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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金弘郁)이 강빈 신원을 주장했다가 효종에게 국문을 당하였고, 결국 매를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왕정(王政)의 작동에 대해 고민할 주제를 준다. 김홍욱은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다. 관찰사는 통상 2품에 해당한다. 재상(宰相)의 반열에 속한다. 그런데도 효종은 부왕(父王) 인조, 그리고 자신과 관련하여 가장 민감한 사안을 꺼냈다는 이유로 매질을 하여 죽였다.
국가의 대국민 장악력
물론 효종 즉위 이해 강빈 신원이 누차 제기됨으로써 효종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연달아 흉년이 들었다. 군정(軍政)과 민생(民生), 어느 쪽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비극이 발생한 데는 상황의 탓도 크다.
동시에 이 비극에는 왕정 일반의 성격이 작용한 바도 있다. 왕정은 근대 정부보다 정치의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볼 때, 폭과 깊이에서 못 미친다. 정부 또는 국가의 대국민 장악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가가 국민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세금과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 기준 역시 크게 이 두 방면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조정)에서 국민에게 거둘 수 있는 세금은 직접세, 즉 전세(田稅)와 공물(貢物) 밖에 없었다. 전세는 논밭에서 나는 생산물의 일부를 내는 것이고, 공물은 지역 특산물의 일부를 현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이 둘은 요즘 말로 하면 근로소득세나 영업소득세와 비슷하다. 쉽게 말해 직접세이다. 거래세, 이자, 자동차세(통행세), 부가세 등의 간접세가 없었다. 국왕이 자비롭거나 없애려고 해서 없던 것이 아니라 파악할 수 있는 메커니즘과 기술력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카드나 현금영수증을 작동시킬 수 없던 것이다.
둘째, 국민에 대한 인적(人的) 파악 방식도 사뭇 다르다. 흔히 호적에 왜 여성은 없느냐고 항변하는 분들이 있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 관념이라고. 남성과 여성을 양(陽)과 음(陰)으로 놓는 관념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자. 호적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호적은 조정에서 군역(軍役) 등 신분에 따른 직역(職役)을 파악하기 위해서 작성하는 문서이다. 따라서 직역을 감당하지 않는 여성이 호적에 기입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은 주민등록증을 여성에게도 발급한다. 조선은 발급할 이유도 능력도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
근대 국가가 여성이나 어린이를 국민으로 파악하게 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노동력 때문이다. 서구 근대사회는 농지에서 농민을 밀어내고 노동자로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사태가 가진 의미는 간단하다. 농민은 땅과 농기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영농이거나 지주의 소작을 부쳐 먹고 살아도 적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월급 받고. 그래서 자기 땅이 아닌 남의 생산수단이 있는 공장,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력을 싸게 구입해야 이윤이 많이 남는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성인 남자보다는 여자나 어린이를 고용하여 임금을 낮춘다. 힘이 필요한 노동은 기계로 대체하여 여자나 어린이도 할 수 있도록 생산수단과 결합하는 노동을 단순화한다. 제3세계 어린이를 하루 1달러에 고용하여 축구공을 생산하는 나이키가 대표적인 예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 국가가 어린이와 여성까지 파악하고 있는 유력한 이유이다.
왕정의 상대적 약점
국가가 국민을 파악(장악)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의 조정은 현대 국가의 어떤 정부보다도 대국민 장악력이 떨어진다. 조정의 대표자인 임금의 궁궐이나 복식에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띠는 장식성이 강조되는 것은 아마 이런 상대적 약점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요즘은 누가 대통령인지 거의 다 안다. 늘 언론 매체를 통하여 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달랐다. 임금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평생 가야 특수한 신분층을 제외하면 임금의 얼굴 한 번 볼 일이 없다. 실감할 기회가 없다. 임금의 행차에 소리를 울리는 취타대, 펄럭이는 깃발, 의장을 한 멋진 기마병, 화려한 가마, 늘어선 숱한 사람들이라는 장식성이 있어야 사람들이 비로소 임금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명산(名山)에서 하늘에 제사 지낸다는 이유로 천하를 돌아다닌 것 역시 과시의 일종 아니었을까.
▲ 정조의 화성행차 재현. 종조 19년 윤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 묘역으로 참배를 떠났다. 115명의 악대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가운데, 1799명의 신하가 뒤를 따랐고 행렬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만한 볼거리가 있었을까. 이보다 더 임금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오항녕 |
하지만 대국민 장악력은 거꾸로 정부나 그 대표자인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제약이라는 동전의 다른 한 면을 가지고 있다. 굳이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국민, 국민'을 들먹이는 것은 자신을 뽑은 국민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권력 행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통령의 자의성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는 훨씬 적다. 삼권분립이나 관료제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왕정은 대국민 장악력이 낮은 한편으로 국왕을 견제될 수 있는 방법 역시 제한되어 있다. 조선의 경우 문치주의를 이끌어간 경연-언관-사관 제도는 평상시 매우 유력한 조정의 균형추로 작용하였다. 적절한 학습과 비판, 견제를 동반하면서 과도하지 않은 권력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군주가 전제(專制)하려고 작심했을 때는 한동안 이를 견제할 수단이 용이하지 않았다. 군주의 자리는 세습과 종신제라는 철벽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김홍욱이 관찰사였음에도 효종의 국문을 받고 장살 당하였던 이유가 이런 자의성의 여지가 큰 왕정의 성격 때문이었다. 연산군의 폭정, 광해군의 혼정이 10년 이상 지속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품은 생각은 전달해야
효종 5년, 김홍욱이 비명에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문곡 김수항은 한 통의 상소를 올렸다. 효종이 대비(大妃)를 위해 전각을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수리하라는 명이 떨어지자마자 여항 사이에서는 궁궐 담을 넓힌다는 이야기가 떠들썩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에 듣고는 근거 없는 뜬소문을 통탄했습니다만, 얼마 안 있어 담을 물려 쌓는다는 논의가 경연에서 나오고 보니 과연 전에 들었던 소문과 일치했습니다. 신은 이 공사를 그만두지 않으면 온 사방 사람들이 놀라고 수군댈 것이니 소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궁(法宮 왕이 머무는 궁궐)의 담장은 그 자체로 규정된 범위가 있으니, 조종(祖宗)에서 제도로 정한 뜻은 우연이 아닙니다. 열성(列聖)께서 이어오시며 한 번도 규정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수백 년 뒤에 와서 지금 갑자기 이런 공사를 하시면 아무리 담장을 밖으로 한 걸음만 물리는 일이라도 마침내 담장을 넓히는 데로 귀결될 것입니다." (<문곡집> 권8 '궁궐 담장을 넓히고 전각 짓는 일을 취소하도록 청한 상소' 을미년(1655, 효종6) 請寢恢拓宮墻修造殿閣疏 乙未)
문곡은 상소를 올리면서 "품은 생각이 있다면 진실로 숨김없이 다 진달해야지 어찌 감히 두려워하고 어물거리며 군부(君父) 앞에서 외면하겠느냐"고 말하였다. 그것이 '충(忠)'이라는 말이다. 충의 의미를 당시 사람들은 '자신을 다하는 것[盡己之謂忠]'이라고 풀었는데, 그 충이 국왕의 처사에 대한 비판의 논리로도 기능하였다.
효종이 담장을 수리하게 된 이유는 자전(慈殿 대비)에 대한 효심 때문이었다. 문곡도 그것을 알기에 "군자(君子)는 천하를 위하여 그 어버이에게 검박하게 하지 않는다"(<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는 말을 들어 취지에 동의하였다. 그러므로 전각(殿閣) 하나를 영건하여 대비가 있을 장소로 삼는 일이야말로 오히려 신하된 사람들이 당연히 찬성할 조치라고 생각하였다. 중국 한나라 때 있었던 장락궁(長樂宮)의 봉양은 칭찬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장락궁은 궁전 이름인데, 혜제(惠帝) 이후로 장락궁에는 항상 모후(母后)를 모셨기 때문에 대비에 대한 효성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당시 연달아 흉년이 들고 재정이 바닥난 시기는 태평하고 풍요로운 시대와는 다르기 때문에, '때가 어려운데 일의 비용은 많이 쓴다[時屈擧贏]'(<사기> 권45 '한세가(韓世家)')는 옛 말을 생각하라고 진언하였다. 이때 담장을 넓은 것은 전각을 짓기 위해서였는데, 전각은 2백여 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 KBS 드라마 <추노>. 도망간 노비를 쫓는다는 주제는 효종 중반 공권력이 추진했던 노비 추쇄와 꼭 닮았다. 노비 추쇄는 민심만 소란케 하고 효과 없이 끝났다. ⓒKBS |
효도도 시기가 있다
민생은 매우 영세한데 중국 사신이 잇달아 오고 있었으므로 사신을 맞이해야 했다. 또 안으로는 노비 추쇄(推刷)가 한창이어서 원성이 도로에 널린 상황이었다. 언젠가 <추노(推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노비 추쇄이다. 도망가거나 불분명하게 주인이 바뀌거나 한 노비를 찾는 일이었는데, 공노비를 확보하여 노비로 된 군대인 속오군(束伍軍)을 정비하려는 계획이었지만 민심만 흉흉하게 만들고 실효 없이 끝난 정책이었다. 수십 년 전에 변동된 신분을 되돌리려는 것은 증거로 보나 사세로 보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때에 또 토목 공사를 일으키면 먼 곳에 사는 백성들은 조정에서 자신들의 고통은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여론이 생길 참이었다. 아무리 효종이 백성에 대한 부역을 경계하더라도 수백 칸을 건축하자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주현(州縣)의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떠맡기고 독촉할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결국 부역 견감은 형식적인 공문으로만 그칠 것이다.
그런데 사안이 대비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웠다. 문곡은 오히려 대비를 위해 부득이 시작했지만 백성들의 힘을 손상시키고 사방의 논란을 초래한다면 위로 자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 주상의 효성을 다하는 방도가 아닐 것이라고 효종을 설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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