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한반도에서의 전세는 유엔군에게 더욱 절망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군과 북한군에게 패퇴를 거듭하면서 12월 4일에는 평양에서, 12월 24일에는 흥남에서 철수했고, 연말에는 38선 이남까지 밀려났다. 연전연승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호기를 놓치지 말라"며, 38선 남진을 명령했고 공산군은 1월 4일에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이러한 결정은 트루먼의 북진 명령에 비견될 만큼의 역사적 실책이었다. 전세가 악화되자 영국을 비롯한 여러 서방국가들은 즉각적인 휴전을 제안했고 미국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러나 중국의 유엔 가입 승인 문제를 둘러싼 미-소간의 갈등으로 휴전 협상이 있어서야 할 자리에는 유엔군과 북한-중국군 사이의 길고도 피비린내 나는 교전이 차지하고 말았다. 서울을 빼앗긴 유엔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고 1951년 3월 18일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그런데 서울 탈환 직후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에 정면충돌이 벌어졌다. 트루먼은 38선을 회복한 이상 유엔군은 임무를 다했다며 공산군과의 휴전협상에 나설 뜻을 밝혔다. 그러나 맥아더는 "위협에 처한 한국을 방위하여 통일시키겠다던 대통령의 단호한 결의는 어디로 가고 패배주의로 전락해버렸는가"라며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3월 24일에는 "유엔이 유엔군에게 부과하고 있는 제한사항을 철폐하면 중국을 군사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영국도 맥아더를 "미친 태수(the mad satrap)"라고 부르면서 중국과의 확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맥아더는 확전론을 고수했다. 맥아더를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간주한 공화당의 지도부는 "승리를 대체할 것은 없다"며 맥아더의 강경론을 적극 지지한 것이다. 맥아더의 인기 상승과 트루먼의 지지율 하락이 교차되면서 트루먼 행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이제 트루먼과 맥아더의 관계는 더 이상 최고 군 통수권자와 현지 사령관의 관계가 아니라,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자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을 결심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인기와 공화당 주도의 강경론을 고려할 때, 그를 해임할 명분과 미국의 힘을 과시할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핵 카드는 이 때 다시 나오게 된다. 맥아더를 미국으로 불러들이면서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핵폭탄을 아시아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 1951년 1월, 중국군을 상대로 맹폭을 가하고 있는 미국의 B-29 전폭기 ⓒ미국국립문서보관소 |
맥아더 해임과 핵 카드
이즈음 전쟁의 양상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엔군의 반격에 막힌 중국군과 북한군은 '춘계공세'에 나섰다. 또한 당시 미국은 소련이 3개 사단과 공군기를 만주로 이동시키고 잠수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는데,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는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소련군이 일본을 공격하고 나올 가능성을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응해 트루먼은 또 다시 B-29 전폭기를 태평양에 파견해 미국의 힘을 과시하기로 했다. 4월 6일에 하달된 이 명령은 즉각 투하가 가능한 핵폭탄을 탑재한 전폭기를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자국의 본토 밖으로 '완제품' 핵폭탄을 실은 전폭기를 배치한 것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한국전쟁이 핵전쟁과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위험성도 높아졌다.
트루먼은 자신의 결정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백악관 집무실에 핵심 참모들을 불러들여 소련 공군기가 만주에 배치되고, 잠수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하고 있으며, 상당수의 소련군이 사할린 남부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했다. 소련군이 한반도에 있는 유엔군을 공격하거나 동해를 봉쇄해 유엔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할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이를 억제하기 위해 전략공군사령부의 전폭기를 태평양에 파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핵폭탄 투하를 실제로 강행하기 이전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원자력 특별 위원회와 상의할 것이라고 밝혀, 핵전쟁에 신중론을 펼쳤던 일부 관리들의 불안감을 달래려고 했다.
트루먼이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완제품' 핵폭탄을 해외에 배치한 데에는 맥아더 해임 결정에 대한 국내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 합참은 맥아더 해임 방침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트루먼의 핵폭탄 배치 결정에 고무돼 맥아더 해임을 지지하기로 했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는 4월 10일 핵폭탄 배치 결정을 공화당 매파 의원들을 비롯한 18명의 의원들에게 사전 브리핑 해줌으로써, 미국 내부를 상대로 한 '핵 외교'에 나섰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가 미국을 또 다시 확전으로 몰아넣는 "비극적인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면서 그의 해임 방침을 발표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Matthew Ridgway) 8군사령관을 임명했다. 동시에 소련과 중국에게는 유엔군을 상대로 공습을 가해 한국전쟁을 확대시키면 "그러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해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핵폭탄을 탑재한 B-29를 괌에 파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트루먼의 결정과 관련해 브루스 커밍스는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단순히 그의 거듭되는 불복종 때문만이 아니라 워싱턴이 핵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릴 경우 현장에 믿을 만한 사령관이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트루먼은 자신의 핵무기 정책을 위해 맥아더를 방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듯 맥아더의 후임자인 리지웨이는 핵 사용에 신중한 인물이었고, 그 만큼 트루먼의 신임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 발표 이후 국내외에서 더더욱 곤경에 처했다. 맥아더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트루먼의 전쟁 수행을 맹비난하고 다녔다. 그가 방문한 도시들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국가적 영웅이자 가련한 순교자로 널리 알려졌다." <타임(Time)>지는 맥아더를 "영웅"으로, 트루먼을 "소인배"로 칭했고, 맥아더를 복권시켜야 한다거나 심지어는 트루먼을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그러자 트루먼은 맥아더의 '강연 정치'에 '청문회 정치'로 맞섰다. 트루먼 행정부 고위 관료들은 의회 청문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적대국이 전선을 확대하면 핵무기를 이용한 가공할 보복에 나설 의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맥아더 해임에 대한 강경파의 불만을 달래고, 맥아더의 비난처럼 트루먼 행정부가 결코 전쟁에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또한 '맥아더 청문회'에 나선 민주당 의원들과 조지 마셜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얼마나 형편없고 위험하며 독선적인 인물인지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해임을 계기로 국가적 영웅이자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한 맥아더는 청문회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미국 내에서 트루먼과 맥아더가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중국은 미국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그러자 트루먼 행정부는 핵 사용 계획을 더욱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핵폭탄 투하 준비태세 강화를 위한 군사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핵 공격을 담당하는 전략공군사령부의 지휘통제팀이 도쿄로 파견되었고, 리지웨이 사령관에게 핵 사용 권한이 위임됐으며, 미군 정찰기가 만주와 산둥반도를 비행하면서 공격 목표물을 물색하고 나섰다. 이들 조치 가운데 트루먼이 맥아더가 집요하게 요구했던 핵 사용 권한을 그의 해임 뒤에 리지웨이에게 부여한 것이 눈에 띈다. 대통령을 무시한 맥아더와는 달리 리지웨이는 자신의 명령에 충실히 따를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트루먼은 9개의 핵폭탄에 대한 통제권을 원자력위원회에서 군부로 이전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원자 폭탄 사용 권한이 민간에서 군부로 넘어간다는 것으로, 그 만큼 신속한 핵 사용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동시에 트루먼은 중국을 상대로 핵 위협을 이용한 '강압 외교'에도 나섰다. 트루먼의 비밀 특사는 홍콩을 방문해 중국 지도부에게 맥아더의 해임이 미국의 나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인내심과 자제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전달했다. 특히 "미국은 중국을 수십년 전으로 되돌릴 힘이 있다"며 오판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 힘이 핵폭탄에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는 전달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리지웨이 "핵 공격은 부도덕의 극치"
한편, 맥아더의 후임자로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리지웨이는 맥아더와 달리 핵공격 권한을 트루먼으로부터 위임받았지만, 원자폭탄 사용에는 대단히 신중했다. 리지웨이는 1951년 7월 교착상태가 지속되자, "만약 우리가 압록강에서 전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면, 그리고 이러한 행동이 초래할 사상자에 대해 우리 정부가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그것(핵 공격)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러한 비용을 치를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중론은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보복의 힘이 핵 공격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핵 공격이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됐다. 그는 1967년에 펴낸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론 미국 내에는 교착상태가 지속되면 적의 본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적을 석기 시대로 돌려놓아야 한다며 즉각적인 핵무기 사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부도덕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핵공격은 보복 차원에서는 고려할 수 있다. 국가의 생존 수단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이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러한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중략) 만약 우리가 인간의 존엄 앞에 어떤 비용을 치러서라도 승리를 추구한다면, 신은 우리의 대의명분에 신의 축복을 요청할 권리에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트루먼은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핵 공격 위협을 가했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우선 중국을 상대로 한 '핵 협박'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의 비밀 특사를 통해 협박을 받은 중국 지도부가 미국이 핵폭탄을 탑재한 B-29 전폭기를 동아시아에 배치한 사실을 알았는지부터가 불확실하다. 또한 중국은 5월 중순 들어 방어적 태세로 전환했는데, 이는 미국의 핵 위협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차례에 걸친 공격 작전이 실패로 끝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이 괌에 핵 전폭기를 배치한 것이 소련을 휴전협상으로 유도했던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소련의 유엔 대표인 야코프 말리크는 1951년 6월 23일에 휴전 협상을 전격적으로 제안했는데, 이러한 제안은 괌에 배치됐던 B-29 전폭기가 미국 본토로 돌아간 직후였다. 실제로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발표를 듣고 핵무기 배치가 적대국을 협상 테이블로 유도했다는 자신감보다는 소련의 갑작스러운 휴전 협상 제의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소련의 제의는 미국의 핵 시위의 결과라기보다는 6월 들어 유엔과 미국이 휴전 의사를 피력하고,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휴전을 요청한 데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휴전협상 제의는 진정성이 결여된 외교적 기만책에 불과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미국과 중국을 한반도 전선에 계속 잡아두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여전히 강했기 때문이다.
<주요 참고문헌>
브루스 커밍스 지음·김동노 등 옮김, 『한국현대사』(창비, 2003).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Rosemary J. Foot, "Nuclear Coercion and the Ending of the Korean Conflict,"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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