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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도주의 국가인 미국이 어떻게?

[정욱식의 '핵과 인간'] 트루먼의 '장군'과 스탈린의 '멍군'

핵이라는 '절대 무기'를 손에 쥔 자는 대담해지고 못 가지는 자는 움츠려 드는 것일까?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전후 질서를 구상하면서 핵보유 '이전'과 '이후'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전후 질서 형성의 중대 분수령이었던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임한 미국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핵실험 5개월 전인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두 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나는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재무장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미국 내 고립주의 분위기를 감안해 대규모의 미군을 유럽에 장기간 주둔시킬 의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태도를 두고 60년 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얄타 회담을 2차 대전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뮌헨 회담'에 비유하면서 맹비난을 가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얄타 회담을 대표적인 굴욕외교의 사례로 본 것이다.
▲ 포츠담 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탈린, 트루먼, 처칠(왼쪽부터). ⓒ 미국국립문서보관소


그러나 미국이 얄타 회담 5개월 후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태도는 확 바뀌게 된다. 상당 기간 핵독점을 자신했던 미국은 소련과의 협력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유럽 방어 전략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독일의 재무장과 관련해서도 미국이 핵무기를 갖게 됨으로써 독일이 재무장하더라도 또 다시 도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국은 포츠담 회담에서 핵 강압 외교의 서막을 올렸다. 흥미롭게도 그 임무는 국제 외교무대에서 신인이나 다름없는 트루먼(Harry S. Truman)에게 주어졌고, 그의 상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독재자 스탈린이었다. 1945년 1월에 부통령이 된 트루먼은 그 해 4월 루즈벨트 대통령이 병사하면서 졸지에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도 맨해튼 프로젝트 존재 자체를 몰랐을 정도로 미국 정부의 전시정책결정에서 아웃사이더였다. 그가 느꼈던 당혹감은 딸에게 보낸 편지에 여실히 드러난다.

"만약 일급비밀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지. 언젠간 말해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1945년 1월 20일부터 4월 12일까지 부통령이었지. 그런데 3개월 동안 각료 회의에서 루즈벨트를 만난 것은 한두 번에 불과했어. 그는 나에게 결코 전쟁과 외교문제에 관한 내밀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지. 그가 전후 평화 구상과 관련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말해주지 않았어.

(중략)

그래서 난 세계 상황에 관한 메모, 브리핑, 각종 자료들을 읽기 시작했지. 그건 너무 끔찍해서 (의회) 외교위원회에선 접해보지 못한 것들이었고, F.D.R(루즈벨트)가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들이었지."

'부통령' 트루먼도 몰랐던, 그래서 그가 가장 크게 놀란 일은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존재였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지 12일 후, 트루먼은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으로부터 극비리에 편지를 받았다. "극비 사안과 관련해 저는 가능한 빨리 대통령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스팀슨이 말한 극비 사안은 물론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이었다. 핵 개발 성공이 확실해지자, 스팀슨은 이를 미국의 외교적 카드로 삼고자 했다. 이로 인해 트루먼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새로운 무기를, 그것도 그 자신이 존재 자체도 몰랐던 무기를 들고 스탈린을 상대해야 했다.

스팀슨의 고민, 트루먼의 화답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가 단행되기 하루 전인 7월 15일. 트루먼은 이른바 '빅 3', 즉, 자신과 스탈린, 그리고 처칠과의 회담을 위해 독일 베를린 인근 포츠담에 도착했다. 독일 항복 70일 후이자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던 시점이었다. 이 회담은 유럽의 전후 처리와 태평양 전쟁에 대한 연합국의 공동 대응 방안,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중차대한 자리였다. 그러나 트루먼의 마음 한쪽은 최초의 핵실험이 예정된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 '죽음의 여정'에 가 있었다. 그는 7월 16일 스팀슨으로부터 핵실험이 "예상을 뛰어넘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는 보고를 받고 안도했다. 트루먼을 수행한 스팀슨은 처칠에게도 핵실험 사실을 알렸다. 핵실험 이틀 후인 7월 18일에 트루먼은 보다 상세한 보고를 접했다. 화구(fire ball)의 섬광은 400km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됐고, 그 굉음은 80km까지 울려퍼졌을 만큼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신무기의 등장에 고무된 트루먼은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압박하는 카드로 핵무기를 선택했다. 핵 강압 외교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소련보다 핵무기를 먼저 손에 넣은 것은 1943년 1월 소련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을 격퇴해 유럽 전선의 전세를 뒤집은 것과 비견될 정도의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적어도 미국은 그렇게 믿었다. 1941년 6월 히틀러의 소련 침공부터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개시된 1944년 6월까지, 소련은 독일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독일군의 사상자는 420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의 독일군 사상자의 13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 스탈린은 동유럽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대규모 상륙작전 단행을 미뤘고, 이 사이에 스탈린은 승승장구했다. "스탈린이 지하 벙커를 떠나 루즈벨트와 처칠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고, 또한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에서 발언권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정학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트루먼은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것이 미국의 발언권을 강화해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짜는 데 미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했다. 트루먼은 "히틀러나 스탈린이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한 것은 세계를 위해 정말로 좋은 일이다. 핵폭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무기이지만, 가장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1945년 7월 25일 일기장에 썼다. 핵무기 개발 이전까지 미국은 일본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핵무기 개발 성공으로 소련의 개입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자 강압 외교의 신봉자였던 제임스 번스(James Byrnes)는 "소련이 개입하기 전에 우리가 전쟁을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당시 미국은 핵무기를 소련에 대한 압박 카드로 간주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안소니 에덴(Anthony Eden) 영국 외무장관과 미 육군 참모총장이자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조지 마셜(George Marshall) 등 고위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온 스팀슨은 5월 14일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의 핵무기 보유에 따른)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모든 카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핵무기를)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이 카드를 가지고 바보같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인들은 우리의 도움과 산업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우리는 유일한 무기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날 일기장에는 "대통령께서 7월 초에 스탈린과 처칠을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 문제"라며, "우리의 손에 마스터 카드가 없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 그와 같은 중대한 사안을 두고 게임을 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라고 적었다. 이러한 두려움을 반영하듯, 스팀슨은 빨리 신무기의 위력을 보여달라고 맨해튼 프로젝트팀을 다그쳤다. 이 프로젝트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54년 보안 청문회에서 "우리는 포츠담 회담 전까지 그것을 완성시키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트루먼은 스팀슨의 즉각 고민에 화답했다. 그는 5월 21일 소련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조셉 데이비스(Joseph Davies)를 만난 자리에서 '빅 3' 회동 연기 의사를 피력했다. 데이비스는 "트루먼이 미국의 핵무기 보유 정보에 대해 함구를 요청하면서 당초 핵실험이 6월로 예정되었으나, 7월로 연기되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트루먼과 스팀슨은 보름 후에 만나 '빅 3' 회동에서 '마스터 카드'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합의를 이뤘다. 트루먼은 스팀슨에게 포츠담 회담을 7월 15일로 연기했다고 알려줬는데, 이에 대해 스팀슨은 "핵실험이 또 다시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며, 스탈린과의 회동은 반드시 핵실험 이후에 해야 한다고 주문했고 트루먼도 이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절대 반지'를 손에 넣은 미국은 한 쪽 눈으로는 교전국인 일본을, 다른 한 쪽 눈으로는 전시 동맹국인 소련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 '난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포츠담 회담에서 '빅 3' 사이의 최대 이견은 동유럽 문제였다. 스탈린은 영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그리스에 개입하지 않을 테니, 미국과 영국도 발칸반도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그 지역에 있는 국가들에게 자유선거를 비롯한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폴란드의 정부 구성 및 자유선거에 대해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이른 시일 내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는 모호한 합의만 이뤘다. 이 밖에도 독일 다뉴브 강과 수에즈 운하 처리, 소련의 독일에 대한 배상 청구권, 이탈리아의 유엔 가입 등을 놓고도 이견이 표출되거나 모호한 합의에 머물렀는데, 여기에는 미국이 이전보다 훨씬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트루먼의 강경한 태도는 루스벨트가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던 것과는 분명 달라진 모습이었다. 미국의 핵무장 성공이 미국 외교정책을 '혁명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번스 국무장관은 얄타에서 양해했던 사항, 즉 독일에게 전쟁배상금 200억 달러를 물리고 그 절반을 소련의 전후 복구에 사용하기로 한 내용을 포츠담에서는 없었던 일로 해버렸다. 이러한 미국의 자신감은 핵실험 성공으로부터 나왔다. 핵실험이 대성공을 거뒀다는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매우 고무되었고, 이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다"고 스팀슨은 회고했다. 스팀슨은 또한 트루먼에게 8월초에 우라늄 핵폭탄 사용 준비가 완료될 것이라고 보고했고, 처칠에게도 트리니티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에 처칠은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강경하게 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며, "스탈린에게 물러서지 말 것을 트루먼에게 요청"했다. 트루먼도 "나는 적절한 시점에 스탈린에게 맨해튼 프로젝트를 말해줄 것"이라고 화답했다.

신무기의 등장과 자신의 보좌진 및 처칠의 권고에 고무된 트루먼은 7월 24일 저녁 스탈린에게 다가가 '마스터 카드'를 꺼내들었다. "미국은 전례없는 파괴력을 갖춘 새로운 무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 새로운 무기란 바로 원자 폭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탈린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 현명하게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어찌된 영문이었을까? 스탈린은 1942년부터 스파이를 통해 미국과 영국의 공동 핵무기 개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소련의 스파이 활동을 경계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인 그로브스(Leslie Groves) 장군은 1945년 4월 트루먼에게 이 프로젝트를 보고한 자리에서 "러시아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첩보 활동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육군 특수 방첩대와 연방수사국(FBI)이 면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빈 구멍은 그로브스의 장담보다 훨씬 컸다. 맨해튼 프로젝트 초기부터 여러 명의 미국 및 영국 국적의 과학자들이 소련의 첩자나 자발적인 정보 제공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원자폭탄을 이용한 강압 외교가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핵 외교' 예찬자들은 강압 외교를 통해 소련의 영향력을 일정 정도 제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효과도 만만치 않았다. 스탈린은 이미 미국의 핵실험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트루먼이 전시 동맹국인 자신에게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쉬쉬하다가 핵 실험 성공을 10일 가까이 지나서야 알려준 것에 대해 대단히 불쾌해 했다. 주목할 점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상당수 과학자들이 이를 사전에 경고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부 과학자들은 미국의 비밀주의와 핵 독점이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핵 개발 사실을 소련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요구가 묵살당하자 테드 홀(Ted Hall)을 비롯한 일부 과학자들은 '자발적으로' 소련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핵실험 이전부터 맨해튼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을 거치면서 미국이 핵무기를 자신에 대한 협박 수단으로 동원하기로 한 것을 간파했고, 이에 맞서 소련 과학자들에게 핵개발을 서두르라고 다그쳤다.

"문 뒤의 총"

포츠담 회담에서 핵 '실험'을 통해 스탈린을 압박한 트루먼은 실제 핵 '사용'을 통한 무력시위에 나섰다. 바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그것이다. 번스 국무장관은 원자폭탄을 "문 뒤의 총"이라고 부르면서 소련을 "훨씬 다루기 쉬워졌다"고 말했다.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일기장에 "번스는 소련과의 협력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냈다"며, "원자폭탄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다고 보면서 소련을 다루는데 강력한 무기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핵 개발 성공에 확신을 갖게 된 1945년 5월 들어 미국은 핵전략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전후 질서 형성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그 어떤 나라보다 핵무기 전력의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핵 사용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노출되었다. 2차 대전의 영웅으로 칭송받아온 조지 마셜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무기들은 대형 해군 군사시설과 같이 직접적인 군사 목표물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떤 실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여러 개의 대규모 공업지역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그 중심을 파괴할 것이라고 알림으로써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도록 경고해야 한다." 원자폭탄은 군사 시설에 사용되어야 하며, 사전 통보를 통해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정책결정에서 소수의 목소리였다. 마셜이 권고한 사전 통보는 일본군이 미군 포로를 원폭 투하 예상 지역에 배치하거나 원폭을 운반하는 항공기를 격추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반론에 막혔다. 이에 따라 미군 수뇌부로 구성된 잠정위원회(Interim Committee)는 일본에 사전 경고 없이 복수의 지역에 핵무기를 투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위원회의 책임자인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6월 중순 트루먼에게 이러한 내용을 보고해 승인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자 맨해튼 프로젝트팀과 군부는 핵폭탄 투하 지역 물색에 들어갔다. 최초 후보지역은 고쿠라 무기고, 히로시마, 니이가타, 교토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트루먼과 스팀슨은 일본의 고도(古都)이자 문화유산지인 교토를 일본의 대표적인 군수업체인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이 있는 나가사키로 대체했다.

핵 공격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해군부 차관 겸 잠정위원회 위원인 랄프 바드(Ralph Bard)는 6월 27일 스팀슨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핵심적인 요지는 원폭을 투하하지 않고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는 최근 몇 주 동안 일본 정부가 항복할 기회를 물색하고 있다는 매우 확실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라며, 일본 특사와의 비밀 접촉을 제안했다. 바드는 포츠담 회담 직후에 일본 특사를 만나 러시아의 참전 결정, 원자탄 사용 경고, 그리고 천황제 및 무조건적인 항복 이후 일본에 대한 대우 문제 등을 협의하면 일본이 항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폭 투하의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야말로 "위대한 인도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의 의무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서는 일본에게 "무조건적인 항복"만 촉구했다. 바드의 권고도 철저하게 무시됐다. 그리고 7월 25일 미 공군에게 핵 공격 명령이 하달됐다. 물론 사전 통보는 없었다.

▲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 ⓒ 미국 에너지부

급기야 일본 시각으로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 공군의 B-29 폭격기는 일본 히로시마에 무게 4.4톤의 육중한 '꼬마'(우라늄 핵폭탄)를 떨어뜨렸다. 7만명이 즉사했고, 부상당한 7만명도 1946년을 맞이하지 못했다. 트루먼은 그 날 미국이 히로시마에 15킬로톤의 폭발력을 보인 "전혀 새로운 폭탄"을 투하한 사실을 발표하면서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하지 않으면, 똑같은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날 일본은 내각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시게노리 도고의 진술에 따르면, 일부는 포츠담 선언에서 제시한 항복 조건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 수뇌부의 강경론에 막혔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일본 내각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에 대한 육군 조사 결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히로히토 역시 도고에게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통한 전쟁을 종식시킬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협상 대상은 연합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즉, 소련의 중재로 천황제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종전을 타진해보라는 것이었다.

한편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후 주소련 미국 대사인 해리먼(Averell Harriman)은 스탈린을 만나 그의 소감을 물었다. 스탈린은 일본인들은 결사항전을 고수하고 있는 현 정부를 대체할 구실을 찾고 있었는데, "미국의 원폭 투하는 그들에게 구실을 주었다"고 답했다. 해리먼은 히틀러의 독일보다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히틀러가 먼저 성공했다면 "독일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소련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개발이)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다"며, 소련도 핵 개발에 착수했음을 미국에 알렸다. 스탈린은 미국의 원폭 투하가 자신을 겨냥한 무력시위로 간주하고 소련도 핵개발을 통해 이에 맞서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트루먼이 핵을 이용해 '장군'을 둘 것을 예상하고 스탈린도 '멍군'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 주요 참고문헌

Gar Alperovitz and Kai Bird, "The Centrality of the Bomb, Foreign Policy, Spring 1994.
데이비드 레이놀즈 지음, 이종인 옮김, 『정상회담: 세계를 바꾼 6번의 만남』(책과함께, 2009년).
Department of Energy, The Manhattan Project: Making the Atomic Bomb, January 1999.
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
카이 버드·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
Barton J. Bernstein, "Truman At Potsdam: His Secret Diary," Foreign Service Journal, July/August 1980.
Tsuyoshi HASEGAWA, "The Atomic Bombs and the Soviet Invasion: What Drove Japan's Decision to Surrender?" Japan Focus, August 17, 2007, http://japanfocus.org/-Tsuyoshi-Hasegawa/2501
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
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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