아첨하고 영합하는 풍습이 번성하는 일뿐이다.

형벌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도 병폐 중 하나였다. 원래 형벌이란 정치를 보조하는 수단이지 본래 상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형벌은 늘 신중하도록 권고되었다. 효종은 "사소한 잘못과 작은 죄라도 그때마다 중벌에 처하며, 포승으로 묶고 매를 치는 벌이 위로 경사(卿士)에게까지 미쳐 감옥이 항상 가득하고 고문이 낭자하니,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억울한 기운이 음양(陰陽)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진(秦)나라가 혹독한 형벌을 자행한 잘못은 따질 것도 없었다. 한 선제(漢宣帝)와 같은 경우에도 형벌을 가혹하게 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여 결국 한나라는 이 때문에 쇠퇴하였다. 엄한 형벌은 나라에 무익하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애당초 콘셉트를 잘못 잡은 것이다.

문곡은 노온서(路溫舒)가 "공평하게 형벌을 시행하는 자에게는 후환이 많기 때문에, 옥리(獄吏)가 사람을 아예 죽이려고 한다."고 했던 말이 바로 요즈음 상황이라고 진단하였다. 노온서는 한나라 선제 때, 형벌 완화를 극구 주장했던 인물이다. 말하자면, 공평하게 형벌을 시행하여 풀어주면 뒤에 해코지를 하기 때문에, 옥사를 다스리는 관원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아예 죄인을 죽였다는 말이다. 추쇄, 화약, 군비 등으로 인하여 넘쳐나는 형벌을 문곡은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흔히 그렇듯이, 효종이 장률(贓律 뇌물죄)을 엄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처형되어 죽은 자는 다만 외롭고 지원하는 사람이 없는 권영(權榮)과 김흥조(金興祖)뿐이었다. 정작 한없이 탐욕을 부렸던 황헌(黃瀗)과 김여수(金汝水)의 경우는 법을 굽혀가며 편파적으로 옹호하여 시종 법망(法網)에 구멍이 뚫렸다.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효종은 군법(軍法)을 엄하게 한다면서 마병(馬兵) 한 사람이 잘못으로 군법을 범하자 사형에까지 처했는데, 정작 총융청(摠戎廳)의 신하 구인기(具仁墍)가 명을 따르지 않았던 사건은 그대로 두었다.

효종은 문곡의 지적을 듣고, '형벌을 너무 엄하고 각박하게 사용한다'는 지적이 참으로 놀랍다고 답변하였다. 사관은 문곡의 수백 마디가 효종의 잘못을 정확히 말하였고, 나머지도 당시의 병폐를 잘 지적하였으나, 효종이 따른 내용은 죄수를 의결하는 것뿐이었다고 아쉬워하였다. 하지만 문곡의 상소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뜻을 보여주고 꾸짖지 않으니 사람들이 '근래에 드문 일'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덧붙였다. 변화의 조짐을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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