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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비판의 원칙과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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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비판의 원칙과 예의!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②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연재 모아보기

효종 초반, 문곡에게도 일이 많았다. 효종 2년(1651), 23세 되던 해 정월에 둘째 아들 창협(昌協)이 태어났다. 후일 숙종 때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숙종이 장씨를 위해 무리하게 궁궐에 별당을 짓는 일을 비판했던 아들이다. 그로 인해 문곡이 기사환국 때 사약을 받게 되었다고 사관이 실록에 기록한 바 있다. 효종 3년, 24세 되던 해에 할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청음이 세상을 떴다. 슬픔도 잠시 문곡은 각 고을에 재해 상황을 파악하러 나갔다가 10월에 돌아왔다.

오정원 사건

효종 4년 4월, 오정원(吳挺垣)의 일로 자핵(自劾 스스로 탄핵함)하고 교체되었다. 이 일은 사간원의 논계(論啓 인물이나 사건을 비판하는 보고)에서 비롯되었다. 사간원에서 "전 평안감사 오정일(吳挺一)과 의주 부윤 강유(姜瑜)는 일찍이 부임지에 있을 때에 그 직책에서 벗어나기를 도모하기 위한 계책으로 한때의 병환을 죽을병이라고 칭하면서 직무를 전폐하였다가, 체임된 뒤에는 모두 나아버렸으니, 파직시켜야 한다."고 하였다.(<효종실록> 권10 4년 3월 17일(계미))

평안도와 의주가 변방이자 지방직이고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병을 이유로 사직했던가보다. 그런데 교체된 뒤에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활동하자 사간원에서 관직을 수행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비판한 것이다. 요즘도 지방 근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가끔 지방직을 꺼려서 병이나 부모 봉양을 이유로 체직을 꾀하는 경우가 있었다.

오정일과 강유에 대한 파직은 효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정일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처남이었는데, 효종은 아우인 인평대군과 우의가 돈독했기도 했고, 이 사안이 파직까지 시킬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오정일이 병으로 체직된 것일 수도 있고.

이 사안은 다른 데로 불똥이 튀었다. 오정일의 동생 오정원(吳挺垣)이 형을 변명하고 나선 것이다. 사헌부에 따르면, 정언 오정원이 형을 위해 변명할 목적으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관리를 감찰하는 사헌부, 간쟁을 맡은 사간원은 내부 규율도 엄격하여, 다루는 사안 중에 혐의가 될 만한 일이 있으면 피혐을 하게 되어 있었다. 피혐이란, 혐의를 피한다는 뜻이다. 오정원은 형 오정일이 사간원의 논계를 받고 있었으므로 피혐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혐한 뒤에는 사안에 대해 언급을 피해야 한다. 피혐의 취지가 그런 것이다.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개입하면 공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정원은 피혐하고서도 형에 대한 변론을 계속하였던 듯하고 그 때문에 사헌부에서 오정원을 파직하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문곡은 사간원 정언으로 오정원을 파직하라는 논계에 참여했다가 효종이 받아들이지 않자 체직을 청하였다. (<효종실록> 권10 4년 4월 3일(무술))

청탁, 피혐, 체직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문곡이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였다. 사헌부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논계했다. 옷을 분수에 넘치게 입은 사람을 법에 의거하여 체포하였는데, 바로 예조판서 이후원(李厚源)의 배리(陪吏 수행 관원)였다. 그를 잡아 오려고 했으나 도망쳐 달아났기 때문에 의금부 관리가 부득이 그의 어미를 잡아 왔다.

그런데 판서 이후원이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에게, "의금부 관리가 법을 범한 자에게 뇌물을 받고서 고의적으로 풀어 보낸 뒤, 또 그의 집에 가서 작란(作亂)했으니, 그 관리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했고, 이일상은 즉시 그 관리를 잡아가두고 다스리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대질 신문한 결과 의금부 관리는 죄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서원리는 이후원의 배리가 거짓으로 무고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장관인 이일상과 동료들은 배리를 석방하였고, 서원리는 이를 불만으로 여겨서 효종에게 '대간의 기강이 무너졌으며, 남들이 꺼리는 일을 논의했으니 체직을 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효종은 서원리의 말을 듣고 '조양(朝陽)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할 만하다'고 칭찬했다.(<효종실록> 권10 4년 6월 4일(무술))

'조양에서 봉황이 울었다'는 말은 과감하게 직언하여 뭇 소인들을 두렵게 했다는 뜻이다. 당나라 한원(韓瑗)과 저수량(褚遂良)이 무고를 당하여 억울하게 죽었으나, 두려워서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었다. 그 후 고종(高宗)이 봉천궁(奉天宮)으로 거둥하였을 때 이선감(李善感)이 처음으로 상소하여 사실을 밝혔고, 당시 사람들이 '봉명조양(鳳鳴朝陽)' 즉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고 하였다.(<新唐書 卷105 韓瑗列傳>) 조양은 산 동쪽이며, 봉황이 우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경> 〈대아(大雅) 권아(卷阿)〉라는 시에 "봉황이 우나니 저 높은 산 언덕, 오동나무 서 있나니 저기 산 동쪽[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결국 효종의 답변은 이일상 등 다른 사람들을 소인배로 만들어버린 셈이었다.

홍문관의 처치(處置)

장령 곽지흠(郭之欽), 집의 성태구(成台耉), 지평 노형하(盧亨夏)가 효종의 답변을 듣고 인피(引避)하였다. 인피 역시 피혐과 비슷한데, 이번 경우처럼 효종의 답변을 이유로[引] 맡은 자리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서원리와 달랐다.

의금부 관리와 이후원의 배리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이는 첫째, 근래 의금부 관리들이 정작 범법자 단속은 잘못하면서 도리어 여항(閭巷)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는 여론 때문이었고, 둘째, 이후원이 대사헌 이일상에게 말한 것도 의금부 관리들이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걱정되어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대질 신문한 결과 증거가 될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둘 다 석방했던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배리 한 명을 사사로이 비호하기 위해 대관에게 청탁을 넣었다고 한다면 지나치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배리의 옷을 불태우고 그의 어미에게 장(杖)을 친 뒤인데, 이후원이 무엇하러 청탁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일로 인해 이일상도 체직을 청하였다.

결국 효종은 서원리는 다시 관직에 나오게 하고 곽지흠·성태구·노형하·이일상은 체직시켰다. 홍문관의 처치(處置)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양사 관원들의 의견이 엇갈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는 홍문관이 정리해주는데 이를 처치라고 한다. 한편 사헌부 내에서 의견이 갈려 피혐, 인혐이 있으면 사간원이, 사간원에 의견 불일치가 있으면 사헌부가 처치하는 것이 관례이다.

이렇게 되자 헌납 김시진(金始振), 정언 조구석(趙龜錫) 등은 서원리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후원의 배리가 입었던 옷을 불태우고 그 어미에게 장을 친 것은 5월 초에 있었던 일이고, 이후원이 이일상 등과 만난 것은 5월 그믐께였으니, 이미 사안이 완료된 뒤였다는 것이다. 대사간 홍명하(洪命夏)는,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꺼낸 이후원의 말을 청탁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면 서원리가 동료들과 상의해야 했다는 것이다. 원래 이를 통간(通簡)이라고 하는데, 탄핵하기 전에 사실 관계 등을 동료들과 상의하는 것이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문곡도 나섰다.

당초 이일상이 의금부 관리를 다스리려 한 것은 그가 뇌물을 받은 정상에 대해 통분스러움을 느껴 폐단을 막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서 결단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금인(犯禁人 법을 어긴 사람. 즉 이후원의 배리)에 대해서는 그 죄가 작지 않은 만큼 뇌물을 준 허실(虛實)은 논할 것 없이 법을 범하고 도망하여 숨은 죄를 적용하여 엄한 형신을 가하면서 통렬히 다스렸어야 마땅한데, 그만 뒤 폐단이 있다고 하여 끝내 석방시키기에 이르렀으니, 법관으로서의 처치가 진실로 매우 구차스러웠습니다.

따라서 서원리가 법에 의거하여 쟁집한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닙니다만, 당초에 쟁집하였으면 마땅히 끝까지 자기의 의견을 고수해야 했고 쟁집하다가 되지 않았어도 즉시 인피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구차스럽게 둘 다 석방시키자고 할 때 동의했다가 밤을 지낸 뒤에 뒤늦게 말을 꺼냈으니, 아무리 변명하려고 해도 어떻게 비난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효종실록> 권10 4년 6월 18일(임자))

아울러 문곡은 효종이 비답에서 했던 말, "나라에는 떳떳한 형벌이 있는 것이니, 관작과 녹봉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하여 보라."고 사헌부와 사간원에 내렸던 전교를 실언(失言)이라고 비판하였다. 문곡은 효종에게, 임금과 신하 사이는 정성과 믿음으로 대우해도 정의(情意)가 미덥게 되지 못할까 걱정스러운 법인데, 신하들을 작록으로 구속하고 형륙(刑戮)으로 위협해서야 되겠느냐고 따졌다.

효종은 "김수항의 소장 내용은 괴이하고 망령스럽기 그지없다. 그를 대각에 둘 수 없으니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다. 승정원에서 언관(言官)의 그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명을 거두는 듯했지만, 문곡이 다시 사직장을 올리자 체차시켰다.

효종 5년의 비극

윤7월에는 셋째 아들 창흡(昌翕)이 태어났다. 11월에는 중국에 가는 동지사 사신단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가, 다음해인 효종 5년(1654) 3월에 돌아와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사신을 다녀왔기 때문에 휴가를 얻어 양주(楊洲) 산소에 참배하였다. 이무렵 효종 연간에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가 터졌다. 인조 때 역모혐의로 죽임을 당한 소현세자 빈인 강씨(姜氏)의 신원 문제였다.

인조 당시에도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여론이 많았지만, 효종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효종 2년 3월, 조익(趙翼)이 윤방(尹昉 1563~1640)의 시호를 내려주는 문서에 '빈궁(嬪宮)'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고치지 않고, 또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앞 글자와 연서(連書)도 하지 않은 채 예조에 제출하였다. 이 시장은 이식(李植)이 살아 있을 때 지은 것을 윤방의 아들 윤순지(尹順之)가 조익에게 다듬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조익은 자신의 실수였다고 해명하였으나, 효종은 조익의 상소를 의금부로 내려 조사하게 하였다. 효종은 이 사건이 우연한 실수가 아니라 강빈 신원(伸寃 억울함을 품)의 가능성을 한번 시험하고자 하는[嘗試] 의도가 숨은 것으로 생각하였고, 조익은 삭탈관작되었다.

그러나 해를 넘겨 친청파(親淸派)로 인조 후반 조 귀인과 함께 권력을 농단해온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이 마무리될 무렵, 효종 3년 4월 부교리 민정중(閔鼎重)은 응지 상소에서 강빈 옥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문곡의 친구이기도 했던 민정중은 강빈 옥사가 김자점과 조 귀인의 모함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민정중은 기밀이라는 말과 함께 상소 내용을 첩황(貼黃)에 써서 올렸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강역(姜逆)의 옥사가 처음에 나인들 사이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조역(趙逆 조 귀인)과 김적(金賊 김자점)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항 대중들의 말에 더러 두 역적의 간교함이 위로 성상의 귀를 가리울 수도 있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것이 외인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전하께서 반드시 모두 통촉하시어 두루 살피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만일 혹시라도 그 사이에 한 가지라도 의심할 단서가 있으면, 형제의 인륜은 하늘에서 근본한 것이니 속히 신설하여 구천에 있는 영령을 위로하고 재앙(災殃)과 여기(戾氣 어긋난 기운)를 이완시키소서. (<효종실록> 권8 3년 4월 26일(정묘))

▲ 민정중의 문집 <노봉집>에 실린 〈응지소〉 일부. 문곡의 친구였던 노봉은 강빈 옥사가 억울하다고 상소했다. 그 원망이 가뭄을 초래한 이유라고 했다. 문집에 보면 '지(旨)', '상(上)', '성(聖)' 등 임금을 지칭하는 글자 앞에는 한 칸 띈다. 조익(趙翼)은 강빈을 '빈궁'이라고 하면서 임금의 경우처럼 한 칸 띄어 썼다가 삭탈관작되었다.

의심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민정중의 말은 온건하고 조심스러웠지만 행간의 의미는 분명했다. 효종도 그걸 알고 있었다. 효종은 민정중을 불렀다. 상법(常法)으로 말하면 중형(重刑)에 해당하는 발언을 했다는 위협적인 언사를 잊지 않고, 조 귀인과 김자점의 행위는 의심할 만하지만 소현세자의 장자는 나라를 맡길 인물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두 역적이 인조를 속여 강빈 옥사를 꾸밀 이유는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효종은 이 일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면담 당시에도 민정중의 상소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내비친 적이 있지만, 5월 들어 구체적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지목하여 그가 민정중을 시켜 말을 꺼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민정중의 조석윤의 외조카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효종은 강빈 옥사에 대해 재론하는 자는 역적으로 다루겠다고 하교하였다.

또 6월 영의정 정태화와 대화하는 자리에서 민정중의 상소에 대해 언급하면서, 당시에 민정중에게 불문에 부치겠다고 한 자신의 말이 경솔했다며 후회하였다. 그때 민정중을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했어야 한다는 후회였다. 이 정도로 강빈 옥사를 둘러싼 여론에 대해 효종은 민감해져 있었다
.
이로부터 2년 뒤인 효종 5년(1654) 7월 황해감사였던 김홍욱이 다시 강빈 옥사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구언 응지상소를 올렸다. 이미 효종은 강빈 옥사를 거론하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공포한 바 있었다. 아무리 가뭄으로 인한 구언 응지상소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또한 이는 강빈 옥사를 둘러싼 의혹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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