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부처인 외교통상부에서 13일 '협상 타결'을 선언한 뒤, 정부와 일부 언론은 한-EU FTA가 우리 경제에 미칠 긍정적인 효과를 선전하기에 바쁘다. 또 캐나다, 인도 등 벌써부터 '다음에 타결될 FTA는 어디냐'를 찾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협상 타결'은 어디까지나 한국 안에서만 통용되는 사실이다. 협상 상대였던 스웨덴 정부와 외신이 전하는 유럽의 분위기는 다르다. 또 외교부는 한-EU FTA 발효시기에 대해 "내년 상반기"로 예상했지만, 이 역시 27개국이 회원국으로 구성된 EU의 특수성을 무시한 한국의 일방적 기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협상에 독소조항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동의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이를 구체적으로 따져볼 수 있는 협정문은 우리 정부가 9월께로 예상하는 협정문에 대한 '가서명'이 끝난 뒤에나 공개될 예정이다.
성과 부풀리기 의혹 1 : 타결 여부
이 대통령이 EU 의장국인 스웨덴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13일 저녁이다. 하지만 정상회담 전부터 한-EU FTA 협상 타결은 국내에서는 기정사실화 돼 있었다. 이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떠난 직후부터 이번 순방 기간 중 한-EU FTA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얘기가 정부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은 13일 오전 나간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이번 유럽 순방은 여러 정상들과 만나 한-EU FTA에 대한 최종합의를 도출하는 데 큰 목적이 있다"며 "다행스럽게 몇 개 나라의 반대로 오래 끌어왔던 한-EU FTA가 합의점에 도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저녁 스웨덴 레인펠트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EU FTA 협상의 모든 잔여 쟁점에 대한 최종합의안이 마련된 점을 환영했다"며 "우리 두 정상은 한-EU FTA의 조기 가서명을 위한 절차가 신속히 진행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이날 '한-EU FTA 협상 타결'을 선언하는 브리핑을 가졌다. 청와대 김은혜 부대변인도 이날 "FTA 협상의 마지막 걸림돌을 외교력으로 돌파해 결국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하면서 협상 타결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협상 대상인 스웨덴과 유럽의 얘기는 다르다. 레인펠트 스웨덴 총리는 정상회담 기자회견 자리에서 "스웨덴이 의장국을 맡고 있는 동안 (올 12월까지) 한-EU FTA가 타결되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 EU 의장국 사이트(www.se2009eu/eu)에 오른 보도자료도 "유럽연합 27개 회원국과의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협상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Negotiations on the free trade agreement with the EU's 27 Member States now continue)"고 밝혔다. 협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외신들의 분위기 역시 한-EU FTA는 끝났다고 보기 힘들다. <뉴욕타임스>, <AP> 등도 레인펠트 총리 발언에 더 무게를 두고 보도했다. (관련기사 : 靑, '에릭슨 파문'에 이어 한-EU FTA도 '뻥튀기'?, '한-EU FTA 협상 타결 발표'의 진실)
이런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와 외교부의 입장은 변한 게 없다. EU는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협상 타결 시점을 판단하는 게 시각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협상 타결 선언의 권한은 EU집행위원회에 있기 때문에 스웨덴은 협상 타결 여부를 결정지을 수 없으므로 우리보다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EU는 협정문을 확정짓는 '가서명'을 '협상 타결'로 보고 있다는 것.
또 우리 정부는 양국 통상장관이 한-EU FTA의 협상 타결을 확인하는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시각으로 13일 밤늦게 나온 공동발표문은 "(양국의 장관이) 잔여 쟁점에 대한 최종합의안(a final compromise package)을 환영한다"고 되어 있어 정상회담 결과와 다를 게 없다.
공동보도문의 '콤프러마이즈'(compromise)란 표현도 논란거리다. 송기호 변호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대외 조약과 관련 협상이 타결될 경우 영문 공동발표문에서는 '종결'(conclude)이나 '합의'(agreement) 같은 단어를 쓴다는 것.
정부의 석연치 않은 해명 때문에 한-EU 협상 타결 여부는 정치 쟁점으로 번졌다. 민주당은 16일 "청와대가 대통령의 성과를 과장하기 위해 앞질러 과장했다면 진솔하게 진상을 밝히고 사과하는 게 맞다"며 청와대의 해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 <뉴욕타임스>(인터넷판)에 실린 한-EU FTA 관련 기사. ⓒ프레시안 |
성과 부풀리기 의혹 2 : 발효 시기
이혜민 외교부 FTA 교섭대표는 13일 브리핑에서 한-EU FTA가 "사실상 타결됐다"고 밝히면서 "8월말까지 두 차례 법률검토 작업 을 거친 후 가능한 한 9월초까지 가서명을 마무리할 계획"이라며 "협정문 정식서명은 내년 1-2월 가능하고, 이후 국내 비준과 EU 의회 승인 절차를 생각하면 내년 6-7월에 발효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주장대로 협상이 타결됐다 할지라도 실제 FTA가 발효되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이 남아 있다. 정권 교체 등 정치적 일정을 감안하더라도 지난 2007년 3월31일 협상이 타결된 한미 FTA도 아직 양국 모두 국회 비준 절차를 넘어서지 못했다.
27개국을 회원국으로 하는 한-EU FTA는 양국간 FTA보다 더 복잡하다. 특히 국가별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이 있을 수밖에 없어 공식 발효까지 넘어야할 '산'은 더 많다.
우선 EU 집행위는 법률 검토 작업을 갖고 영문본 협정문을 확정하게 된다. 이 영문본 협정문에 가서명을 한 뒤, 이 영문본 협정문은 23가지 언어로 번역된 뒤 회원국들의 정식 서명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협정문 번역에만 3-4개월이 걸릴 전망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한국과 EU가 협정문에 정식 서명하면 국회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국은 국회, 유럽은 EU의회와 회원국 각국 의회에 상정해 비준을 얻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쪽이라도 비준이 안 될 경우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의회 비준을 받으면 협정문은 대통령 재가를 받아 양측이 동시에 발효한다는 협정문을 상호 교환한 뒤 60일 후에 본격적인 효력이 생기게 된다.
이런 과정을 감안하건대 우리 정부가 밝힌 '내년 6-7월 발효'는 모든 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을 때나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유럽 쪽의 정치 일정을 감안할 때 이는 거의 불가능한 얘기다.
현재 EU의 최대 관심사는 리스본 조약이다. EU가 정치공동체로 나가기 위한 '미니 헌법' 성격을 띠는 이 조약은 지난 2007년 10월 리스본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27개 회원국 정상들이 최종합의하고, 그해 12월 공식 서명한 조약이다. 현재 회원국 각국의 의회 비준 절차를 밟고 있는 이 조약은 회원국 전체가 찬성해야 발효된다. 하지만 2008년 6월 유일하게 국민투표를 실시한 아일랜드에서 부결된 상태다. 따라서 한-EU FTA는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 독일의 총선이 9월에 예정돼 있고, 10월에는 EU 집행위원들이 교체되는 등 정치 일정도 한-EU FTA 처리를 뒤로 미루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현재 벨기에 브뤼셀의 한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프레시안> '키워드 가이더' 강성진 씨는 "한-EU FTA의 비준 및 발효 시기를 섣불리 예측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관련글 보기 : 한-EU FTA가 EU에서 비준되기까지)
이해영 한신대 교수도 "EU의 정치상황을 감안하건데 내년 상반기 발효는 불가능한 얘기"라고 말했다.
성과 부풀리기 의혹 3 : 독소조항이 없다?
이혜민 교섭대표는 13일 한-EU FTA에 "독소조항은 없다"고 주장했다. 한미FTA에서 독소조항으로 지적받았던 래칫조항(역진방지조항), 투자자-국가제소(ISD) 조항 등이 빠졌다는 것.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도 16일 KBS라디오에 출연해 "개방할 수 있는 분야를 나열하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하자고 정리가 되면서 역진 방지조치는 제외됐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과연 '독소조항'이 없을까? 아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이 '미래 최혜국 대우'다. 양측이 다른 국가와 추가로 FTA를 체결해 더 많은 개방을 약속하면 자동적으로 협상 상대방에도 적용되도록 한 조항을 뜻한다. 한국 정부가 추가적인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방 수위가 높아질 때마다 미국, 유럽 등에 대한 개방 수위도 자동적으로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정부 관계자는 EU 측이 "한-미 FTA에서 미국이 얻어낸 수준은 기본으로 열고 추가 논의를 하자"는 이른바 '코러스 패리티(KORUS Parity)'를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한-미 FTA보다 개방 수준을 낮출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가능성, 금융 세이프 가드 기간을 6개월로 줄인 대목 등도 문제로 지적된다. (관련기사 : 한-EU FTA 타결…"오직 재벌을 위한 협상")
정부가 "협상 타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까지 한-EU FTA 협상은 '비밀'스럽게 진행돼 왔다. 한미FTA는 국회 특위 활동이나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감시와 견제 활동이 있었지만 한-EU FTA는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까지 철저히 정부가 알아서 해왔다. 정부는 9월 가성명 이후 협정문 전문을 공개한다는 입장이지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지난 14일 협정문 전문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독소조항' 포함 여부를 비롯해 협정이 한국경제에 미칠 구체적인 영향을 협정문이 공개돼야만 제대로 논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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