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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편찬
문곡은 장원급제했기 때문에 출육(出六)이라 하여 곧장 6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첫 관직은 성균관 전적(典籍)이었고, 곧 병조좌랑으로 옮겼다. 10월에 실록청 낭청으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실록청은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관청으로, 춘추관의 소속기관으로 보면 된다. 낭청은 실무를 보는 관원으로, 사초를 비롯하여 실록 편찬에 들어갈 자료의 수집, 산삭(刪削 삭제하고 줄이는 일)을 맡는다.
춘추관 관원은 전원 겸직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아는 사관(史官)은 춘추관 소속이 아니라 예문관 소속이다. 이들은 전임으로 8명이며 한림(翰林)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승정원,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주요 관청의 관원은 춘추관을 겸직한다. 어차피 이들 관청의 기록이 실록의 자료가 될 터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의정부, 이조, 병조, 종부시, 시강원 등에도 춘추관 겸직 관원을 두어 거기서 나오는 기록을 관리하고, 전임사관들에게 보내게 했다.
전임이든 겸직이든 사관을 지냈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묘비에 꼭 적는다. 사관은 영예로운 직책이었지만 실록청의 실무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실록은 국왕의 재위 단위로 편찬하기 때문에 실록 편찬을 위해 보관했던 사초는 물론이고 각 관청에서 보내는 문서는 오래된 것이 많았다. 당연히 먼지가 풀풀 나고, 종이벌레 때문에 초고를 만들기 위한 산삭은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겸직과 고역이라는 약점 때문에 청직(淸職)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실록청 관원은 자주 바뀌었다.
힘들수록 일을 마쳤을 때 개운한 법이다. 실록을 편찬한 뒤 비밀도 보호하고 종이도 재생하는 절차가 세초(洗草)였는데, 사관들에게는 한 시대를 씻어내는 느낌도 들었나보다. 문곡은 세초할 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인조실록. 효종 4년 관례대로 실록 편찬을 마쳤다. 실록 편찬은 영예이면서도, 먼지 풀풀 나는 문서를 추리고 정리하는 고역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鼎水龍髥已隔天
천상에 계신 지 몇 년이나 흘렀던가
玉欄花發幾回年
주나라 시에선 선왕들의 덕 노래했고
周詩尙詠前王德
한나라 역사 태사에게 편찬 맡겼도다
漢紀還歸太史編
계곡 물에 먹물 지우는 세초 보자니
幽澗墨痕看草洗
내려준 술동이 봄빛이라 은혜 감사하네
御壺春色拜恩宣
좋은 잔치에서 운문곡은 연주도 마라
華筵莫奏雲門曲
좌중의 누구인들 슬퍼하지 않겠는가
座上何人不愴然
<인조실록> 편찬을 효종 4년 6월에 마쳤는데, 세초연을 하면서 문곡은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의 운(韻) 자에 맞추어 시를 지었다. (<문곡집> 권1 '洗草宴次白軒-李公 景奭-相公韻') 시에 나오는 '운문곡'은 황제(黃帝)가 지었다는 노래로, 구름이 불어와 사방을 덮듯 은혜가 고루 미친다는 내용이다. 세초할 때는 잔치를 내려주는데 이를 세초연(洗草宴)이라고 한다. 고되지만 보람차기도 한 일을 마치고 잔치까지 벌이니 마음이 흡족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냥 좋은 잔치일 수만은 없었다. 세초되는 기록을 바라보면서 한 시대가 흘러갔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상념에 젖었을 것이다.
대제학이라는 자리
효종 원년 6월, 실록 편찬을 시작하면서 대제학을 뽑아야 했다. 대제학은 문형(文衡), 즉 '학문의 저울'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당대 학자 중에서 실력과 덕망이 있는 인물을 뽑았다. 실록을 편찬하려면 대제학의 감수(監修)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대제학이 없는 상태에서 실록을 편찬할 수는 없었다.
대제학은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추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전임 대제학 정홍명(鄭弘溟 정철(鄭澈)의 아들)은 병으로 시골에 내려가 있었고,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은 김자점(金自點)의 밀고로 청나라에 의해 평안도 의주에 있는 백마성(白馬城)에 구금되어 있어서, 문곡의 할아버지인 영부사 청음 김상헌만이 대제학을 추천할 처지에 있었다.
효종이 사관을 보내어 물으니, 김상헌은 조석윤(趙錫胤) 한 사람만 천거하였다. 그러자 효종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대제학을 추천할 때 의정부의 육경(6조 판서)이 모여 의논해서 권점(圈點 대상자에게 점을 찍어 표시함)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의망(擬望)의 순서를 정하는 것인데, 한 사람만 천거하여 권점을 찍을 곳이 없다면서 청음에게 다시 물으라고 지시했다.
청음은 대안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提學)을 지낸 사람들에게 함께 추천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현임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와 우의정 조익(趙翼)이 모두 제학을 지냈으니 함께 모여 대제학을 천거하자는 견해였다. 이경여와 조익은 현임 제학인 김광욱(金光煜)과 오준(吳竣), 그리고 조석윤을 추천하였고, 효종이 의정부, 육조 장관들을 불러 투표한 뒤 조석윤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내수사(內需司)의 폐단
대제학 조석윤(趙錫胤 1606. 선조39∼1655. 효종6)의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재(樂靜齋)이다. 장유(張維)에게서도 배웠고, 청음의 제자이기도 했다. 청음이 조석윤을 대제학으로 임명했을 때 효종은 절차를 문제 삼았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 여러 궁가(宮家)에서 입안(立案 점유 증명서)을 받거나 세금을 면제 받았다는 핑계를 들어 백성의 토지를 점령하거나 가로채는 일이 있었다. 궁가는 왕자, 공주(옹주)의 세력을 끼고 있는 곳이므로 백성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궁궐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 소속 노비의 잡역과 세금 면제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야 했음에도, 평안도에서는 내수사 노비의 논밭에 대한 세금을 자의적으로 면제해주었다. 각 관청의 노비를 뽑아서 왕실의 부역에 충당한 후 '사부(斜付)'라 칭하였는데 사부란 노역이 고된 노비를 노역이 심하지 않은 관서로 옮겨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내수사의 공문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출납해 곧바로 해당 관청에 보내 문서를 발급하기도 했다. 개인의 노비였다가 죄를 저지른 뒤 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로 투속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석윤이 대사간이 되었을 때 이런 폐단을 논하였지만 효종은 들어주지 않았다.(<국역효종실록> 권2 즉위년 12월 9일(계사))
조석윤은 궁가의 일로 효종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조석윤의 파직으로 이어졌다. 조석윤이 실록을 편찬하고 있어서 파직하면 안 된다는 게 중론이었지만, 효종은 '만세의 공론[즉 역사편찬]을 한 사람에게 맡길 수만은 없다'고 하여, 조석윤이 대제학으로 실록을 편찬하고 있는 일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다. 조석윤 역시 이런 효종의 전교에 대해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효종에게 남겨진 앙금
이로부터 2년 뒤인 효종 2년 10월, <인조실록> 편찬이 한참 진행될 무렵, 조석윤은 대사헌으로 있었다. 효종이 어떤 능에 행차 하던 날, 횃불이 어가 앞에서 꺼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 탓에 호위하던 군사의 말이 다리에서 떨어졌다. 중대한 사태였다. 대사헌인 조석윤은 능행 책임자인 경기 감사 유철(兪㯙)에게 어떤 죄를 물릴 지 판단해야했다.
율관(律官)이 해당 법조문을 찾았는데 딱 맞는 율문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임금이 탈 배를 잘못하여 견고하지 못하게 하였을 경우 감독한 제조관은 공장(工匠)의 죄에서 2등을 감한다.'고 한 것이 가장 서로 가깝다고 하였다. 이 조문에 따라 조석윤은 유철의 죄를 조율하였다.
조석윤의 말을 빌면 "도주(道主 관찰사)로 있으면서 임금의 능행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제대로 검칙하지 못한 죄는 참으로 막중하다. 그러나 그 정상으로 말한다면, 신하가 되어서 어찌 임금이 능소에 참배하는 날에 직무를 태만하게 하여 스스로 엄한 불경죄에 빠져들었겠는가. 이로써 본다면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저지른 죄로 단정할 경우에는 억울함이 있을 듯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죄(公罪 공무를 수행하다 저지른 죄)라고 생각했는데, 효종의 대답은 그런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역효종실록> 권7 2년 10월 21일(을축))
결국 효종은 유철의 죄를 농락했다며 조석윤 등이 다시 조율하게 할 수 없다고 전교했다. 김육이 나서고, 승지 이응시(李應蓍)·조형(趙珩) 등이 재차 지나친 처사라고 효종을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조석윤은 성문을 나가 강가에서 대죄하였다. 문곡은 10월 29일 부안으로 귀양 가는 조석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찬바람 북풍한설에 온 강이 어두운데 陰風朔雪滿江昏
단출한 행장으로 강마을에 머무셨네 草草行裝寄水村
궁궐문 겨우 가까운 지척이라 마시라 莫道修門纔咫尺
굴원에게는 도리어 초혼조차 없었나니 楚臣還有未招魂
(<문곡집> 권1 '次趙都憲樂靜-錫胤-丈就謫時所作韻')
원문의 '초나라 신하[楚臣]'은 굴원(屈原)이다. 굴원은 초나라 충신으로 멱라수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었지만, 나중에 초혼마저 받지 못하였다. 존경하는 선배가 귀양 떠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후배 문곡은 위로인지 다짐인지 모를 말을 시로 남겼다. 굴원에게는 초혼조차 없었으니, 선배님도 각오하시라! 아니면, 굴원에게는 초혼도 없었지만, 선배님은 우리가 초혼해드리리니 안심하시라? 다행히 조석윤은 김육 등의 주선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대사간, 이조참판을 지냈으나 효종의 불신은 계속 이어졌다.
이어진 불신
조석윤이 차관인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이조판서 정세규(鄭世規)가 사직을 청하였다. '문지(門地 가문이나 지체)가 전장(銓長 이조판서)에 맞지 않으니 공론이 행해진다면 탄핵하는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등의 말이 있다'는 참판 조석윤의 상소의 내용을 들어 사직을 청한 것이었다. 효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세규는 "신은 한낱 음관입니다. ……어찌 사심을 품고 생각이 다른 자를 치려는 의도가 있어서이겠습니까. 성명께서 법도를 세워 공경하고 화합하는 데에 진력하시니, 다른 사람도 오히려 그렇지 않을 것인데 조석윤처럼 어진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성명께서 당론을 타파하려고 신을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두신 것은 혹 잘못인 듯합니다."라며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 (<국역효종실록> 권9 3년 9월 16일(을유))
조석윤이 실언(失言)임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이조판서 자리가 비게 되었다. 효종은 조석윤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시골로 돌아가서는 간사한 생각이 발동하여 정세규를 반드시 쫓아내려 하면서 자리를 같이할 수 없다고 거만하게 상소를 올렸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지난번 조석윤이 왔을 때에 내가 짐짓 잘 대우하여 그 자리를 편안하게 하였는데도 이제는 이렇게 하니, 난들 어찌하겠는가. 내가 들으니 왕후(王侯)·장상(將相)은 본디 종자가 따로 없다는데, 어찌 이조만은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 내가 어리석어서 쾌히 결단하지는 못하나, 조석윤 같은 자는 용서 없이 죽일 만하다. 그가 반드시 정세규를 쫓아내려는 것은 실로 인사권을 잡으려는 것이고, 그가 인사권을 혼자 잡으려는 것은 실로 같은 당파를 벌여 놓으려는 것이니, 권간(權奸)의 조짐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은 고려시대 만적(萬積)의 난 때 만적이 세를 규합하면서 '왕후, 장상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라고 했다는 말로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원래 이 말은 중국 진(秦)나라 말 농민봉기가 한창 일어날 때 농민군 장수였던 진섭(陳涉 진승)이 했던 말이다. (<사기(史記)> 권48 〈진섭세가(陳涉世家)〉)
진승과 만적이 했던 말을 효종이 하니까 느낌이 새로운데, 아무튼 효종은 이조판서를 할 사람이 타고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동원했다. 우리가 느낀 새로움은 다소 억지도 들어있던 것이다. 이러니 정태화, 김육이 중재에 나서도 소용이 없었다. 조석윤은 다시 강계(江界)로 귀양을 갔다. 간성으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효종 4년 4월에 대사성으로 조정에 복귀하였다.
효종의 분노로 보아 이렇게 쉽게 풀려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석윤이 풀려난 것은 이때 재해가 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경석, 정태화, 김육, 이시백 등 정승들이 효종의 구언(求言)에 대해 각 관원들의 의견을 모아 올렸다. 그 중, 이미 사헌부 정5품 지평(持平)에 오른 김수항의 계(啓)도 있었다.
근본을 확립시켜 임금의 심지를 굳건히 하고 사욕을 끊어서 성덕을 닦으십시오. 기쁨과 분노를 경계하여 도량을 넓히고 학문을 계속하여 성학(聖學)을 힘쓰고 성심(誠心)을 열어 아래 신하를 대우하고 공도(公道)를 펴서 능력 있는 인재를 수용하십시오. 궁궐을 엄히 하여 부정한 길을 막고 언로를 넓혀 충신과 간언하는 사람을 불러들이고 변방을 공고히 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고 수령을 잘 가려 백성의 고통을 보살피십시오. 붕당(朋黨)을 이유로 옳은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과격하다는 이유로 사기(士氣)를 꺾지 말아야 합니다. 궁노(宮奴)들을 외방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여 멋대로 거두어들이는 길을 끊게 하고, 중관(中官 내관)으로 하여금 어공(御供 임금에게 소용되는 물품)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여 궁궐 안이 저자거리가 되는 조짐을 막으십시오. (<국역효종실록> 권10 4년 2월 13일(경술))
효종은 철저하게 세자 수업 받았던 군주가 아니었다. 나라를 어서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는 의지와 청나라에게 설욕해야 한다는 분노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효종은 혼자서 앞서 가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파트너의 선택부터 군비 확충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조정 일반의 지지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자연재해가 겹쳤다. 조석윤의 유배만 다루었지만, 인조의 묘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유계(兪棨)와 심대부(沈大孚)를 귀양 보낸 것도 좋지 않은 조짐이었다.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김홍욱(金弘郁)이 효종에게 국문을 받다가 맞아 죽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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