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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중심주의, 이용훈 대법원장의 이룰 수 없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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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공판중심주의, 이용훈 대법원장의 이룰 수 없는 꿈?

[기자의 눈] 법원인력 대폭 증원 필요…예산지원 없인 실패

영미법의 재판과정을 대결방식(adversarial system), 그리고 한국법이 속한 대륙법 체제의 재판과정을 심문방식(inquisitorial system)이라고 쉽게 구분한다.
  
  설명하면 영미법의 재판과정은 원고와 피고인의 대결장이다. 권투나 유도 선수들처럼 원고와 피고, 혹은 그의 대리인들(면허증을 소지한 이들의 이름은 '변호사'다)이 상대를 거꾸러뜨리려고 최선을 다한다. 물론 규칙은 지켜야 한다. 권투에서 허리 아래를 치면 안된다고 하거나 유도에서 상대방을 주먹으로 때리면 안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재판에서 이 같은 규칙은 소송절차법과 증거법이다.
  
  영미법에서는 재판을 할 때 규칙에 따라 경기가 진행되도록 하고, 마침내 경기가 끝나면 이긴 선수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판사의 역할이다. 권투와 유도에서는 KO나 한판승이 아니면 심판의 판정이 승패를 결정짓는다. 재판에서는 KO나 한판승이 없다. 그래서 항상 판사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한다.
  
  재판은 판사가 실체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
  
  대륙법의 재판은 판사가 실체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검사와 변호사는 판사가 실체적 진실을 찾아가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이것은 모든 법학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대륙법이든 영미법이든 원고나 피고의 대리인이 판사와 대등하다고 주장하는 나라는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혹시 대한민국은 거기서 빼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검사와 변호사는 원고나 피고의 대리인일 뿐이다. 그들은 판사 앞에 겸손하게 자기 의뢰인의 사건과 주장을 펼쳐놓고 판사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판사 앞에 서면 그들은 한없이 작아진다.
  
  영미의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판사를 'Your Honour'라고 부르고,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미스터 김, 미스 리, 혹은 미즈 박으로 부른다. 호칭에서부터 위아래가 분명하다. 우리나라 법정에서도 검사나 변호사가 판사를 부를 때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므로 법조 3륜이라고 해서 법원 검찰 변호인이 마치 대등한 위치에 있는 듯이 표현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판사는 3륜차의 앞 바퀴가 아니라 검사와 변호사라는 두 바퀴가 떠받치는 몸통이라는 이야기가 원칙과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는 대부분의 국민이 검찰이 법원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법원과 똑 같은 층수로 올라간 검찰청 건물들이요, 법원의 3심 제도에 상응하게 대검, 고검, 지검으로 검찰을 조직한 것이다.
  
  기능적으로 보면 검찰에는 고검, 대검이 필요 없다. 변호사를 보자. 같은 변호사가 지방법원에도 가고, 고등법원에도 가고 대법원에도 간다. 물론 전관예우를 받으려고 소송이 진행되는 법원 출신의 변호사를 쓰는 사람들은 그 때마다 변호사를 바꾸기도 하지만, 변호사의 자격에 지방법원용, 고등법원용, 대법원용이 없다. 검찰도 마찬가지다.
  
  검찰-변호사가 법원과 대등하다고 생각하는 게 독재정권 유산
  
  검찰이 법원과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돈을 받고 전문지식에 바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 직업인에 불과한 변호사들까지 자기들이 사법부와 동급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이요 오해다.
  
  문제는 그 같은 착각이 사실인 것처럼 오랜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통치의 차원에서 인권을 탄압해 온 독재·군사정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체계적 지속적으로 법원의 위상을 낮춰 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법원은 보다 중요한 사실파악 기능을 유기하고 검찰의 조서를 바탕으로 법적용만 하는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대법원장의 검찰조서 증거능력 부인 발언은 검찰 조서를 모두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검찰조서 내용의 진위를 법정에서 반대심문을 통해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이야기다.
  
  그러나 검찰은 '검사의 혼이 깃든' 서류가 절대적인 유죄 증거의 위치에서 유죄 여부를 판사가 결정하기 위해 참조하는 여러 증거들 중의 하나로 추락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의 대가로 인정되는 이재상 이화여대 법대 교수는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개최한 공청회에서 "공판중심주의는 새삼스럽게 우리나라에 도입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형사소송법의 원칙인데, 우리 법원이 그것을 적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 서울대 법대 신동운 교수는 "일제시대의 일본인 재판관들이 하던 관행을 해방 후에도 법원이 답습해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시대에는 검사도 재판관들도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한국인 피의자의 진술을 일본인 재판관이 법정에서 들으려면 통역을 통해야 했다. 통역을 통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시간소요를 줄이고 업무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일본인 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바탕으로 일본인 판사가 재판하던 것이 우리나라 조서재판이 시작된 역사적 배경이라는 것이다.
  
  문병호 의원은 본인이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조서 재판의 문제점을 이렇게 증언했다. "조사를 10시간 받았는데, 나중에 검찰이 꾸민 조서를 보니까 10페이지에 불과하더라. 열 시간 조사했으면 조서가 100 페이지쯤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검찰은 조서를 꾸밀 때 피의자가 기술한 내용 중에서 공소를 유지하기에 유리한 사실만을 선별해서 기록하는 것 같더라." 검찰의 취사 선택 작용이 조서 작성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법원인력 대폭 증원해야 공판중심주의 전면 실시 가능
  
  공판중심주의는 원래부터 있던 형사소송법의 원칙이고 피의자가 부당하게 유죄판결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실시해야 하는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를 여태까지 우리나라 법원에서 시행하지 못했던 것은 단순히 일제 잔재의 답습 만이 원인인 것은 아니다. 안상수 국회 법사위원장은 "판사 한 명이 한 달에 몇 백 건의 사건을 처리하는 상황" 때문에 그동안 공판중심주의가 실시되지 못했던 것이라고 파악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공판중심주의 원칙 표명에 대해 정상명 검찰총장은 26일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를 전국의 검찰에 내렸다고 한다. 여기에는 사실 공판중심주의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기에는 인력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법원의 약점을 공격해서 좌절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관점도 있다.
  
  검찰이 제공하는 조서를 바탕으로 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데는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검찰 조서와 증거를 하나 하나 법정에서 반대심문을 통해 진위 여부와 정확성을 점검하면 며칠 씩 걸리게 된다. 한나절이면 되던 재판이 며칠 씩 걸리게 되면, 법원이 처리할 수 있는 사건의 수가 크게 줄어든다. 재판 당사자들에게는 결정이 지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내용을 모르는 국민과 언론들은 공판중심주의가 재판의 지연을 초래했다고 하며 이것을 법원의 무능 또는 오만한 탓이라고 비난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처럼 사법부에 대한 일반 국민의 거부 정서가 거의 도덕적 당위성 수준으로 팽배해 있는 곳에서 법원 인력 충원을 위해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앞으로 상당기간 성공 가능성이 대단히 낮아 뵌다. 보수언론을 추종하는 집단의 반발을 무척이나 겁내는 노무현 정부가 이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법원 기구 확대나 예산 증액을 시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모두 종합해보면,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내놓은 형사소송법 개정안 만으로도 제대로 된 재판을 해보려는 뜻 있는 판사들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동분서주 하는 이용훈 대법원장은 결국 '법원 팽창주의자'의 비난 속에 뜻을 펴기 어려워 보인다는 얘기다.
  
  결국 공판중심주의는 교과서에나 있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실현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제도로 국민 속에 인식될 것이고, 형사피의자들은 검찰의 조서를 바탕으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재판의 '공정함'에 대해 국민이 갖는 불만은 지금처럼 계속될 것이다.
  
  검사는 힘이 세다
  
  사실 싸움에 있어서 법원은 검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법정에서는 판사가 높지만 세상사에서는 검사가 힘이 세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안다. 검찰은 판사를 표적 수사할 수 있지만 법원은 검찰을 표적 재판할 수 없다.
  
  고양지원 정진경(43ㆍ사법시험 25회) 부장판사는 22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영장기각율이 높은 판사에게는 검찰이 뒷조사를 하는 등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최근 법조비리 사건의 당사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혐의 사실이 미약한데도 구태여 구속까지 된 것은 공판중심주의를 도입하려는 법원을 거냥한 검찰의 견제용이라는 시각도 있어 왔다.
  
  지금까지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시도는 대부분 개혁 허무주의만 낳고 좌절되고 말았다. 공판중심주의를 통해 사법적 인권보호의 획기적 틀을 마련하겠다는 시도 역시 거기서 벗어나기 힘든 것 같다. 끝을 맺을 수 없으면 아예 시작을 말았어야 했는데, 무능한 사람들은 자기가 끝맺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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