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대검찰청이 일선 검찰청에 "법원의 영장 기각사례를 수집해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등 미묘한 조직적 반발 기운마저 감지된다. 또한 이 대법원장의 '정권 유지 도구' 발언도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 대법원장은 이와 같은 발언들을 취임 1주년을 맞아 지난 11일부터 18일까지 전국 법원들을 돌며 실시한 법관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쏟아냈다.
■"검찰 수사기록을 던져버려야" : 이 대법원장은 13일 광주고·지법을 방문한 자리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너무 쉽게 발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범죄 단서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영장 발부를 자제해야 한다"며 "혹 검찰과의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영장발부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법원장은 이어 19일 대전고·지법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법원이 재판 모습을 제대로 갖추려면 (검사의) 수사 기록을 던져 버려야 한다. 공판중심주의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또한 '공판중심주의 강화'라는 사법개혁 과제의 일환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대법원장의 발언에 가장 심기가 불편한 쪽은 검찰이다. 최근 '현대차비리', '법조비리', '바다이야기' 사건 등에서 종종 압수수색영장이나 구속영장이 기각된 바 있기 때문이다. '검찰 기록을 던져버리라'는 말도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를 두고 법원과 검찰이 갈등을 벌이고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최근 <한겨레>에 10회 기획으로 현직검사가 기고하던 '수사받는 법' 연재도 2편이 "조서에 도장 찍지 말라"라는 것을 미리 안 검찰 간부가 내용을 보고 기겁을 했다는 후문이 들려올 정도로 법원의 '검찰조서 불인정' 움직임에 검찰은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법원으로서는 "개혁 구호만 잔뜩 늘어놓고 실제로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비판을 적지 않게 들어온 게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한 법조계 인사는 "언론의 이목을 받고 있는 서울에 비해 지방에서는 사법개혁이 '다른 나라 얘기'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따라서 무언가 '액션'이 필요했던 이 대법원장이 이번 지방 순시를 통해 개혁 공감대 형성에 적극 나섰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검찰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어떤 방향으로 개혁작업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누가 노래 부르고 신발 던졌나?" "그게 한둘인가?" 이 대법원장이 말한 '70년대 법정에서 신발 던지고 노래 부르던 현재의 국정운영자'는 누구일까? 이에 대해 대부분의 당시 '운동권' 인사들은 "검사나 판사한테 신발 던지고 노래 부르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냐"고 입을 모은다. 그런 행동이 있었던 배경에는 1970~80년대 우리 사법 시스템 전체가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기능했고 그에 대한 공분이 그만큼 컸던 것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그 중에 '국정운영자'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다음은 1984년 9월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1년6개월을 선고 받은 유시민 현 보건복지부 장관에 관한 당시 기사의 일부다. 李 판사가 실형을 선고하자 피고인들은 한때 "학원탄압 중지하라", "사법권 독립을 보장하라" 등 구호를 외쳤고 방청석에 나온 일부 피고인들의 친척도 "재판결과가 부당하다"며 가세해 법정이 시끄러워졌는데, 법원 정리가 피고인들을 법정밖으로 끌어내 정내정리를 했다. 李 판사는 소동이 가라앉자 이례적으로 피고인들을 다시 불러 유죄판결 이유에 대해 20여 분간 보충설명하고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을 했으나 이 사건이 사회에서도 경계해야 할 각종 고문 등의 수법으로 저질러진 전형적인 폭력, 협박사건이고 피고인들이 최후진술 때 보여준 법정소란행위 등으로 미뤄봐 개전의 정이 없다고 판단돼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피고인들은 공판이 끝나자 '우리 승리하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법정을 나섰다. 피고인들은 지난해 9월하순 孫 모(19) 군 등 외부인 4명을 기관원의 프락치라며 서울대 교내에 감금, 폭행한 혐의로 모두 구속기소됐다.('외부인 감금' 5명 모두 실형' 한국일보 1985년 4월2일자) |
■"신발 던지고 노래 부르던 사람들이…" : 이 대법원장의 발언 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은 18일 대구를 방문해 한 발언이다.
이 대법원장은 "과거 1972년부터 87년까지 15년 동안 법원은 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정권 유지의 도구로 전락하는 바람에 70년대는 법정에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노래를 부르는 사태가 계속됐다"며 "그 때 법정에서 노래 부르고 한 사람들이 지금 국정을 움직이고 있고 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우리 법원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일반 국민들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에 사법 신뢰 회복이 시급한 과제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역시 '구호성' 발언이 돼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70년대 운동권 출신인 한 인사는 "당시 판사들은 검사의 공소장을 그대로 베끼는 바람에 검사가 낸 오타까지 그대로 베껴서 판결문에 쓰기도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었다"며 "지금의 대법원이 이런 구체적 사례들을 들춰내지 않은 채 하는 반성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격앙된 어조로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구체적 절차가 착수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후 "과거의 판결 중 문제될만한 것을 조사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따라서 판결문 분석이 끝나고 구체적 과거사 반성에 돌입하기 전에 법원 내 분위기를 다잡으려한 의도적인 발언이라는 것이다.
■정치권에 던진 메시지? : 또 다른 법조계 인사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이 '정치권'을 향한 독설이라는 색다른 반응을 내놓았다.
최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는 커녕 논의조차 지지부진한 것을 보고, 공판중심주의, 고법 상고부 설치 등 다른 사법개혁안도 국회에서 통과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미리 '정치인의 사법 불신'을 전제하면서, 권위주의 시절 사법부의 피해자였던 정치인들이 직접 나서서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압박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맥락은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의 인준 절차 지연으로 인해 헌재소장 공백 사태가 일어난 데 대한 법원 인사들의 '불평'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판사들은 "정치권의 이해다툼에 국가 최고법원이 흔들려서야 되겠느냐"며 불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법원장은 평소에도 거침없는 발언으로 유명하다. 취임식부터 "국민을 섬기는 법원으로 돌려놓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고 말했고, 그 이후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을 약속하는가 하면, 수백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두산그룹 오너 일가가 집행유예를 선고 받자 판결을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조관행 전 부장판사가 법조비리 혐의로 구속되자 바로 대국민사과를 하는 등 발빠른 모습을 보여 일부에서 "지나치게 포퓰리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두산그룹 오너 일가는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고, 과거사 청산 작업은 아직 가시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대다수의 국민들은 법조비리가 여전하다고 믿고 있다. 취임 1년이 지난 이 대법원장이 이제 어떤 '행동'을 보여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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