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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트루먼과 스탈린의 '핵' 오판이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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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전쟁, 트루먼과 스탈린의 '핵' 오판이 만나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그는 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하의 연설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이 한국과 대만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당시 남북한 간에 크고 작은 교전이 발생하고 있었고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무력통일을 공언하고 있었으며, 19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의 공산화를 고려할 때, 이러한 미국의 선택은 뜻밖이었다.

더구나 스탈린은 미국의 애치슨 라인 발표 직후에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게 되는데, 이는 그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쟁 발발의 중요 원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탈린은 미국 내 첩보망을 통해 NSC-48/2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도 한국은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 포함되지 않았다. 1949년 12월에 트루먼의 승인을 받은 이 문서는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비밀문서에 이어 애치슨의 연설을 접한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더더욱 낮다고 봤던 것이다.

스탈린은 또한 애치슨 라인을 소련-중국 관계를 이간질하려는 미국의 술책으로 간주했다. 당시 미국-소련-중국 사이의 관계에는 미묘한 흐름이 내재되어 있었다. 1949년 12월 중순, 모스크바로 날아가 스탈린을 만난 마오쩌둥은 "경제를 되살리고 국가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3∼5년간의 평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희망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Josip Broz Tito)와 같은 지도자가 아시아에 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소관계의 미묘한 갈등이 깔려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최대한 자율성을 갖는 국가 건설을 희망했던 반면에, 스탈린은 중국을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두면서 중국이 독립적인 강대국이 되는 것을 견제하려고 했다. 이를 포착한 애치슨은 미국은 국공 내전에서 손을 때고, 중국의 독립을 가장 위협하는 나라는 "소련의 제국주의"이며, "중국의 통합을 위협하는 어느 누구도 중국의 적이자 우리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국의 이념과 관계없이 관계를 맺을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훗날 애치슨의 연설 의도를 다시 포착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도한 키신저는 "애치슨의 연설은 스탈린의 신경을 가장 날카롭게 건든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정곡을 찔린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미국의 이간책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
한편 미국은 1948년부터 주한미군 철수에 착수했다. 미국은 1948년 4월 2일 논의되고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NSC-8를 통해 "가능한 빨리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위해"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 한국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고, 그 해 9월 15일부터 미군 철수를 시작했다. 이에 앞서 미국 합참은 48년 2월 21일 "미국이 한국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해야 할 전략적 이익이 거의 없다"는 의견을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전달했고 이는 NSC-8에 반영되었다. NSC는 NSC-8과 그 이후 한반도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NSC 8-2를 트루먼에게 보고했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49년 6월 30일까지 "점령군" 철수를 완료하는 대신에, 유엔 총회 결의안을 준수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며 미군 군사고문단을 잔류시킬 것을 권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NSC 8-2에서는 한국 포기와 전면적 안전보장 사이의 "중도적 방안"으로 미군 주둔은 최소화하면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할 수 있는 수준의 정책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애치슨 라인은 이러한 NSC 8-2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성격이 강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극동방어선에 한국과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으면서도 "한국과 대만이 군사적으로 침략을 당하면 우선 공격당한 국민이 이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유엔 헌장에 따라 모든 문명세계가 개입해야 한다"며, "한국에 대한 원조 포기나 중단은 가장 철저한 패배주의이며,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가장 넋 나간 짓"이라고 역설했다. 이렇듯 애치슨 발표의 모호성은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쟁을 야기했다'거나,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 주전파들의 고도의 술책이었다'는 극과 극의 평가를 낳게 된 원인이었다.

핵무기의 힘을 믿었던 트루먼

그렇다면 미국은 왜 한국을 극동방어선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일까? 또한 극동방어선에 포함되지 않은 남한이 북한의 전면 공격을 받자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반영되어 있었다. 우선 미국은 한반도를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에 대한 확고한 안보 공약 제공과 미군 주둔이 이승만의 북진 통일 의욕을 부추길 것을 우려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폭등한 군사비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경제적 동기도 컸다. 트루먼은 군비증강이 자신이 1949년에 발표한 사회복지 프로그램 '공정한 타협(Fair Deal)'의 예산 확보를 어렵게 하고, 군부의 영향력을 키워 미국이 "군사화된 요새 국가(militarized garrison state)"로 변질될 것으로 우려했다. 이에 따라 아래의 표에서 나타난 것처럼, 미국의 군사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폭등하게 된다. 전쟁 발발 직전에 GDP 대비 5% 수준이었던 군사비가 1954년에는 13.1%까지 폭등한 것이다.


재래식 군비를 줄여 경제와 복지로 전환하고자 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저렴한 방법으로 군사 태세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의 등장에 환호했던 미국은 재래식 군사력을 급격히 줄여나갔다. 이에 따라 2차 대전 종전 직후 1,200만명에 달했던 병력수는 1947년에 150만명으로 줄었고, 국방예산 역시 909억 달러에서 103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트루먼은 재래식 군사력은 대대적으로 감축하면서 핵무기를 이용한 소련 위협 대처에 중점을 두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핵공격을 담당하는 전략공군사령부(SAC)를 창설해 핵 능력을 크게 강화시켜 나가면서 핵 사용의 초점을 소련에 맞췄다. 핵 공격만으로는 소련을 제압하는데 한계가 있고 핵무기에 미국의 안보를 의존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막대한 군비에 부담을 느낀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나갔다.

이러한 경향은 미 합참이 1947년에 작성한 극비 보고서 '군사 무기로써 원자 폭탄에 대한 평가'에 잘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많은 양이 사용된다면, 원자 폭탄은 어떤 국가의 군사적 시도도 무력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를 파괴하고 장기간에 걸쳐 재건을 어렵게 만들 것"라고 강조했다. 또한 "평화를 준수할 절대적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은 핵무기의 제조와 보유량을 늘려야 하고, 그것의 향상과 운반 수단에 대한 연구개발에도 매진해야 한다"거나, "어떤 무기도 적과 맞서는 데 (원자 폭탄보다) 더 효과적일 수 없으므로, 원자 폭탄과 그 운반체를 통합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핵무기의 보유량과 생산 속도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달성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949년 8월 소련이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더욱 커졌다. 전략공군사령부는 소련의 핵실험 직후인 1949년말-50년초에 걸쳐 소련과의 전쟁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오프태클'(OffTackle)로 명명된 이 계획은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동원해 개전 초기에 소련의 군사 및 산업 시설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붕괴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비밀 해제된 1950년 4월 공군 작전 회의 문서에 따르면, 일부 사령관들은 소련의 위협이 더 커지고 소련이 유럽을 손에 넣기 이전에 소련의 핵무기고를 비롯한 전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시킨 데에는 당시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을 낮게 봤고 북한과 중국은 소련의 꼭두각시 정도로 간주한 것도 한몫했다. 비밀 해제 문서들에 따르면, CIA는 애치슨 라인 발표 하루 뒤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북한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남침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고 판단했다. 전쟁 발발 엿새를 앞둔 6월 19일 보고서에서는 북한을 독자적 결정권이 없는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규정하며, "북한이 한국에 대한 게릴라 활동, 선전, 사보타주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지만 전쟁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는 북한을 소련의 "꼭두각시" 정도로 간주했고,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지시로만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세계대전의 전주곡이 될 것"이고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이에 따라 침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북한의 남침 1주일 전에 작성된 CIA의 북한 군사력 평가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북한은 철저하게 통제받는 소련의 위성국가이기 때문에 어떠한 독자적인 구상을 행사할 수 없고, 전적으로 소련의 지원에 생존을 의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 역시 "소련의 위성국가"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라 중국의 전면적 개입 가능성도 낮게 봤다. CIA뿐만 아니라 국무부 및 육·해·공의 정보기관들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고 있었다.

또한 맥아더의 휘하에 있었던 극동사령부 역시 "어떤 아시아인들도 미국의 이익을 위협함으로써 명백한 패배를 감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의 군사적 힘에 의해 전멸"될 각오를 무릅쓸 만큼 북한도, 중국도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전후 맥락으로 볼 때, 당시 미국 정책결정자들과 군부가 맹신한 "군사적 힘"은 핵무기를 의미했다. 비록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은 무너졌지만, 압도적인 핵 우위를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9∼50년 들어 김일성은 남침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스탈린도 마음을 바꾸고 있었다. CIA가 소련의 위성국가 수준으로 봤던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집요하게 스탈린을 설득했고, "변화된 국제환경"을 고려한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 김일성의 손을 들어줬다. 냉전 여명기에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을 낮게 본 미국과 미국의 직접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본 소련의 오판이 교차하면서 비극적인 전쟁 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다.

스탈린은 왜 마음을 바꿨을까?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의문 가운데 하나는 왜 스탈린이 마음을 바꿨느냐는 것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1950년 5월 14일 서신을 보내 "변화된 국제환경을 고려해, 통일을 향한 북한의 (남침) 제안에 우리는 동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침 승인 및 지원을 요청했던 김일성의 제안을 1949년 내내 거부했었다.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있고, 북한의 군사력이 신속한 통일을 달성할 만큼 강력하지 않으며,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 활동이 기대만큼 활발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던 스탈린도 1950년 들어 마음을 바꿨다. 그가 정책을 바꾼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고, 그가 말한 "변화된 국제환경"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 선회 직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 국제정세의 변화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당시 스탈린은 위협과 기회를 동시에 만났다. 소련에게 위협적인 국제정세의 변화로는 미국의 핵 독점 및 우위, 1947년 6월부터 시작된 마셜 플랜과 48년 6월부터 시작돼 1년 동안 지속된 베를린 위기, 49년 4월 4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대규모의 주일미군을 주둔시키면서 일본을 소련 봉쇄의 아시아 기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 핵심이다. 소련은 미국 주도의 마셜 플랜과 나토 창설을 소련 봉쇄를 강화하고 침공 준비에 착수한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을 일본의 재침략 준비로 여겼다. 후술하겠지만,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동의 하에 이뤄진 북한의 남침은 미국의 힘을 업은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한 '예방 전쟁'의 성격도 지니게 된다.

한편 소련의 최초 핵실험(49년 8월 29일), 중국의 공산화 및 중화인민공화국 선포(49년 10월 1일), 한국과 대만을 아시아 방어선에서 제외시킨 애치슨 라인의 선포(50년 1월 12일), 중소 동맹조약 체결(50년 2월) 등은 소련에게 유리한 정세 변화로 간주됐다. 특히 핵실험 성공은 스탈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비밀 해제된 소련 문서를 분석한 예브게니 바자노프(Evgueni Bajanov)는 스탈린이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핵실험 성공에 있었다며, "그는 공산권의 힘에 보다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소련의 외교 전문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탈린 동지는 김일성에게 국제 환경이 한반도 통일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변했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중략) 중국은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오는 정보는 이러한 전망을 뒷받침해준다. 승리의 분위기는 간섭받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련이 원자폭탄을 갖고 있고 우리의 입장이 평양과 더욱 밀접해지고 있는 사실로 인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응해 스탈린은 동유럽에 대한 직접 개입을 통한 세력권과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미국과 서유럽에 대한 강경 자세를 취하는 한편, 아시아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했다. 미국이 일본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일본을 재무장시켜 동아시아 반공 전선의 기축으로 삼으려고 한 움직임에 맞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통해 이를 상쇄시키려고 했던 계산이 작동한 것이다. 이러한 계산의 배경에는 핵실험 성공에 따른 자신감이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

중국의 공산화 성공 역시 스탈린의 변심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화를 세 가지 차원에서 바라봤다. 첫째는 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소련의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을 견제할 필요가 생겼으며, 셋째는 '1945년 소련이 국민당과 체결한 중소 조약을 새로운 조약으로 개정하자는 마오쩌둥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이 이러한 세 가지 고려 사항을 일거에 해결해줄 것으로 믿었다.

일단 스탈린은 자신의 예상을 뒤엎고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본토에서 축출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을 새로운 기회로 인식했다.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달성하고 미국의 대소 봉쇄 정책에 대한 완충지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극동지역에서 미국과의 대결시 크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중국의 공산화는 경쟁자의 부상 가능성을 잉태했는데, 이는 스탈린에게 중국의 공산화가 '양날의 칼(double-edged sword)'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마오쩌둥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스탈린은 1950년 2월에 중소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 따라 소련은 1945년 국민당과의 조약을 통해 확보했던 다롄과 뤼순이라는 부동항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중소 조약의 정확한 명칭은 '우호동맹상호원조 조약(Treaty of Friendship, Alliance and Mutual Assistance)'이다. 이 조약을 통해 양국은 제3자와의 무력 충돌시 상호 원조한다고 합의했는데, 이는 소련이 중국에게 안보 우산을 제공한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국은 ▲만주와 신장에서 소련의 광산 및 철도 이용 인정 ▲외몽고 독립 인정 ▲다롄과 뤼순 해군기지 소련군 사용 '한시적' 허용 등을 약속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강압에 못 이겨 이러한 양보를 한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훗날 흐루쇼프 만난 자리에서 스탈린은 중국을 "반(半)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중국의 공산화에 따른 기회와 도전에 동시에 직면하고 있었던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 승인을 '남는 장사'로 간주했다. 중국 공산화의 성공은 소련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도, 그래서 미국과의 직접 충돌 위험을 덜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한반도 전체로 확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동시에 한국전쟁은 아시아에서 소련-중국-북한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위계질서를 공고히 함으로써, 중국이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을 예방해줄 것으로 믿었다. 끝으로 스탈린의 희망처럼 한반도 공산화에 성공하면 중소 조약으로 상실한 부동항을 한반도에서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계산 하에 스탈린은 1950년 4월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남침 승인의 조건으로 마오쩌둥의 동의와 지원 약속을 받아낼 것을 요구했다. 또한 5월 14일에는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소련은 김일성의 제안에 동의하기로 했고 최종 결정은 북한과 중국에 달려 있다며, 공을 베이징으로 넘겨 버렸다. 이는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북한 방어의 책임을 중국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실제로 맥아더가 이끈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해 북한이 절멸의 위기에 처하자, 소련은 중국의 참전을 강하게 압박해 이를 성사시켰다.

또한 당시 스탈린은 중국의 대만 공격과 북한의 남한 공격 사이의 전략적 우선순위를 검토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북한의 남침에 더 큰 비중을 뒀다. 하나는 중국이 대만을 공격을 위해서는 소련의 해공군 지원을 비롯한 군사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스탈린은 이를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카드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의 영향력은 '중국은 대만 공격에 앞서 북한의 남침부터 지원하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탈린은 또한 중국이 한국전쟁과 대만 공격을 동시에 치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는데, 북한의 남침을 통한 중국의 대만 공격을 억제하는 것은 장차 중국의 강대국화를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카드로 인식했다.

여기서 한반도 공산화와 중국의 대만 통일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김일성-마오쩌둥-스탈린 사이에 전략적 마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은 상기한 이유 때문에 한반도 통일을 우선시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한반도를 공산화할 필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중국이 대만 정복을 달성해 내전을 종식시킬 때가지는 남한 공격을 미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키신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뿐만 아니라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전략적 계산도 달랐다고 주장한다. 애치슨 라인이 "아무리 모호하더라도, 김일성은 미국이 두 가지의 공산주의 군사 정복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중국이 대만 공격에 나서기 전에 남한 점령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마음을 바꾼 데에는 그의 마오쩌둥에 대한 경계심을 활용한 김일성의 외교술도 한몫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기 위해 소련-중국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이용했다. "스탈린의 지시가 곧 법"이라며 그를 한껏 치켜세우면서도 스탈린이 남침 계획을 승인·지원해주지 않으면 마오쩌둥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는 마오쩌둥에 대한 스탈린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이 장차 아시아에서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우려했는데, 스탈린으로부터 거부당한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마오쩌둥이 동의할 경우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면서 이 사실을 마오쩌둥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핵실험 성공이 안겨준 오만함

스탈린은 또한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끝난 것이 극동지역에서 미국의 개입을 억제할 수 있는 안보 환경을 가져왔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당시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의 예상보다 5년 정도 빨랐는데, 이에 따라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소련과의 충돌시 핵전쟁의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이를 반영하듯 스탈린은 "미국에서는 소련이 핵보유국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조선 문제에 개입할 수 없을 것이란 분위기가 우세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소련의 핵실험 7개월 후이자 한국전쟁 발발 2개월 전인 1950년 4월에 작성된 CIA의 극비문서에 따르면,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는 소련의 공격 범위 내에 있는 지역에서 미국의 공군 및 상륙 작전에 심대한 영향을 줄 것"이고, "소련의 핵 보복 능력은 미국이 군사적으로 원자폭탄 사용을 전략적 우선순위에 두는 계획에 대해 의문을 야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소련 및 중국에 대한 핵 공격을 검토했지만, 소련의 핵 보복을 포함한 확전의 가능성도 동시에 우려했다. 영국 정부 역시 미국의 원폭 사용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트루먼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반면 미국의 핵 위협에 노출된 마오쩌둥은 소련에게 핵 보복을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끝난 바로 그 시기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처럼 핵무기를 둘러싼 강대국 지도자들의 다양한 시각을 표출시켰다.

결국 한국전쟁은 트루먼과 스탈린 모두 '핵의 위력'에 대한 맹신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 역시 소련의 "꼭두각시" 정도로 간주하면서 미국보다 핵 전력이 크게 뒤졌던 소련이 북한과 중국에게 남한 공격을 명령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상당 기간 핵 독점과 우위를 자신했던 트루먼은 재래식 군사력을 급감하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건 방심이었다. 주한미군의 철수와 애치슨 라인 선포는 미국의 개입 의지에 심각한 의문을 야기했고, 핵의 위력을 믿고 단행한 재래식 군사력의 대대적인 감축은 미군이 한국전쟁 초기와 중국군의 개입 당시 고전을 면치 못하게 한 물리적 요인이었다.

반면 핵실험 성공으로 대담해진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구를 받아들였다.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스탈린도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을 불사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개입 가능성도 낮고 개입하더라도 중국을 앞세우면 소련이 직접 피 흘릴 일은 없다고 봤다.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이 한국전쟁에 신속히 개입하자 미국의 힘을 빠지게 해 냉전 체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역시 오판이었다. 한국전쟁을 소련이 일으키는 3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으로 간주한 미국은 엄청난 속도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아시아와 유럽에서 대소 봉쇄를 위한 동맹 체제 강화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주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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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
CIA: http://www.foia.cia.gov
우드로 윌슨센터 냉전사 기록실: http://www.wilsoncen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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