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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은 '100년 정당'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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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은 '100년 정당'이 될 수 있을까?

[정치 깊이 읽기] 노 대통령의 탈당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9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만찬 회동에서 "절대 탈당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그의 탈당 문제는 당분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으로 보인다. 이날 만찬에서는 탈당 문제뿐만 아니라 부동산 정책 등과 관련해서도 모처럼 한 목소리가 나왔다. 노 대통령이 당의 건의를 수용하는 모양새였다.
  
  이처럼 5.31 지방선거 참패 후 노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첫 만찬 회동은 일견 당-청 갈등이 봉합되는 자리였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노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각각 14%, 12%를 확인된 상황은 공멸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음직하다.
  
  그러나 이날 회동으로 노 대통령 5년 임기의 반환점에 해당하는 지난해 7월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 이후 줄곧 제기되어 온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탈당 가능성은 과연 완전히 해소된 것일까? 또 당-청 간의 고질적인 갈등은 완전히 봉합된 것일까?
  
  최근 여권 내부의 물밑 논의에서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해 온 이 두 가지 현안이 모두 부인된 현 상황 자체가 이 두 가지 문제의 새로운 전개를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새로운 가능성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대주주 이탈'의 최근 한국정당사, 성공인가 실패인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관계를 그 근원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2004년 열린우리당 창당 1주년 축하 메시지에서 "우리나라에서도 100년 정당을 만들어보자"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노 대통령은 29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만찬 회동에서도 "절대 탈당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는 동시에 그 '유서 깊은 정당'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책임 있는 정치를 하려면 역사와 유서가 깊은 정당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그런 정당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창업주로서 이 정당에 대해 갖고 있는 애착을 거듭거듭 강조했던 셈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사에서 정당은 선거를 치르기 위한 도구로 활용돼 왔고, 열린우리당도 그런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기 힘들다. 그런 마당에 노 대통령의 '유서 깊은 정당'론은 과연 현실적인 적용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저 개인의 희망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최근 20년의 우리 정치사는 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민주주의 도입기부터 계속 이어져 온 분당의 악순환은 정당 간 이념적 차별화를 어렵게 했고, 장기간의 군부 독재에 따른 민주주의의 허약한 기반은 힘 있는 야당의 출현을 어렵게 했던 게 사실이다. 나름의 대중적 기반을 갖는 대중정당은 87년 6월항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비로소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협소한 이념적 틀 속에서 지역 구조를 동원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분열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1987년 대선을 전후한 시기에 김영삼(YS), 김대중(DJ), 김종필(JP) 등 이른바 3김(金) 씨, 좁게 보면 YS와 DJ의 두 김 씨가 형성해 온 길항과정은 우리 정당사에서 소위 '대주주'와 정당의 관계를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YS를 지지하는 상도동계와 DJ를 지지하는 동교동계가 이민우 총재를 내세워 만든 신한민주당은 1985년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67석을 차지해 일약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두 김 씨의 대리인에 불과했던 이민우 총재가 '딴 살림'을 차릴 움직임을 보이자 그해 5월 대주주인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신한민주당을 대거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16석만 남은 신한민주당은 제1야당에서 비교섭단체로 전락했다. 본류는 껍데기만 남고 새 본류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한 정당이 완전히 형해화 되면서 고스란히 새로운 본류로 옮아간 사례는 그 이전에는 1969년 9월 이른바 3선개헌 전야의 유진오 총재 시절 신민당이 개헌안에 찬성을 선언한 변절의원 3인(성낙현, 조흥만, 연주흠)의 의원직 박탈을 겨냥해 당을 해체한 경우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정당이 해산되면 소속의원들이 의원직도 상실된다는 헌법 규정을 원용해 당시 신민당은 이들 3인을 제외한 소속의원 44인을 먼저 제명한 뒤 당 자체를 해산해 그 3인의 의원직이 자동적으로 박탈되게 만들고, 사전에 제명된 무소속 의원 44인으로 '신민회'라는 새로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1969년의 희한한 선례 역시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긴 했으되 이른바 당내 대주주의 입김에 의한 정당구조의 변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주주를 중심으로 한 정파 단위의 이합집산 움직임은 한번 시작되자 이내 관성을 얻었다. 1987년 12월의 대선을 두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그해 10월 말 후보 단일화 작업이 끝내 실패하자 DJ는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그해 말 노태우-YS-DJ-JP의 4자 대결구도 속에 정권교체에 실패한 야권은 결국 노태우-YS-JP의 3당합당(1990년) 이후 DJ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1992년 말 다시 한번 정권교체에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때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95년 6월 지방선거의 결과가 당시 여당이던 YS의 민자당이 참패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이에 고무된 DJ는 그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자신의 지지자들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이름의 신당을 창당한다. 이로써 당시 이기택 총재가 이끌던 민주당은 형해화될 수밖에 없었고, 신당을 바탕으로 DJ는 1997년 말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DJ라는 대주주의 도박이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어 DJ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2002년 자신의 당을 새천년민주당으로 개명하고 노무현 후보로 내세워 대선 승리를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대주주의 주도권'과 '당정분리 원칙'의 기이한 결합
  
  이렇게 한국 현대정당사가 양김 씨라는 걸출한 인물의 주도 아래 분립을 거듭하자 2002년의 대선을 앞두고는 집권당인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정당이 특정 정치인의 집권도구로 전락한 상황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결국 노무현 후보도 '당정 분리'를 공약으로 내걸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여당의 총재로 군림하면서 정부와 당을 모두 지배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로써 '대주주의 자의적 정당 이탈'이라는 악순환은 종료되고 노무현식 개혁정치의 중요한 축 중의 하나인 정당의 자율적 발전구조는 확립된 것이었을까? 유감스럽게도 노 대통령은 집권 7개월 만인 2003년 9월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사실상 이끈다. 물론 노 대통령은 이때 "무당적 상태가 국정운영에 더 효율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민주당 구주류와 신주류 간의 갈등 속에서 민주당을 탈당하나 이것이 DJ의 입김이 여전한 구주류를 배제하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기폭제가 된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또 한번 분립한 열린우리당은 당초 국회의원 30여 명의 소수여당이었으나 2004년 탄핵정국의 후폭풍 속에 치러진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미니정당으로 밀어내고 152석의 과반의석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또 한번의 도박이 성공했던 셈이다.
  
  다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로운 정당이 대주주의 입김 아래 출현하고 그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당정분리의 원칙이 되풀이해서 거론되는 기이한 구조가 정착됐다는 사실이다.
  
  노 대통령은 2004년의 4·15 총선 후 지난 2년여 동안 각종 선거에서 패할 때마다 당정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선거 패배의 직접적인 책임을 여당에 돌려 왔다. 노 대통령은 지난 2월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가진 북한산 산행 때에도 당정 분리의 원칙을 언급하며 곧 실시될 5.31 지방선거를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로 보는 시각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로서는 충분히 일관성이 있는 태도였다.
  
  지난해 4.30 재보선, 10.26 재보선 등 선거에서 패할 때마다 여당은 당청 관계의 재정립을 요구했고, 노 대통령은 당정분리를 명분으로 내세워 "당의 문제는 당에서 알아서 하라"고 번번이 외면했다. 보기에 따라선 대단히 기이한 모양새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공천에도 관여하지 않고 여당이 모든 문제를 자율적으로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게 해준 반면, 여당은 당정 간의 긴밀한 협조관계를 요청하는 등 대통령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하는 것인가?
  
  노 대통령의 주도권은 열린우리당을 겨누는 칼?
  
  하지만 과거의 YS와 DJ가 그랬던 것처럼 노 대통령 역시 그 자신의 표현대로 '구세대의 막내'답게 열린우리당의 창당과 그 이후의 일거수일투족 속에서 자신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확인하면서도 입으로는 당-청 분리, 당-정 분리를 되뇐다는 것은 사실상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그 스스로 당의 일상적인 활동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주식회사들 가운데 '대주주'가 경영에 정말 관여하지 않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서부터 노 대통령이 깊이 개입해 왔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이 김근태, 정동영, 유시민, 천정배, 정세균 등 차기 내지는 차차기 대권후보로 거명되는 열린우리당 인사들을 장관으로 임명해 온 것은 대주주로서의 영향력 행사가 아니었을까?
  
  누가 뭐래도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정당이다. 열린우리당의 차기 정권 창출에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열린우리당 5.31 지방선거 이후 맞은 위기 상황에서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당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경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김 의장 자신이 선거 패배와 당의 현상질서에 일정부분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마당에 과연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 김 의장은 결국 정동영 전 의장 세력이 고스란히 온존되고 노 대통령이 사실상 구심점이 되는 당의 구조를 일단 안고 갈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런 현실이 지난 29일 청와대 만찬의 '우호적인 당-청 관계' 속에서 냉정한 사실로서 확인됐던 것이다.
  
  일단은 노 대통령이 여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그런 점에서라도 노 대통령의 발언권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탈당' 자체가 '노 대통령의 카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을 겨누는 '노 대통령의 칼'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것이 김근태 당의장 체제의 근본적인 한계인 동시에 노 대통령의 "절대 탈당하지 않겠다"는 확언의 정치적 귀결인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29일의 청와대 만찬과 그 이후 확인된 분명한 사실을 몇 가지를 더 짚어보자. 노 대통령의 주도권은 바로 그날 만찬 석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행사됐다. 한미 FTA의 추진에 대한 당의 용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 동안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공공연히 제기되어 왔던 '졸속 FTA 추진'에 대한 항변은 당분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왜냐하면 '노 대통령의 탈당 부인'의 코스트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르면 3일 오후 단행될 것으로 알려진 부분 개각 역시 노 대통령 주도권 강화를 확인시켜주는 사례 중 하나다. 노 대통령은 새 경제부총리로 권오규 청와대 정책실장, 교육부총리로 김병준 청와대 전 정책실장을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병준 전 실장의 인선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난 주말부터 여당 내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대 의견이 불거져 나왔지만 청와대는 "노 대통령이 이미 오래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인선"이라며 여당 일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임명을 강행할 태세다.
  
  20년의 귀결? 새로운 시작?
  
  6월29일의 청와대 만찬이 최근 20년 우리 정당사의 상징적 귀결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열린우리당의 대주주로서 노 대통령은 모든 것을 얻었다. 최소한 여권 내부의 구조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모든 결론 속에서는 이미 새로운 상황의 단초가 태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한미 FTA를 두고 "우리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당-청 간의 합창이 과연 어떤 시민적 반응을 낳고, 그것이 다시 어떻게 당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지켜볼 일이다. 그 과정에서 '100년 정당'을 지향한다는 노 대통령의 정국주도권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행사될 것인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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