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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의 원폭 투하는 스탈린을 겨냥한 '무력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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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의 원폭 투하는 스탈린을 겨냥한 '무력시위'였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그리고 한국의 기억

미국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일본 전역에 전단지를 뿌렸다. "당신들 지도자들이 항복을 거부해" "우리는 원자 폭탄을 투하했다." "우리가 새롭게 개발한 원자 폭탄은 단 하나로도 우리의 B-29 폭격기 2000회의 출격과 맞먹는다." "히로시마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즉각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즉각적이고 강압적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원자 폭탄과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우수한 무기를 동원할 것이다."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은 "경이로운" 무기의 존재를 미국 국민과 전세계에 알리면서 일본에 경고했다. "우리는 일본의 부두와 공장과 통신 시설을 파괴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실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히로시마가 피폭당하고도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다. 이미 미국의 가공할 재래식 폭격에 익숙해 있었던 탓이 컸다. 미국은 1945년 봄과 여름에 걸쳐 66개의 일본 도시에 엄청난 양의 재래식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 가운데 25개 도시는 8월 첫째주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25개 도시 가운데 8개 도시의 파괴 정도는 히로시마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컸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다른 재래식 무기에 의한 공격과 비교할 때, 일본 지도부에게 항복을 선택할 만큼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고 이를 공식 확인한지 이틀이 지나도록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히로시마 피폭 사흘 후인 8월 9일 새벽,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 있는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일본의 항전 의지나 소련의 중재에 의한 종전 희망은 물론이고, 소련의 개입없이 태평양 전쟁을 끝내려고 했던 미국의 의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8월 9일 새벽 소련의 참전 소식을 접한 일본 지도부는 즉각 최고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가 시작되었을 즈음, 미 공군의 두 번째 폭격기가 고쿠라 기지를 향해 출격했다. 그러나 악천후와 피격 위험을 느낀 폭격기 조종사는 기수를 나가사키로 돌려, 무게 4.5톤의 '뚱보'(플루토늄 핵폭탄)를 투하했다. 21킬로톤의 폭발력을 보인 이 핵폭탄 한발로 1946년 1월까지 14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이 즉각적인 항복을 선언하지 않자, 미국 내 일각에서는 추가적인 원폭 투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트루먼은 더 이상 원폭 투하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며, 승인하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항복 선언 전날인 8월 14일까지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재래식 폭탄을 퍼부었다. 동시에 미국은 무조건적인 항복 요구에서 천황제 유지를 보장하는 방안으로 정책 변경을 검토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간주한 국내외의 여론을 의식해 이를 즉각 공표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의 참전으로 일말의 희망마저 잃게 된 히로히토는 8월 15일 일본 전국에 중계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됐다. 적은 새롭고도 잔악무도한 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면서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9월 2일, 미국 항공모함 미조리호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을 가졌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 미국 항공모함 미조리호에서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맥아더. ⓒ 미국 에너지부

두 차례의 핵 공격을 받은 직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핵무기는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감행해 수많은 미군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힘이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11월 1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일본 본토 상륙 작전을 감행할 경우, 70만명의 병력이 필요했고 이 가운데 2만5천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트루먼은 "젊은 미국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60년 후 미국 기업연구소(AEI)의 토마스 도넬리는 "나는 원폭 투하와 이에 대한 부담을 기꺼이 짊어진 트루먼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일본 침공시 양측의 희생자 수는 수백만에 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핵무기라는 대량살상무기가 '사악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 더 많은 대량살상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원폭 때문에 항복했는가?

이처럼 미국이 나치 독일보다 핵무기를 먼저 개발하고, 원폭에 힘입어 결사적으로 항전했던 일제의 패망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낳으면서 핵무기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핵무기주의(nuclearism)는 맹위를 떨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억의 정치'는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1945년 8월에 대한 기억은 핵무기에 대한 관점과 철학을 구성하는 데 역사적인 뿌리가 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을 넘어서, 앞으로 그 어떤 공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상식'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미국의 원폭 투하가 진짜로 겨냥한 상대가 누구였냐'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과연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결정적인 이유가 원폭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먼저 후자의 의문부터 따져보다. 스탠퍼드 대학의 베른스타인 교수는 "모든 사정들을 고려해봤을 때 일본이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예정되어 있었던 11월 이전에 항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고 말했다. 하버드대의 역사학 교수인 어니스트 메이는 "일본의 항복 결정은 아마도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야기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일대의 하세가와 교수는 "원폭 투하 이외의 다른 대안들이 있었고 트루먼 행정부는 그들 자신들의 논리로 이를 거부하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하세가와는 미국, 소련, 일본의 비밀 해제된 문서를 분석한 결과, 소련의 참전이라는 단일 요인만으로도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고, 트루먼이 포츠담 선언에서 천황제 유지를 보장했다면, 미국은 원폭을 투하지 않고도 8월 15일 이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을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들을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소련'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전문가인 워드 윌슨의 연구 성과가 주목된다. 그는 일본의 항복은 '원폭'보다 '소련' 요인이 더 컸다는 것을 광범위한 자료 발굴을 통해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1945년 여름에 일본은 두 가지 전략적 선택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1941년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에게 종전(終戰) 중재를 설득하는 것이고(협상파), 다른 하나는 유리한 종전 조건을 얻어낼 때까지 미국에 맞서 결사항전하는 것이었다(주전파). 이 두 가지는 8월 6일 히로시마 피폭 이후에도 고려되었다. 그러나 8월 9일 소련의 참전과 동시에 물거품이 되었고, 일본은 항복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을 고려할 때, 일본이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동시 전쟁을 치를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의 개입은 일본 지도부에게 종전이 지연되어 소련의 개입 수준이 높아질수록, 공산주의가 천황제를 휩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야기했다. 이는 일본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종전을 시도한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원폭 투하와 일본의 항복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 대목은 '원폭 투하가 다른 재래식 무기에 의한 공격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고, 더 중요하게는 일본 지도부도 그렇게 인식했느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은 1945년 봄과 여름에 걸쳐 일본 전역에 엄청난 양의 재래식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에 따라 일본은 폭격에 익숙해 있었고 원폭 투하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일본 지도부는 원폭 투하를 항복을 선택할 만큼 결정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고 이를 공식 확인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는 전쟁 수행과 관련해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최고위원회'를 소집하지 않았던 것은 이를 뒷받침 해준다. 8월 9일 오전에 소집된 최고위원회 회의에서도 나가사키 피폭 문제는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인 우메즈는 "육군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고, 이에 항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이 회의에서 일본 지도부는 소련의 개입 및 일본 내부의 동요를 더 우려했다. 이에 따라 8월 9일 새벽 소련의 개입 소식을 접한 일본 정부는 그 날 아침 즉각 최고위원회를 소집했다. 회의 시작 직후에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핵심 의제는 소련의 개입으로 모아졌다. 이 회의에서 일본 지도자들과 군부는 소련의 참전은 "일본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라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히로히토 역시 최고위원회에 원폭 투하 소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보고하라는 지시 이외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반면에, 소련의 개입 소식에 대해서는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일본 지도부에게 종전을 서둘러야 한다는 심리적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정책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진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원폭 투하는 일본의 항복을 가져온 직접적 요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이 항복의 명분을 찾는 데 '사후' 정당화 역할을 했다. 일본의 패배는 일본군의 능력이나 정신력의 부족이 아니라 적군이 예상치 못한 무기, 즉 핵무기를 사용한 데에서 온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히로히토는 항복을 선언하면서 "적은 새롭고도 잔악무도한 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종전 직후 일본의 한 고위관리는 "만약 군부가 그들의 패배가 정신력 부족이나 전략적 실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약간은 체면을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히사쓰네 관방장관은 "패배의 책임을 군부가 아니라 핵무기로 돌린다면, 이는 현명한 변명이 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미국 수뇌부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원폭 투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포츠담 회담에서 핵실험 성공 사실을 처음 들은 아이젠하워 장군은 "일본은 이미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런 끔찍한 무기로 그들을 공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 역시 7월 18일 일기장에 소련이 8월 15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소련이 참전하면 "일본은 끝장일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번스가 나중에 "러시아인들이 개입하기 전에 우리가 전쟁을 끝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듯이,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일본이 소련의 참전으로 항복하면 전후 질서 구상에서 소련에 밀릴 것을 우려했다. 트루먼은 훗날 포츠담 회담 때를 회상하면서 번스 국무장관에게 보내지 않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 때 우리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을 걱정했었소. 물론 나중에 우린 러시아의 참전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죠. 러시아인들은 그 이후로 우리에게 골칫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우려를 씻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원폭 투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원폭투하,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다음 의문, 즉 '미국의 원폭 투하가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는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이는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고,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선택한 데에는 스탈린의 소련을 상대로 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짙었다는 해석과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일본의 항복 조건으로 천황제 유지를 '조기'에 받아들였다면, 일본 역시 조기에 항복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설득력을 지닌다. 영국 정부와 미국의 일부 군 지도자들은 천황제 유지를 보장하면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판단해 트루먼에게 이를 권고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그의 핵심참모인 번스 국무장관은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 천황제 유지에 대한 보장을 명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왜 이러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지만, 미국은 결국 천황제 유지시켜 주기로 했다. 원폭 투하를 한 다음에 말이다.

이와 관련해 하세가와는 포츠담 선언에서 천황제 유지에 대한 보장이 제외된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다고 설명한다. "일본이 항복 요구를 거부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미국의 지도자들은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 원폭을 소련 참전 이전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다." 이를 뒷받침하듯,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번스는 한 과학자에게 "러시아를 유럽에서 더욱 잘 다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manageable)" 원폭 투하를 원한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원폭 투하보다도 소련의 개입이 일본의 항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주류는 왜 원폭 투하 결정론에 집착하는 것일까? 앞서 소개한 윌슨은 이것이 국가의 위신과 국제적 영향력에 대한 고려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원폭 투하가 일본 패전의 결정적 요인이라면 미국은 사악한 전쟁을 끝낸 구원자이자 유일한 핵보유국으로서의 국제적 영향력을 제고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소련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미국이 4년 동안 끝내지 못한 태평양 전쟁을 소련은 며칠 사이에 끝냈고, 이에 따라 전후 소련의 위신과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일제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그리고 일본의 결사항전으로 더 큰 인명피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미국의 원폭 투하는 스탈린의 소련을 상대로 한 '대량살상' 외교라고 보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단 두 발의 핵폭탄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 4만여명을 포함해 20여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사는 이후 인류사회에 두 가지 영향을 남기게 된다. 하나는 핵무기가 유사시 승전을 보장하는 막강한 무기이자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유용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용되는 순간 무고한 민간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부도덕성'이다. 일본을 상대로 원폭을 투하한 트루먼은 5년 후, 이러한 핵무기의 '두 얼굴'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한국전쟁에서이다.

한국의 기억

그렇다면 한국은 미국의 원폭 투하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혹시 핵무기를 '해방의 무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지식인이 일제시대 일본군이 제주도를 방어 거점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절체절명의 순간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이 도민들을 살린 것"이라고 기술한 것에서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그 유력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2010년 <중학교 사회2>와 <고등학교 세계사>를 발간한 출판사들은 대개 소련의 참전과 미국의 원폭 투하라는 두 가지 요인이 일본의 패망을 가져왔다고 간략히 서술했다. 다만 성지문화사만이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주민 340,000명 가운데 약 80000명이 즉사하였으며 방사선을 쐬거나 화상을 입은 약 40,000명이 몇 달 이내에 죽었다. 생존자들도 방사선을 쐰 영향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평생 고통을 겪었다"며 히로시마 피해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했다.

소련의 참전을 언급하지도 않은 채, 미국의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을 가져왔다고 서술한 교과서들도 많았다. 중등 교과서들을 보면, 교학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기로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도 원자폭탄 투하를 계기로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마무리 되었다"(109쪽)고 기술했고, 동화사 역시 "태평양 전쟁의 주범인 일본 또한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원자탄 투하로 무조건 항복을 해왔다"(119쪽)고 적었다.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세계사에서는 "일본이 항복권유를 무시하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제 2차 세계대전은 전체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났다"(278쪽)고 기술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의 원폭 투하와 일본의 항복을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어떤 교과서도 미국의 원폭 투하의 의도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학생들로 하여금 '일본이 당할 짓을 했다'거나 '원폭 투하가 한반도의 해방을 가져왔다'는 인식을 심어줄 여지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놀라운 점은 어떤 교과서도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피해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7만명 이상의 조선인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들 가운데 4만명 이상은 즉사했고, 2만여명은 귀국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조선인 피폭자들은 철저하게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다. 이들은 강제 징용-피폭-외면으로 이어지는 3중고를 겪으면서 20세기 역사의 모순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2009년 한국인 생존자는 피폭 부상자 약 3만명 가운데 1%가 안 되는 2,700명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인 생존자 25,100명의 1%가 조금 넘는 수준인데, 피폭자 부상자 비율이 14.3%였던 점과 비교해보면, 한국인 생존자가 대단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원폭 투하국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강제징용한 일본도, 그들의 조국인 한국도 외면했다는 증거이다. 소설가 한수산의 <까마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미국의 원폭투하로 인해 조금이라도 빨리 조국을 되찾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조선인 원폭피해자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죽음은 무참했고, 그들은 순결했다."

미국의 원폭 투하 배경과 의도에 대한 불균형적 이해와 조선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망각은 한국인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의 뿌리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무기와의 악연이 1945년부터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핵문제'의 시작점은 북핵 개발이 포착된 1989년이나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1993년부터로 간주된다. 한국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피폭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한국인들조차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른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가 핵전쟁의 참화에 휩싸일 뻔 했던 것도 관심 밖에 있어왔다. 미국이 1950년대 후반 일본에 배치된 핵무기를 한국으로 대거 이동시킨 배경 가운데 하나도 '한국인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인 핵무장 찬성 여론이 일본의 3-4배에 달할 정도로 높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의 원폭 투하가 일제 패망과 거의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 징용-피폭-외면의 역사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한국인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 주요 참고문헌

Barton Bernstein, "The Atomic Bombings Resconsidered," Foreign Affairs, January/February 1995.
William Burr, "The Atomic Bomb and the End of World War II,"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No. 162, April 27, 2007.
Ward Wilson, "The Winning Weapon?: Rethinking Nuclear Weapons in Light of Hiroshima," International Security, (Spring, 2007).
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
카이 버드·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
Barton J. Bernstein, "Truman At Potsdam: His Secret Diary," Foreign Service Journal, July/August 1980.
Tsuyoshi HASEGAWA, "The Atomic Bombs and the Soviet Invasion: What Drove Japan's Decision to Surrender?" Japan Focus, August 17, 2007, http://japanfocus.org/-Tsuyoshi-Hasegawa/2501
한수산, 『까마귀: 제5부 수레바퀴』(해냄, 2003)
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
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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