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실험 이후 소위 범여권의 정치적 흐름은 DJ 노선이냐 아니냐를 준거로 확연히 갈라졌다. 특히 열린우리당 대선주자들이 잇따라 군불을 때고 있는 '통합신당론'에는 공통적으로 'DJ 노선'을 등에 업은 노무현 배제론이 녹아 있다.
우리-민주 'DJ 뿌리' 확인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메시지는 우선 북한의 핵실험 직전에 이뤄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분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대선 때) 찍어준 사람들에게 승인받은 적이 없다. 표 찍어준 사람들은 그렇게 바라지 않았다"고 분당 책임론을 거론한 것에서 확인된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개입성 발언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정치권에선 양당이 다시 합치라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북한의 핵실험이 터지고 난 뒤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도마에 오르면서 김 전 대통령의 행보는 더욱 주목받았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햇볕정책' 적자 경쟁은 역으로 두 당이 한 뿌리임을 확인해줬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전쟁불사를 주장하는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대연합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이 대선정국의 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한나라당의 햇볕정책 비판을 성토했다. 양당이 각각 정계개편의 중심을 자부하며 줄다리기를 하고 있긴 하나, 김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가 확인된 셈이다.
특히 열린우리당의 양대 주주인 김 의장과 정 전 의장이 잇따라 우리당 창당 실험의 실패를 자인한 대목은 김 전 대통령의 분당 책임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시각이 많다.
김 의장은 23일 "민주당 지지자들이 분열된 것이 비극의 씨앗이라는 김 전 대통령의 지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고, 정 전 의장은 24일 "민주세력이 분열된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천정배 의원도 지난 7월 "조순형과 추미애, 나아가 한화갑 대표를 끌어안지 못한 것이 이 정권의 한계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DJ 노선'=脫노무현
북핵 사태를 통해 윤곽을 드러낸 이같은 흐름은 곧바로 정계개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리모델링이건, 제3의 공간에 새로 집을 짓건 'DJ 햇볕정책'을 고리로 한 통합신당이 필연적 흐름으로 굳어진 셈이다. 이 움직임의 핵심은 '탈(脫)노무현' 현상이다.
특히 햇볕정책은 여권이 한나라당에 맞설 수 있도록 정당성을 부여해준 거의 유일한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지켜내지 못한 노 대통령과 우리당 대권주자들의 차별화 수순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 역시 외피는 김 전 대통령이 제공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당일 "현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무리하게 강행해 수많은 희생을 냈다"고 말했었다. 또한 핵실험 이후 청와대에서 대북 포용정책 수정론이 제기되자마자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햇볕정책으로 긴장이 완화됐으면 완화됐지 나빠진 게 없다. 그런데 어떻게 포용정책 수정을 말하느냐"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그 뒤 천정배 의원은 "북한의 핵실험 사태를 불러온 것은 포용정책이 아니라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족"이라고 비판했고, 김근태 의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의 대북송금 특검 수용을 "남북관계 신뢰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같이 전례없이 직설적인 김 의장과 천 의원의 발언은 고건 전 총리, 정동영 전 의장이 주춤한 사이에 호남의 대표주자 자리를 햇볕정책 계승 의지를 통해 장악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고건-한화갑 자충수?
한편 우리당 대권주자들의 탈노무현 현상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고건 전 총리와 한화갑 대표가 DJ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고건 전 총리는 북한 핵실험 당일인 지난 9일 "평화공존 구도를 뒤흔든 폭거"로 규정하며 "온정적인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선을 긋자는 차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모양새가 됐다. 이에 따라 호남이 정치적 기반인 고 전 총리로서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 전 총리는 9일 발언 이후 북핵 문제와 관련한 언급을 삼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당 내에선 아직까지 고 전 총리도 반(反)한나라당 전선의 완성 차원에서 함께 가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하다. 고 전 총리가 여전히 20%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무시 못할 변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햇볕정책을 보는 시각 등 노선의 적합성 여부와는 무관한 공학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우리당 관계자들은 대체적으로 고 전 총리가 독자행보를 할 수 있는 지지율의 마지노선을 15%로 본다. 그 이하로 떨어지면 고건 변수가 급속히 자동 해체되거나, 오픈프라이머리의 틀 내로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결국 우리당은 북핵 정국에서 엉뚱한 길을 택한 고 전 총리의 지지율 추이를 살피며 당분간 그와의 통합 논의에 소극적으로 임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북핵 정국의 고비에서 김 전 대통령과 엇박자를 냄으로써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미국과의 대북 제재 공조"를 강조한 한 대표의 주장에 호남여론이 반발했고, 민주당 내에서도 심재권 전 의원 등이 "햇볕정책의 기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한 대표는 궤도 이탈 나흘 만에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햇볕정책을 발전시켜야 한다"며 원위치했다. 그러나 한 대표의 오락가락한 행보는 재보선 이후, 특히 조만간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정치자금법 위반사건 관련 대법원 확정판결 이후의 상황을 염두에 둔 사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눈총을 받고 있다.
DJ 정치장악 어디까지…
DJ를 중심으로 한 이같은 범여권의 질서 재편 흐름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재보선 직후인 오는 28일부터 이틀간 김 전 대통령의 목포 방문이 예정돼 있어 호남발(發) 'DJ 메시지'가 나올지 주목된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내달 2일에는 연세대가 주최하는 김대중 도서관 후원 행사에 참석한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8일부터 이틀간 부산으로 날아가 유엔 아태경제사회이사회(ESCAP)의 교통장관회의 개막식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다. 11월 중순에는 충남 공주대 특강을 계획해 놨다.
내외신 기자회견과 함께 전국을 누비는 김 전 대통령의 이같은 종횡무진 행보가 한동안 정치권 초미의 관심사가 되면서 향후 정치구도의 풍향계 노릇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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