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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험난한' 나날! 수업거부 끝에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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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험난한' 나날! 수업거부 끝에 결국?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④

☞연재 지난 글 바로 가기 : 눈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③

시험 보이콧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에서 시작된 논란은 점차 지방에까지 격화되어 갔다. 경상도에서는 공도회(公都會), 즉 관찰사가 주관하는 소과, 초시를 열고 제술 시험을 보려고 했으나, 도내 유생들이 모두 시험에 응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성균관 태학생들이 경상도 유직(柳稷) 등이 율곡과 우계를 무함하였다는 이유로 유직 등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유적'은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書院) 등에 있는 선비의 명단을 말한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에서 삭제된 유직 등은 신석형(申碩亨) 등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에 찬성하면서 자기들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과거장에서 쫓아냈다. 조정에서는 그것은 폐습이라고 보고 경상도 감사 민응협(閔應協)에게 조사해서 다스리게 했는데, 유직 등 경상도 유생이 모두 분개하여 시험 날 한 사람도 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조에서는, "영남 선비들의 습속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긴 하나 위엄으로 제압해서는 안 되니, 감사로 하여금 여러 유생들을 잘 타일러 가능한 한 진정시키도록 하라."고 청했고, 효종도 동의하였다. (<효종실록> 권4 1년 7월 1일(임자))

아름답지 않은 인연

이렇게 되자 성균관 태학생들이 행동에 나섰다. 학생 대표 박세채(朴世采) 등(문곡 김수항도 학생 대표자였다.)이 상소하여 유직의 상소에 반박했다. 유직이 율곡과 우계를 두고 '어버이를 버리고, 임금을 뒤로 하여 명분을 저버렸다'는 말이야말로 무함이라는 것이다. 성균관 학생회인 재회(齋會)에서는 이미 유적에서 이름을 뺀 유직에 대해 다시 부황하는 조치를 내렸다. 부황은 영원히 사대부에서 제적하는 벌이다.

성균관 유생 중 유직의 처벌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목래선(睦來善 1617 광해군9∼1704 숙종30)이나 이희년(李喜年)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남인(南人)이었는데, 이미 남인 일각에서 율곡을 이단시하는 풍조가 형성되고 있었던 듯하다. 목래선은 문곡이 장원을 했던 병술년(1646 인조24) 사마시에 같이 합격한 동년(同年)으로,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와 있었다.

목래선은 유직의 처벌에 참여하지 않고 나간 이유를 세 가지 내세웠다. 첫째는 '유직을 부황하였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고, 둘째는 '재회에서 논의할 때에 가부(可否)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고, 셋째는 '동료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셋째 이유는 부수적인 것이고, 실제 이유는 유직을 처벌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래선은 이 해(1650 효종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거치고, 훗날 갑인예송(1674 숙종즉위년)으로 서인이 실각한 뒤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삭직되지만,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1689년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그가 좌의정이었을 때, 남계(南溪) 박세채의 손자 박태보(朴泰輔)가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극심한 고문을 겪고 귀양 가는 도중 세상을 떴다. 이미 문곡이 귀양 갔다가 사사될 무렵에 벌어진 이 사건을 앞서 다룬 바 있다. 그 좋지 않은 인연이 40년 전인 이 때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건 유생들의 일입니다"

남계와 문곡은 목래선이 삭적이나 부황에 대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다가 물러간 뒤에야 뒷말을 한다고 비판하면서,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유생들이 권당(捲堂)한 것은 부득이하여 취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권당'은 식당을 가지 않는 것인데, 일종의 수업거부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나아가 남계, 문곡 등은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유직에게 벌을 더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때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조치 때문에 구차하게 올리고 낮추어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진 사람을 무함한 벌에 대해서 더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것은 본래 유생들의 책임이지 결코 대신(大臣)과 조정(朝廷)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 있을 무궁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리시면서 준엄하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효종실록> 권4 1년 7월 3일(갑인))

주목할 대목은 유직에 대한 유벌(儒罰 유생에 대한 벌, 유생들이 주는 벌) 여부가 아니다. 남계 등은 유직에 대한 처벌이 유생들끼리 처리할 문제이지, 대신이나 조정에서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성균관 학생회인 재회가 갖는 자율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최고 권력자인 왕이나, 신하 중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신들조차 재회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없었던 것이 조선 사회 선비들의 세계였다. 위 상소는 사림(士林)을 나라의 원기(元氣 으뜸가는 기운)로 치던 사회 모습과 정치와 학문을 분리하려던 사회적 긴장감이 묻어난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역할과 차이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시키는 글이기도 하다.

"상소는 왜 올리나?"

그러나 효종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태학생들의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효종은 "이미 '결코 대신과 조정이 지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해놓고, 뭐 하러 글은 올리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고 대답했다. 상소를 돌려준다는 것은 안 받은 걸로 치겠다는 의미이다. 효종은 불쾌했다.

그러자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조정에 나섰다. 유생들의 상소에 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분명한 비답을 내려 위아래가 막히지 않게 하고 유생들이 스스로 안정되게 하라고 촉구했다. 이 '위아래가 막히지 않아야 한다'는 말, 참으로 중요하다.

국무회의를 보면 대통령만 말하고 나머지는 묵묵히 듣기만 한다. 이를 두고 '위아래가 막혔다'고 한다. 오히려 대통령은 듣고 비서나 국무위원들이 말해야 한다. 이것이 <주역>에서 말하는 태(泰)괘이다. 태괘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형상이다. 얼핏 보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어야 제대로 된 형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옛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면 소통,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어야, 하늘은 오르려고 하고 땅은 내려오려고 하면서 우주의 운동이 생기고, 위아래가 소통한다고 본 것이다.

승정원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마음을 풀지 않았다. 자신과 대신이 다 사체(事體)에 어두워 마땅한 거조를 잃었고, 결국 유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평하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다면서, "내가 매우 부끄러워 답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이 정도면 삐진 것이다.

총장의 중재 노력

사실 효종이 이렇게 될 때까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유직의 상소는 2월에 있었고, 반박 상소인 신석형의 상소는 5월, 남계 등이 올린 태학생 상소는 7월이었다. 태학생들은 효종의 조치가 '간섭'으로 느껴졌겠지만, 효종도 나름대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균관을 중심으로 사태가 돌아갔으니, 성균관 대사성이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국립대 총장격인 대사성은 정유성(鄭維城)이었다. 태학생들이 권당을 하고 성균관을 비웠을 때 정유성은 효종에게 상황을 보고하면서 사태의 책임을 지고 체직을 청하였다.

당시만 해도 효종은, 오늘 여러 태학생들이 바로 훗날 조정에 설 선비들이기 때문에 힘써 조정하여 함께 화합하도록 한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면서 정유성의 사직을 만류하였다. 또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나라에서 널리 인재를 취하는 길에 흠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와 우의정 조익(趙翼)도 나서서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며 과거는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방도'라고 말하면서, 즉위 초이니만큼 경사(慶事)를 함께 하자고 건의하였다. 또 유생들이란 위엄으로 제어하기 어렵고 제왕의 도량은 포용하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강조하였다. 유생들이 젊기 때문에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 포용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유직의 처벌 수위에 대해서도 삭적에 그치고 부황은 취소하자고 중재안을 제시했다. 경상도에서 과거시험을 거부하는 사태에 대해서는, 영남 선비들의 수가 만여 명에 이르고 유직의 상소에 따른 숫자는 십분의 일에 불과한데 온 도의 선비들이 모두 과거에 응하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괴이하다며, 이는 선비들의 풍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효종실록> 권4 1년 6월 29일(신해))

"간섭도 윽박도 안 됩니다"

기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니까 그렇다 치고, 효종이나 대신들이 못할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유직에 대한 처벌 수위에 대해서만 삭적만 하고 부황은 하지 말도록 하자고 제기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태학생들은 조정에서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여겼다.

효종의 비답이 의외로 강경하자, 상소를 올린 남계, 문곡 등 유생들은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자신들이 올린 상소를 임금이 내쳤으니 그대로 현관(賢關 성균관)에 거처하고 있을 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대궐에서 물러나와 태학에 돌아가 성묘(聖廟 문묘)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또 권당(수업거부)을 한 것이다. 이번엔 다시 공이 효종(곧, 조정)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효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효종의 심정에 재미있는 변화가 눈에 띤다.

내가 선처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지금 또 성균관을 비웠다. 처음에는 나도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타일렀다. …… 유생은 매양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임금인 나만 유독 염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답하지 않고 그저 부끄럽다고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공관(空館)까지 할 일인가. 사방에서 보고 들으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포저(浦渚) 조익(趙翼), 정치적 경륜 뿐 아니라 이론과 경세에 빼어난 인물이었는데 연구가 부족하다. 이정철 박사의 위 책은 포저 조익을 율곡 이이, 오리 이원익, 잠곡 김육과 함께 조선 시대 대표적 경세가 4명에 포함시켜 다루고 있다. ⓒ역사비평사
사실 효종은 태학생들의 상소에 언짢았고, 유생들의 상소를 물리쳐서는 안 된다는 승정원의 권유에도 속이 편치 않았다. 앞서 효종이 '부끄럽다'고 한 말도 정말 부끄러워서 부끄럽다고 한 게 아니라, 빈정거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마치 정말 부끄럽다고 말한 것처럼 응대하고 있다. 물론 효종은 아직 맘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생들의 염치(廉恥)만 생각하지 말고 내 염치도 생각해달라고 말하며, 성균관을 비운 유생들에게 서운함을 내비쳤다.

다시 우의정 조익은 '유생은 본디 지휘해서는 안 되고 또 위협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특별히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온화한 비답을 내리면 유생들이 어찌 끝까지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효종을 설득하였다. 새로 대사성에 임명된 이후원(李厚源)도 자신이 대사성이지만 유생들의 논의에는 간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효종으로서도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유생들이 자기들의 뜻을 펼 목적으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임금을 협박할 계획을 하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 뜻으로 타이르는 것이 온당하겠다." 효종도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약간의 절차가 필요했다.

조익이 윤순지, 이후원 등과 함께 성균관에 가서 유생들을 불러 모으고 효종의 분부라며 설득하였다. 이쯤 되면 유생들도 받아들이는 게 도리였다. 대신과 사장(師長 대사성)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받아들이자면서 서로서로 의견을 모아 성균관으로 복귀하였다.

문과 장원급제

문곡은 곧바로 성균관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가을 나들이에 나섰다. 충청도 회덕(懷德)으로 가서 동춘당 송준길을 찾아 인사하였고, 진잠(鎭岑)에 있던 우암 송시열도 가서 뵈었다. 넷째 누이가 송규렴(宋奎濂)과 혼인하였는데 시댁이 회덕에 있었고, 시집갈 때 문곡이 동행하면서 함께 인사를 드린 것이다.

▲ 문곡 김수항의 누이가 시집간 회덕 송규렴의 집 대문. 호를 따서 제월당(霽月堂)이라고 불렀다. '제월'이란 달이 갠다는 뜻이다. 사진출처(blog.naver.com/jcjkks) ⓒjcjkks

성균관의 수업거부가 있은 이듬해, 문곡은 둘째 아들 창협(昌協)을 얻었다. 문곡의 둘째아들 창협은 숙종 12년(1686)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장씨에게 골몰하여 궁궐에 몰래 별당을 지어주려고 거짓말을 했던 숙종에게 '장씨를 위해 별당을 짓는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안으로는 별당을 짓고, 밖으로는 신하들의 말을 막는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다'라며 숙종의 잘못을 일깨운 인물이다. 숙종은 그로부터 3년 뒤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문곡에게 죽음을 내렸으며 인현왕후를 사가로 내쫓았다. 사관조차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하게 된 것이라고도 몰래 말하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문곡은 1651(효종2) 가을 다시 회덕으로 갔다가 동춘당에게 인사드렸다. 송규렴에게 시집갔던 누이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수십 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거기서 지역 여러 선비들과도 만난 듯하다.

9월에 과거가 있었다. 알성 문과였다. 효종이 알성(謁聖), 즉 공자를 모신 문묘에 인사를 온 길에 베푼 과거에서 문곡은 장원으로 뽑혔다. 성균관에서 수업거부를 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백강(白江) 이경여가 독권관(讀券官 시험문제를 읽어주는 관원)을 맡았었는데, 백강은 문곡의 할아버지 청음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가 외람되이 공원(貢院 시험장)을 주관하였는데, 실로 제대로 된 사람 뽑은 걸 축하해야겠습니다."

그날 합격자 발표를 할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효종은 어전에 있던 촛불 두 자루를 가져오게 하여 문과, 무과 장원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대들은 내가 촛불을 주는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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