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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엄친아'가 '돈'을 걱정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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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엄친아'가 '돈'을 걱정한 이유?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대제학이 걸었던 길①

☞연재 지난 기사 바로 가기 : 트위터 시인? 16세기 조선에선 '일기=시'였다!

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①


효종은 즉위 초반 나라를 바로잡고 부강하게 하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다소 편협한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조정에서는 외척이나 관료가 중심이 되었고, 군비나 노비추쇄처럼 민생과 배치될 수 있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특히 김홍욱 장살 사건을 전후로 공론정치의 틀이 무너지면서 효종에 대한 조야의 신뢰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효종 7년(1656)에 올린 문곡의 상소는 이런 시점에서 나왔다. 이후 송시열, 송준길, 윤휴, 허목 등 재야의 학자들도 조정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효종 8년, 9년의 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중흥의 기운이 돌던, 효종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려던 효종 10년 3월 효종이 세상을 떴다. 그리고 현종이 즉위하였다.


죽음과 역사


사람의 죽음은 대개 불현듯 찾아온다. 하긴 몇몇 도가 튼 분을 빼고 누가 언제 죽을지 알겠는가. 그래서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의 측면과, 그게 언제일지 모른다는 우연성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필연성과 우연성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고 싶지 않은데도 죽는다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숙명성도 포함되어 있다.


가끔 역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진다. 민중의 힘, 지도자의 힘이라는 다소 교과서적인 답변을 하는 학생도 있고, 기후나 환경이라는 자연과학적 접근을 하는 학생도 더러 있다. 딱히 계량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누가 죽는 것이라고 답변한다.


나의 역사는 내가 죽음으로써 대체로 정리된다. 누가 내 일기를 대신 써줄 것도 아니고, 나의 삶은 더더구나 대신할 수 없다. 사실 한 사람의 인생사만이 아니라 가족사도, 어떤 단체의 역사도 그러하다. 가까이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라는 서당(書堂)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 물골에 있는데,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께서 설립하셨다. 수천 년에 걸친 동아시아 역사를 공부하려면 한학(漢學)이 필수 소양인데, 사회의 변변한 지원도 없을 때 당신께서 벌어 장학생을 뽑아 가르치셨던 곳이다. 이후 한림대학교에서 인수하여 지금까지 정규 졸업생만 200 명이 넘는 학자를 배출하였다.

당시 한림대에는 윤덕선 이사장님이 계셨고, 청명 선생님의 뜻에 크게 공감하여 태동고전연구소를 한림대에서 인수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학자가 양성될 수 있도록 명문화하였다. 그러나 청명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윤덕선 이사장님도 돌아가시면서 이제 한림대에서는 태동고전연구소를 더 이상 운영하지 않겠다고 발을 뺐다. 결국 올해 서당은 신입생을 선발하지 못하였다. 이 역시 사람의 죽음이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더 큰 규모의 사회나 나라도 사람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초래하는 변화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거듭 말하지만 계량이 가능하거나 항상 옳은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죽음이라는 것, 역사 변화의 주요한 원인이자 힘이다. 아무래도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 않은가.


최연소(?) 대제학


1662년(현종3) 4월 문곡은 대제학이 되었다. <현종개수실록>에는 "김수항을 양관 대제학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이때 나이 34세였다.[特敍金壽恒拜兩館大提學. 時年三十四]"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관은 예문관과 홍문관을 말한다. 예문관은 묘한 관청인데, 원래 외교문서를 비롯하여 국왕의 교서 등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던 곳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 관제 개편 과정에서 7, 8, 9품 관원만 실직으로 남고 나머지는 겸관으로 되어 버렸다. 실직으로 남은 7, 8, 9품 관원이 바로 실록을 편찬할 때 제일 중요한 자료인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사관이다.


그러니까 하급 관원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관서 이름은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렸다. 임무가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니까 춘추관 소속이 되어야 하는 사관은, 정작 춘추관에는 겸임관으로 되어 있고, 실제 직제는 예문관 소속이 되었던 것이다. 이래도 제대로 기능을 했으니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조선 초기 직제변화의 특징 중 하나이다. 아마 집현전(홍문관)이 설치되면서 예문관의 기능이 중복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제도사 얘기 오래하면 머리 아파하는 분들이 많으므로 이쯤하고, '양관' 대제학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차피 관례적으로 두 관청의 대제학을 겸하게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대제학'에 방점이 찍히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제학을 문형(文衡)이라고 하는데, 문형이란, 학자 또는 문장의 저울(기준)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명예로운 관직이었다. 대제학은 대제학에 대한 연구가 많지는 않지만, 조선시대가 '학자-관료'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비중을 가늠하기 쉽다. 대체로 대제학은 일단 맡게 되면 종신토록 담당하였다. 죄를 짓거나 상중에 물러났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지나면 다시 맡게 배려하였다.


필자는 아직 조선시대 대제학의 평균 연령을 조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문곡의 34세가 대제학 최연소 나이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실록에 특별히 문곡이 34세 때 대제학을 맡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무척 젊은 나이에 대제학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시경> 강의


흔히 '엄친아'라고 하지만, 가끔 문곡에게서 그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집안 좋고 똑똑하고 장원급제에, 젊은 나이에 대제학까지, 더구나 아들들도 줄줄이 번듯하게 낳으니……. 물론 문곡은 아내가 깰까봐 벽을 보고 숨죽여 울면서 자식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엄친아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대제학은 맡은 사람은 대개 주된 관력이 홍문관 출신인 경우가 많다. 문곡도 그러하였다. 그렇다고 줄창 공부만 한다거나 글만 잘 짓는 것이 대제학의 재목은 아니다. 지금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나라가 어떻게 가야 많은 사람이 행복할지 고민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고민하였다. 그것을 경세(經世)라고 불렀다.


아직 신진 관료였던 1654년(효종5) 문곡은 경연에 시독관으로 참여하였다. <시경(詩經)> '은기뢰(殷其雷)' 장(章)과 '표유매장(摽有梅章)' 장을 강론하였다. '은기뢰'는 부역을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부인의 마음을 읊은 시이다. '표유매장(摽有梅章)'은 혼기(婚期)를 놓쳐 버릴까 두려워하는 여자의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이다.


우르릉 꽝 우레 소리 殷其雷
남산 남쪽에서 울리는데 在南山之陽
부역 나간 우리 낭군 何斯違斯
어찌 조금도 휴가가 없나 莫敢或遑
씩씩하고 듬직한 우리 낭군 振振君子
돌아오소서, 돌아오소서 歸哉歸哉


부역은 곧 군역(軍役)이다. 특히 먼 변방으로 차출되어 나가 고생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을 읊은 시이다. 요즘으로 치면 전방으로 군대 간 남자친구를 그리워하며 걱정하는 시이다. 네 번째 구절이 '못 쉬시나[莫敢遑息]', '못 오시나[莫敢遑處]'로 변주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더해가는 노래이다.


화폐 유통 정책


강론이 끝나자 문곡은 서도(西道), 즉 평안도에 갔을 때 보고 들었던 일을 아뢰었다. 평안도 각 고을 백성들이 모두 돈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을 보고, 문곡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상평청(常平廳)에서 새로운 법을 시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각각 50전(錢) 씩을 차고 다니도록 하였는데, 차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때 문곡은 묻는다. "돈이라는 샘물처럼 흘러서 멈추지 않아야할 재물인데 어찌 차고 다닌다는 말입니까. 돈을 유통시키는 것이 아무리 좋은 법이라고 해도, 백성들이 하고자 하지 않는데 어찌할 것입니까. 더구나 소위 행전별장(行錢別將)이라는 것도 폐단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효종은 이 의견을 행전청(行錢廳)에서 의논하도록 하였다.


행전청은 상평청을 말하고, 행전별장은 상평청에서 파견한 별장을 말한다. 상평청에서는 동전 유통을 통하여 백성들의 물물교환을 편리하게 바꾸겠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효종실록 2년 4월 24일>) 그리고 별장을 파견하여 동전 유통의 기준을 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민폐가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것인 삼분모곡(三分耗穀)이다. 삼분모곡은 인조 15년부터 청나라 사신의 접대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팔도 모곡의 10분의 3을 징수하는 제도였다. 모곡은 원래 곡식을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원곡(元穀)과 함께 받는 이자 같은 곡식이었다. 이 모곡의 값을 동전으로 계량하는 과정에서 강압적으로 추진하면서, 민간에서는 백성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조(昏朝) 때의 조도 별장(調度別將)이 다시 왔다"고 했다고 한다. 혼조는 광해군 때이고, 조도별장은 광해군 때 궁궐 짓는 비용을 긁어모으기 위해 전국에 파견된 세금 징수관이었다.


대동법과 화폐


화폐 사용을 적극 추진한 인물은 영의정 김육(金堉, 호는 잠곡(潛谷))이었다. 잠곡은 대동법의 시행과 관련하여 화폐 유통에 적극적이었다. 대동법 자체가 현물 납부가 아닌 쌀로 내는 것이었고, 쌀은 이때 현물의 의미가 아닌 화폐의 성격이었다. 즉 다른 현물의 가치를 표상해주는 등가물(等價物)이었다. 그렇지만 쌀이라는 등가물은 유통할 때 썩기도 했으므로, 더 나은 방식을 찾은 것이 동전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화폐 사용을 새로 추진했다기보다 '동전' 사용을 권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잠곡의 정책대로 상평청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동전 사용을 독려하였다. 그래서 평안도 지역에서는 돈[錢]으로 형벌을 면제 받을 때도 돈(동전)이 상당히 쓰이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효종실록 2년 11월 13일>)

대동법을 주관하던 선혜청에서는 경기에서 대동미(大同米)를 화폐로 대신 징수하는 것이 편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경기 지역 백성들이 땔나무나 채소·과일류를 서울 시장에 팔려고 내놓을 때, 시민들이 곧장 돈을 내고 사가게 하면 쌀을 내야 되는 어려움이 없게 될 뿐더러 쌀을 운반하는 폐단도 덜게 됩니다. 여기에 본청이 또 돈을 주고 쌀을 사들이면 공사(公私)간에 교역이 끝없이 순환될 것이니, 촌구석의 어리석은 백성들도 화폐 사용의 이점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정 돈을 써보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니, 이번 봄부터 경기 백성에게 징수하는 쌀 가운데 8분의 1을 덜어내어 화폐로 대신 징수하게 하십시오."(<효종실록 3년 2월 1일>)

당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동전 부족으로 야기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선혜청과 상평청의 원안대로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곡의 문제제기는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백성들이 불편하다


문곡이 동전을 유통시키는 폐단을 말한 뒤, 상평청에서는 좌의정 김육의 의견이라며, "김수항이 일방적으로 다른 의견만을 들었다."라고 반론하였다. 이에 문곡이 상소를 올려 반론하였다.


"신이 평안도에 왕래할 적에 각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돈을 허리에 차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도처에서 익히 보았고 그 폐단을 익히 들었으니, 수령들만 그런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별장(別將)은 마을을 제멋대로 다니면서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서, 그중에 혹간 돈을 차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채찍질을 가하고 또 속전(贖錢, 벌을 면제하는 대가로 받는 벌금)을 징수한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민간에서 별장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들 도망하여 숨어버리니, 이와 같고도 돈을 유통시킨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서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돈을 유통시킨다는 말을 들었는데, 평안도의 경우는 단지 돈을 차고 다니는 것만 보았을 뿐이고 실제로 유통되는 모습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효종실록 5년 4월 2일> <文谷集 권8 論事被斥辭職疏 甲午>)


문곡은 결국 자신이 수령들의 말만 믿고 사실도 아닌 일을 조정에서 말한 꼴이 되었다면 사직을 청하였다. 정말 쌀이나 포보다 운반이나 소모가 적을 것으로 예상하고 시행한 동전 유통은 백성들에게 불편하였을까, 편리하였을까? 나아가 동전 사용은 당시 조선사회에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조선사회의 '동전'


그동안 학계에서는 조선후기 화폐(동전) 사용을 중세봉건사회의 해체=근대사회로의 진보를 보여주는 징표로 해석해왔다. 말하자면, 중세 유럽 지대(地代)의 변화, 즉 노동지대→현물지대→화폐지대로 변화하면서 봉건제가 해체되었던 경험을 가져다 조선시대를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매우 피상적인 접근에 불과하다.


우선 이런 견해가 딛고 있는 전제는, 현물경제에서 화폐경제를 거쳐 신용사회로 변화했다고 보는 단계론적 사고이다. 근대로의 이행을 논의할 때 여러 가지 단계론이 나오지만, 이는 화폐 발전 단계론이라고 할 만하다. 이미 인류학의 많은 연구가 보여주듯이, 원시사회 초기부터 신용 경제가 먼저 등장하고 이후 화폐경제가 생겼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보면 현물경제에서 화폐경제로, 화폐경제에서 신용경제로 가는 길이 진보라고 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 사회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것일 뿐이다.


둘째, 화폐를 유통수단이라는 측면에서만 파악한 오류이다. 화폐는 ① 가치척도의 기능을 한다. 옷 한 벌은 쌀 한 말, 고기 한 근은 쌀 한 되 ……라고 하면, 쌀이 다른 물품의 등가물이 되어 화폐의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 호조에서는 '탁지준절(度支準節)'이라고 하는 일종의 물가표를 만들었는데, 그 기준이 포와 쌀이었다. 즉 쌀과 포가가 다른 물건의 등가물, 즉 화폐였다. 우리는 상품의 이마에 붙어 있는 가격을 보고 그것의 가치를 알아본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경험의 소산이다.


② 화폐는 지불 수단이기도 하다. 경제활동에서는 신용(信用)이고, 이때는 흔히 화폐 대신 채권의 형태를 띤다. 화폐가 일반적인 상품이 되는 것이다. 통상 우리가 접하는 바로는 세금을 내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 상품 생산이 일정한 수준을 넘게 되면, 지대나 조세 등은 현물 납부에서 화폐로 납부하는 금납제로 바뀐다. 아마 기존 연구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여 조선후기의 변화를 읽어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로마제국에서 모든 공납을 화폐로 징수하려는 시도가 두 번이나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해했어야 했다. 이 변화가 생산과정의 전반적인 조건에 따라 얼마나 심한 제약을 받을 수 있는지를 고려했어야 한다.


▲ 화폐들. 화폐는 보이는 모습대로 화폐가 아니다. 지불수단일 때와 유통수단일 때의 조건과 기능이 다르다. 조선사회는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 즉 동전에 저항하는 사회였다. 화폐에 대한 통찰은, 고병권의 <화폐, 마법의 사중주>(그린비 펴냄) 참고. ⓒeofdreams.com

아시아, 특히 조선에서는 국세의 주 수입원을 이루는 지대가 현물형태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의 안정된 자연조건 때문에 변함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생산관계에 기초한 것으로, 그러한 지불형태(현물형태)는 거꾸로 현재의 생산형태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카를 마르크스, 강신준 옮김, <자본Ⅰ-1>(도서출판길 펴냄, 2008, 215~217쪽))


화폐에 대한 혼동


③ 화폐는 유통수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에서 '주화'가 발생한다. 앞서 선혜청과 상평청에서 시도한 바가 유통으로서의 주화, 곧 동전(銅錢)이었던 점을 상기하면 된다. 주화는 원래 언제든 동일한 무게의 금속과 교환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유통되면서 마모되었다. 자연적 마모, 몰래 갉아먹는 사람쥐들의 마모. 거기서 가치척도로서의 금과 유통수단으로서의 금의 괴리가 나타난다. 이제 동전은 더 이상 쌀처럼, 어떤 상품의 실질적 등가물이 아니다.


자, 이제 다 왔다. 잠곡을 비롯한 동전 유통론자들은 첫째, 대동미=세금은 화폐의 지불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로 혼동한 것이었다. 문곡이 지적했듯이, 막상 유통의 편리를 위하여 동전을 시행했는데 백성들이 유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누구의 말이 맞느냐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유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금으로 내는 돈과, 물건을 사고파는 수단으로서의 돈은 같은 돈이면서도 다른 돈이라는 사실을 조선시대 당시 동전 유통론자는 물론, 조선시대 화폐를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공동체와 화폐의 투쟁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사용은 통상 같은 공동체 내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모내기철이 되어 품앗이를 하는 마을이 있을 경우, 그 마을에서는 화폐를 쓸 일이 없다. 돌아가며 해주면 그만이다. 결국 다른 집단의 성원들과 만날 때만이 화폐가 필요하다.


유목민족이나 상업민족들이 화폐형태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그들이 공동체 '사이'의 공간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의 노동력이나 상품을 살 때만이 화폐가 필요한 것이다. 화폐는 계약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상업적 교환이 일반화된 사회, 화폐가 일반적 교환수단의 역할을 하는 것은 결코 전통적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발전 결과물이 아니다. 공동체의 발전이 아니라, 공동체의 몰락이 화폐의 통용을 가능케 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사회계약론은 '원자처럼' 고립된 개인을 전제한다. '계약'은 당대 상인들의 '계약'을 모델로 했을 것이다. 화폐 그 자체가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는, 즉, 화폐가 시장을 통일하지 않은 곳에서는, 화폐가 공동체들을 해체해야 한다. 즉 돈을 쓰지 않는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돈을 쓰는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따라서 조선사회가 마을 수준의 공동체적 성격을 유지하려고 하는 한,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인 동전 사용 정책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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