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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과학자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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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과학자들의 반란

[정욱식의 '핵과 인간'] 핵, 문명의 구원자인가 파괴자인가

'핵과 인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로버트 오펜하이머이다.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의 역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는 "전시 조국을 위해 자연으로부터 태양의 거대한 불꽃을 얻어내려는 노력을 진두지휘했던 '원자 폭탄의 아버지'이자 '미국의 프로메테우스'였다." "반항적인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 주었다. 그는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원자 폭탄의 설계와 실험을 담당한 로스앨러모스 소장을 맡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 종료 후에는 미국 핵 정책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원자력 위원회 자문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핵군축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가 핵무기의 끔찍한 위험성을 경고했을 때, 미국의 권력자들은 분노에 찬 제우스처럼 그에게 벌을 내렸다. 오펜하이머의 변신은 히틀러의 사망과 독일의 항복, 상상을 초월한 원자 폭탄 실험의 엄청난 파괴력, 일본에 원폭 투하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뒤늦은 깨달음, 그리고 미국의 수소 폭탄 개발 강행이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나타났다. 그는 트리니티 실험 다음 날 담배를 피우면서 "저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일본인들을 걱정했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원폭 투하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곧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소련을 향한 무력시위의 일환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배신감은 '원자 폭탄의 아버지'를 '수소 폭탄 개발의 반대자'로 전환시킨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사이언스북스

오펜하이머는 1953년 2월 17일 뉴욕 강연에서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핵 숭배주의에 탐닉해 있던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조속히 핵 군비통제에 나서지 않으면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인류 사회는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시대에 돌입할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펜하이머를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로 낙인찍어,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미국도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 가운데 한 마리의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예언가적 기질은 핵 테러리즘에 대한 경고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그는 1946년 미 상원 청문회에서 "서너 명이 뉴욕으로 폭탄을 몰래 가지고 들어와 도시 전체를 폭파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물론 가능합니다. 그들은 뉴욕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를 사전에 탐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핵 테러리즘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핵무기 자체를 없애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핵 군비경쟁은 지구를 수십번 파괴시킬 정도의 핵폭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 수십명이 모여 핵 테러리즘 예방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으로 2010년 워싱턴에서 처음 열렸고, 2012년 3월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핵 안보 정상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50명 안팎의 각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이 회의에는 60여년전 오펜하이머가 '핵 테러리즘' 예방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한 모든 핵무기의 폐기는 의제 밖에 있다.

과학과 문명

과학의 발전이 인류 문명의 진화를 주도한다는 것은 서구 세계의 오랜 신념이었다. 과학자들 스스로도 이러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사회적·국가적·국제적으로도 위대한 과학자를 신봉하는 문화가 팽배해 있었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도 초기에는 핵무기 개발이라는 과학적 혁신과 인류 문명의 진화가 함께할 것으로 기대했다. 연합국이 원자 폭탄이라는 신무기를 히틀러보다 먼저 손에 거머쥔다면, 인류 문명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러한 생각은 1927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맨해튼 프로젝트 핵심 인물이었던 아서 콤프턴(Arthur H. Compton)의 발언에 잘 담겨있다. "그 누구도 핵 시대의 도래를 막을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은 핵무기 사용에 대해 현명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나라들에 먼저 주어졌다." 이처럼 미국이 나치 독일이나 일제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핵무기를 신의 축복으로 신화화"하면서 "새로운 세계에서도 핵의 보유와 사용을 광범하게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했고, 이를 가능케 한 과학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핵무기는 "파시즘을 굴복시키고 전쟁 자체를 종식시킬 대량 살상무기"이면서도, "모든 문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모순덩어리였다. 이를 일찍이 간파한 인물이 오펜하이머가 "나의 신"이라고 칭송한 닐스 보어(Niels Bohr)였다. 1922년에 37세의 나이로 노벨상을 수상한 보어는 오펜하이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1943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수행한 일은 원자 폭탄 개발을 돕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이 무시무시한 무기에 대한 국제정치적, 윤리적 관점을 과학자들에게 설명하고 이를 공론화한 것이었다.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보어는 스탈린에게 맨해튼 프로젝트를 알리고 그것이 소련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임을 설득해야 핵 군비경쟁을 막을 수 있다고 봤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보어는 대담한 행보에 나섰다. 그는 1944년 초 소련으로부터 과학 연구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소련행을 타진했다. 보어의 머릿속에는 소련 과학자들과의 핵 기술 및 철학의 교류를 통해 소련을 "열린 세계"의 일부가 되게 하고, 위험천만한 물질인 핵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소련이 자국만 제외한 채로 신무기가 개발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위험한 의심으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를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하기를 원했던 루즈벨트와 처칠은 그의 소련행을 승인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보어를 구속시키거나, 적어도 그가 구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할 것이야." 처칠의 말이다.

▲ 닐스 보어
결국 보어의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미국과 영국 정부는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핵의 또 다른 얼굴인 정치적, 윤리적 성격을 강조한 보어의 영향력은 과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자들 사이에는 '왜 이 프로젝트에 영국 과학자들은 있는데, 동맹국인 소련 과학자들은 없지'라는 푸념이 생긴 것이다. 소련과 맨해튼 프로젝트를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인물도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내폭형(implosion) 기폭장치 개발에 참여한 테드 홀(Ted Hall)이 1944년 10월 휴가를 얻어 소련 무역 사무소로 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서를 넘겨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련의 스파이가 아니라 "미국의 독점은 위험하고 방지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청년 과학자였다. 그는 이후에도 내폭형 기폭장치를 비롯한 핵 개발 정보를 소련에 연거푸 넘겨주었다. 미국의 핵 독점이 계속되는 한,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고 8일 후에 독일은 항복을 선언하면서, 일부 과학자들의 회의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로스앨라모스 연구소에서 실험 물리 부서장을 맡고 있던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의 말이다. "나는 우리가 나치스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 특별히 일본인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윌슨을 비롯한 "열린 세계"론자들은 1945년 4월에 유엔 창설을 위한 첫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당시 일부 과학자들은 루즈벨트가 유엔 창설을 추진한 목적이 핵의 시대를 맞이해 핵을 주권 국가가 아닌 유엔의 통제 하에 두려는 것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결론적으로 순진한 생각으로 입증되었지만, 핵의 시대에 '세계정부론'은 핵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보어의 호소, '전 세계 과학자들이여, 각성하라'

히틀러의 자살과 나치 독일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질주는 계속됐다. 여기에는 과학자들의 불철주야 연구에 힘입어 핵무기 개발 완성이 임박했다는 과학적 성과와 함께, 미국이 핵을 거머쥐면 일본과 스탈린의 소련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핵을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과학자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의 문을 여는 데 지내한 역할을 했던 레오 질라르드(Leo Szilard)는 1945년 5월 하순 오펜하이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원자 폭탄 제조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그리 밝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5월 25일에는 국무부 장관 내정자인 제임스 번스를 만나 일본 원폭 투하가 소련의 핵무기 개발을 부채질할 것이라며, 번스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핵 강압 외교 신봉자인 번스는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면 소련이 동유럽에서 철수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며 질라드르의 경고를 일축했다. 이처럼 미국 정부는 일부 과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폭 공격 목표물 물색에 들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과학자들이 끼어들 틈은 더욱 좁아졌다.

1945년 5월 31일 잠정위원회(interim committee) 회의에서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우리는 일본에게 어떤 경고도 줄 수 없다"며, "가능한 많은 수의 사람에게 깊은 심리적 인상"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오펜하이머도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질라드르 등 미국의 핵 이용 계획에 반기를 든 '골치덩어리들'을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축출하는 데에도 공감이 이뤄졌다. 이로써 "미국은 소련에게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적절한 사전 통지를 주지 않을 계획이었고, 일본 역시 아무 경고 없이 원자 폭탄을 맞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반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질라드르는 시카고대학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랭크(James Franck) 등과 함께 원자 폭탄의 사회적, 정치적 함의를 논의할 비공식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1945년 6월 11일에 〈제임스 보고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공격이 도덕적·정치적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며, 실제로 사용하기보다 핵폭탄의 위력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항복을 유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핵무기 사용은 군사적 고려보다 장기적인 국가 정책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며,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앞으로 국제적으로 핵무기를 통제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호소했다. "(독일이 2차 대전 때 사용한) 로켓 폭탄처럼 표적을 가리지 않으면서 그것보다 100만 배는 더 파괴적인 무기를 비밀스럽게 준비해 사전 경고 없이 사용하는 나라가, 그 무기를 국제 협의를 통해 폐기하기를 바란다는 주장을 세계를 상대로 설득하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대신 유엔 대표단의 참관 하에 사막 한가운데나 무인도에서 핵폭탄을 시연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들고 워싱턴으로 향한 프랭크는 스팀슨을 만나지도 못했고, 육군은 이 보고서를 압류해 기밀로 분류해버렸다.

핵의 위험성을 간파한 과학자들의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을 상대로 한 이성적 호소가 먹혀들지 않자, 일부 과학자들은 공개적인 반핵 활동을 개시했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지 사흘 후, 보어는 <런던 타임스>를 통해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새로운 파괴 무기는 어떤 방어 수단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신형 무기의 사용을 예방하기 위해 전 세계적인 협력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문명이 가장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오늘날, 우리 세대가 짊어져야 할 후세를 위한 가장 중대한 책임을 앞에 두고,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가장 가치 있는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 인류에게 닥친 위기를 종식하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 역시 "원자 폭탄의 등장은 인간이 어디에 살든 지속적으로 갑작스러운 파괴의 위협에 놓이게 했다"며,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가리켜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이러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군사력의 탈국가화(denationalization)"를 대안으로 주창했다. 국제사회의 정치적 혼란 상태에서 전쟁을 안보와 권력 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주권 국가가 핵무기의 사용 권한을 독점하면 핵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개별 국가의 군사력을 국제기구에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세계정부론인 셈이다.

핵무기의 위험성을 절감한 과학자들은 조직적인 활동에도 나섰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을 포함한 84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1945년 10월 '미국과학자협회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FAS)'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핵무기를 비롯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 문명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는 각성을 바탕으로, 일반 대중과 정책 결정자들에게 이러한 위험을 경고하고 현명한 정책 결정의 필요성을 알리는 것이 "과학자들의 책임"이라고 봤다. 이러한 정신에 따라 이 단체는 조직 결성 직후인 1946년에 핵무기에 관한 고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하나, 혹은 전무의 세계(One World Or None)>를 발간했다. 미국과학자협회는 이 책에서 "원자 폭탄이 현실이 된 오늘날, 이 문제에 대처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없다"고 강조하고, "시간은 짧고 생존은 위험에 처했다"며 인류 사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핵의 시대에 국제 협력과 제도를 통한 평화 유지의 절박성이 더욱 커졌다고 주장했다. 핵무기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과학자들의 이러한 역할은 핵무기를 '금기의 무기'로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 조지 케넌

과학자는 아니지만, 과학자의 반란에 동참한 외교관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 정도로만 알려진 조지 케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오펜하이머가 미국과 세계의 관계에서 '과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이라면, 케넌은 '정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이다. 그리고 두 사람, 즉 "핵폭탄의 아버지"와 "봉쇄 정책의 아버지" 사이의 화학적 결합은 냉전 초기 미국 핵정책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우선 수소 폭탄 개발에 강력 반대했다. 너무 파괴력이 커서 군사 목적으로도 의미가 없고, 절대 안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미국이 수소 폭탄을 개발하면 다른 나라도 뒤따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캐넌은 1949년 11월 트루먼에게 수소 폭탄 개발을 일방적으로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자 폭탄 실험에 다급해진 트루먼 행정부는 오히려 수소 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케넌은 오펜하이머의 자문을 받아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라는 메모를 작성해 1950년 1월 20일에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전했다. 케넌 스스로가 "내가 정부에서 일하면서 썼던 글 중에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던 이 메모에는 오늘날에 봐도 놀랄 만한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나는 원자 폭탄이 '결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또 인류가 직면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손쉬운 해답을 제공할 것이라고 애매하고도 위험한 약속을 남발한 것은 우리가 명쾌한 정책을 세우는 데 필요한 현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핵폭탄을 "소련의 위협에 대한 값싼 만명통치약"으로 간주하는 미국 정부와 군부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핵무기를 미국 국방 정책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며, "단지 상대방이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비해 가지고 있는 것"임을 소련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저하게 핵무기는 방어용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이는 이후 핵 선제 불사용(No First Use)의 시원이 된다.

이처럼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프로메테우스'들은 핵무기가 여러 무기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세상을 완전히 바꿔놓을 '트랜스포머'라는 것을 간파했다. 핵무기라는 엄청나고도 광범위하며 무차별적이고 지속적인 파괴력을 갖춘 무기의 출현과 이 무기를 손에 쥔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이 조우하는 것을 목도하고는 과학과 문명의 선순환 관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 과학자들은 나치 독일로부터 인류 문명을 지키기 위해 '올림푸스 산'으로의 돌격대를 자처했지만, 그 산에서 훔친 불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책임윤리를 갖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핵의 과학적 원리뿐만 아니라 그 철학적, 윤리적, 국제정치적 의미도 간파하고 있었던 '융합 지식인'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이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핵의 위험성을 알리려고 했을 때, 정치인들은 철저하게 그들의 입을 막았다. '닥치고 연구나 하라'는 것이었다.

<주요 참고문헌>

카이 버드·마틴 셔원 지음,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년).
Dexter Masters·Katharine Way (eds,), One World Or None(Mcgraw-Hill Books, 1946).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한길사, 1998).
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
John Lewis Gaddis, George F. Kennan: An American Life, (Penguin Press, Kindle Edition, 2011).
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
조지워싱턴대 국가안보문서 보관소: http://www.gwu.edu/~nsarch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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