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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핵보유가 만날 때

[정욱식의 '핵과 인간'] 히틀러의 야만과 아인슈타인의 편지

'20세기 야만의 상징' 히틀러의 존재는 여러 과학자들로 하여금 엄청난 과학적 발견에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품게 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갈 즈음, 일부 물리학자들은 엄청난 신무기의 출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핵분열 연쇄반응을 이용한 원자 폭탄이 바로 그것이었다. 과학자들은 '누가 이 무기를 먼저 손에 넣느냐에 따라 인류역사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을 직시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이 훗날 인류 절멸의 무기로 일컬어지는 핵무기의 과학적 발견과 조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의 눈에는 히틀러가 먼저 가지면 서구 문명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고 봤다. 반면 연합국이 먼저 가지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히틀러는 자신과 독일 민족을 일체화하면서 다른 민족의 말살을 통해 독일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추구한 인물이다. 그는 <나의 투쟁>에 이렇게 썼다. "엄청난 압제로부터 한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서, 또는 혹독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니면 불안하게 성장했기에 휴식하지 못하는 그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느 날 운명은 이 목적을 이룰 사람을 보내줄 것이다. 그 사람이 마침내 오랫동안 갈망해 온 것을 성취할 것이다." 그가 말한 "그 사람"은 바로 히틀러 자신이었다. 그는 1937년 11월에 열린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나를 찾아낸 사실이, 수백만명 중에서 나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우리 시대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을 찾아냈습니다. 이것이 독일의 운명입니다."

나치 연구의 대가인 리처드 오버리가 <독재자들>에서 밝힌 것처럼, "히틀러의 과격한 민족주의는 옛 제국의 질서가 무너졌을 때, 전쟁에 패한 독일의 도덕적, 물질적 혼란으로부터 잉태"되었고, "국제사회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천민 취급을" 당한 "고립감 탓에 한층 더 극단적인 형태의 혁명 정치로 나아갔고 결국 독재 체제가 출현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패배의 결과로 강요된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인 것은 독일 민족을 노예 신세로 전락시킨 것이라고 생각했고, 민족의 패배와 모욕을 자신이 직접 당한 굴욕으로 간주했다. "미치광이에 가까울 정도로 통제할 수 없는 복수심"은 이렇게 타올랐다.

그의 눈에는 부르주아 이익에 충실한 자본주의도, 그 자본주의의 혁파를 내세운 공산주의도 타도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생존의 열쇠는 역사가 계급 투쟁이 아니라 인종 투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깨달을 때 찾을 수 있고, "국가 혁명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종과, 인종 공동체가 창조한 문화와 사회 제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보존"되어야 할 절대적 가치이자 목표였고, 이는 독일 민족을 위협하는 모든 민족과 이념을 절멸시킬 때 가능하다고 봤다. 안타깝게도 많은 독일인들도 이러한 생각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열광했다. 20세기 최대 비극은 이렇게 잉태되고 말았다.

이처럼 다른 인종의 절멸을 추구한 '인간' 히틀러와 인류 절멸의 과학적 결과인 '핵'의 만남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러한 공포심은 히틀러와 함께 "20세기의 쌍둥이 악마"로 불렸던, 그러나 히틀러와 '운명의 라이벌'에 있었던 스탈린이 미국의 핵실험 성공 소식을 듣고는 히틀러가 먼저 갖지 못한 게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에서도 잘 나타났다. '히틀러가 원자 폭탄을 갖는다면?' 이 끔찍한 가정이 가져올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과학자들은 기꺼이 제우스에게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를 자처했다.

아인슈타인의 편지

원자 폭탄의 과학적 원리를 발견한 과학자들은 다급해졌다. 원자탄 '이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레오 질라르드(Leo Szilard)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경제학자 알렉산더 삭스(Alexander Sachs)와 함께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만나 독일이 먼저 핵폭탄을 만들 가능성을 제기했다. 실제로 독일은 1939년 4월 '우라늄 클럽'으로 불렸던 원자력 프로젝트를 개시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우라늄 광산 판매를 중단시켰다. 이는 히틀러의 독일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되었다. 평화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은 고민에 빠졌고, 결국 두 사람의 설득에 따라 그 해 8월 2일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전문은 아래와 같다.

"최근 페르미(E. Fermi)와 질라르드가 저와의 통신을 통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우라늄을 이용한 새로운 에너지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신의 주목과, 필요하다면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당신이 아래와 같은 사실과 권고에 주목할 것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지난 4개월 동안 미국의 페르미와 질라르드, 그리고 독일의 졸리어트(Joilot)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많은 양의 우라늄으로 핵분열 연쇄반응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 연쇄반응은 엄청난 에너지와 대량의 새로운 원소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확실히 가까운 미래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엄청나게 강력한 새로운 유형의 폭탄 제조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폭탄은 단 한 발만 보트나 항구에서 터트리면, 항구 전체와 주변 지역을 파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폭탄은 너무 무거워서 항공기로는 운반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미국은 우라늄 광산이 많지 않습니다. 캐나다와 체코슬로바키아에는 좋은 우라늄 광산이 있습니다. 반면 벨기에령 콩고에는 최상의 우라늄 광산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대통령께서 행정부와 핵분열 연쇄반응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이 계속 접촉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당신이 신임하는 사람에게 비밀리에 이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임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정부 부처에게 진전되는 상황을 알리고 적절한 정부의 대응책을 권고하며 미국이 우라늄 광산을 확보하는 문제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2) 예산을 지원하고 연구 시설을 갖춘 산업체와의 협력을 촉진시켜, 현재 대학교 연구소 예산 수준으로 한정되어 있는 연구실험 활동을 독려한다.

독일은 최근 점령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우라늄 광석을 판매하는 것을 중단시켰습니다. 독일이 그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독일의 국무부 차관 아들인 폰 바이츠자커가 미국이 현재 우라늄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베를린 소재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에 배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루즈벨트에게 신속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삭스가 루즈벨트를 만나 아인슈타인의 편지 내용을 전달한 것은 10월 11일이었다. 또한 루즈벨트는 아인슈타인과 질라르드가 제안한 '우라늄 위원회'에 단지 6천 달러의 예산만 투입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1940년 3월 7일과 4월 25일에 또 다시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의 심각성을 주지시키려고 했다. 또한 루즈벨트의 과학 자문역인 밴니버 부시와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루즈벨트에게 서둘러 달라고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두 과학자의 메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영국 망명 중이었던 오토 프리치와 루돌프 페이얼스가 원자폭탄의 엄청난 폭발력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낸 것이다. 이들은 불과 5kg의 우라늄에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다이너마이트 수천톤에 달하는 폭발력을 보일 것이라는 요지의 편지를 영국 정부에 전달했다. 편지의 골자는 독일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할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은 연합국이 흡사한 무기를 가지고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메모를 전달받은 영국 정부의 우라늄 위원회(MAUD)는 과학적 검증에 나섰고, 이들의 주장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1941년 10월 9일 처칠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전달받은 루즈벨트는 핵무기 개발을 승인하고 만다. 극비리에 맨해튼 프로젝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원자탄 개발을 독촉한 것을 두고, 자기 인생의 최대 실수 가운데 하나라고 자책했다. '억제용'으로만 사용될 것으로 믿었던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되고 또한 핵군비경쟁이 격화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총알은 사람을 죽이지만, 핵무기는 도시를 파괴한다. 탱크로 총알을 막을 수 있지만,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핵무기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지적처럼, 파괴력이 엄청나 마땅한 방호 수단이 없고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분하지 않으며 그 피해가 비(非) 교전 당사자는 물론 주변국과 미래 세대에까지 미치는 핵무기는 다른 무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선진 민주국가라고 자부하던 미국이 위험천만한 무기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에 깊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핵무기 : 과학과 정치의 만남

핵무기는 과학과 정치의 만남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무기이다. 공교롭게도 1939년 같은 해에 이뤄진 경이로운 과학적 발견, 즉 '핵분열 연쇄반응'의 발견과 끔찍한 정치적 사건인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인류사회가 목도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무기를 만드는 근거로 작용했다. 위에서 소개한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과학과 정치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잠깐 핵무기의 과학적 발견 과정과 그 원리를 살펴보자. 핵에 대한 기술적 이해는 이 물건에 대한 정치적·윤리적 판단 능력을 높이는 데에 대단히 유용하다.

핵무기는 핵분열이나 핵융합 반응에 의한 폭발을 대량파괴에 이용할 목적으로 제조된 무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기본 원리는 2천년 넘게 이어져온 과학적 상식을 뒤집는 것으로 시작됐다. 고대 그리스 과학자인 데모크리티우스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물질을 원자(Atom)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면서 원자에 다른 원소들이 들어있다는 과학적 발견이 잇따라 나왔다. 1908년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원자가 전자(electron), 양성자(proton) 등이 포함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1932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채드윅은 중성자(neutron)의 존재를 알아냈다. 베릴륨으로 만들어진 얇은 판에 α선을 충돌시키면 전하(electric charge)를 띠지 않는 입자가 튀어나왔는데, 이 입자를 중성자라고 불렀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에 힘입어 원자는 중앙에 원자핵(nucleus)이 있고 그 주변을 양성자와 중성자가 도는 모양이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1939년 들어서는 핵분열 반응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자연에서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 원자가 원자핵을 흡수하면 새로운 원소를 만들어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오토 프리치는 특정한 조건에서 원자핵이 두 개로 분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 이를 핵분열(fission)이라고 불렀다. 정리하자면, 원자폭탄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핵분열 반응은 핵물질이 중성자 1개를 흡수하여 2개의 핵분열 생성물질로 쪼개지면서 2-3개의 중성자를 방출해 에너지를 발산하는 물리적 과정을 일컫는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이러한 핵분열 반응시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 원자(핵물질)가 두 개로 분열될 수 있다. 둘째, 우라늄 원자를 두 개 이상으로 분열시킨 중성자가 또 다시 생성되어 우라늄 원자를 계속 분열시켜 하나의 원자핵이 기하급수적으로 분열한다는 '핵분열 연쇄방응'이 나타난다. 여기서 핵분열 연쇄반응이 지속되는, 즉 '임계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핵분열 물질이 필요한데 이를 '임계량'이라고 한다. 셋째, 이러한 핵분열 반응시 아인슈타인의 공식, 즉 E=MC2(E 에너지, M 질량, C 속도)에 따라 강력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핵분열 반응은 동일한 질량의 다이너마이트보다 1만배의 폭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발견이 곧바로 핵무기 제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핵분열 반응을 연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을 생산하는 것은 과학적 발견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 소련,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과학자들도 원자폭탄의 이론적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대규모의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의 생산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우라늄 위원회는 거대한 산업과 재정 능력을 보유한 미국은 가능할 것으로 봤다. 영국의 강력한 권유로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착수한 미국은 우선 무기급 농축 프로그램 확보에 나섰다. 천연 우라늄의 99% 이상을 차지하는 U-238은 핵분열 물질이 아닌 반면에, 핵분열 물질인 U-235는 0.7%만 존재한다. 이에 따라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연우라늄을 농축해 U-235의 농도를 높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라늄 농축'은 질량이 작은 U-235를 U-238로부터 분리해 U-235의 농도를 늘리는 작업을 의미한다. 대개 농도 3-5%의 U-235는 핵 연료로, 90% 이상은 무기급으로 분류된다.

U-235와 함께 또 하나의 핵분열 물질은 플루토늄이다. U-235가 자연에 존재하는 우라늄 동위원소인 반면에 플루토늄은 인간의 발명품에 해당한다. 1940년에 버클리대의 과학자들은 U-238이 1개의 중성자를 흡수하면 새로운 원소로 변형된다는 것을 알아내, 이를 '플루토늄'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사용후 연료봉에 남아 있는 핵 물질로부터 플루토늄을 분리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버클리의 과학자들은 1941년에 이르러 다른 물질로부터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플루토늄은 우라늄보다 적은 양으로도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어 무기로서의 유용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이에 따라 맨해튼 프로젝트 팀은 우라늄 프로그램과 함께 플루토늄 프로그램도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여러 지역에 원자로를 건설했고, 여기서 나온 사용후 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 생산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핵무기 연구의 중심지인 로스앨라모스 연구소는 1945년 2월에 무기급 우라늄과 함께 플루토늄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핵분열 물질을 손에 넣는다고 바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핵분열 물질이 연쇄반응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게 할 수 있는 폭발장치(혹은 기폭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핵분열 연쇄반응은 불과 1백만분의 1초 사이에 이뤄지기 때문에, 고성능 기폭장치가 없으면 핵분열 반응을 유도·통제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미국은 두 가지 방안을 고안해냈다. 하나는 총류형(gun-type)이다. 고농축 우라늄을 미임계량 상태의 두 개의 반구로 만들어 분리시킨 다음, 재래식 화약의 폭발력으로 두 개의 반구를 초고속으로 합치해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때 화약의 폭발 속도는 핵분열 연쇄반응보다 빠른 초속 3km 이내에 다다라야 한다.

▲ guntype(왼쪽)과 implosion(오른쪽)
또 하나의 기폭장치는 내폭형(implosion)이다. 기본적인 원리는 내폭에 의한 압축파로 플루토늄의 초임계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폭장치의 작동여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데, 이에 따라 미국은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를 실시했다. 참고로 플루토늄 핵폭탄은 우라늄 폭탄에 비해 핵물질의 양이 적게 사용되어 폭탄의 무게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에 따라 현대식 핵탄두는 주로 이 방식으로 제조된다.

'죽음의 여정'

위와 같은 원자 폭탄의 과학적 원리는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이 알고 있었고, 히틀러의 독일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대량의 핵분열 물질을 생산해낼 수 있느냐'에 있었다. 원자 폭탄 개발 가능성을 반신반의했던 루즈벨트는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해 '제우스의 불'을 훔치기로 결심했다. 1942년 8월 13일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육군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을 총책임자로 두고,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 박사를 연구책임자로 하는 이 프로젝트에는 무려 13만명의 연인원과 현재가치로 약 300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됐다. 여기에는 영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코드네임 '튜브 합금(Tube Alloys)'에 참여했던 영국 과학자들을 비롯해, 캐나다와 호주의 과학자들도 참여했다. 미국 국가적 수준을 넘어 연합국의 공동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에게조차 비밀로 붙일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핵분열 물질인 플루토늄 생산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은 테네시주의 오크 릿지에 건설되었고, 핵무기 연구 및 설계를 담당할 국립연구소는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라모스에 만들어졌다. '히틀러보다 먼저'를 가슴 속에 새긴 과학자들은 불철주야로 원자 폭탄 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1945년 초여름 3기의 핵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3기의 핵무기 가운데 2기는 플루토늄 핵폭탄이었는데, 각각 '가제트(Gadget)'와 '뚱보(Fat Ma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1개의 우라늄 핵폭탄은 '꼬마(Little Boy)'로 불렸다.

▲ 트리니티 실험 장면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 30분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즉 트리니티(Trinity)라는 이름을 달고 인류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이 단행됐다. 30m 높이의 탑에 선 '가제트'는 엄청난 폭발음과 햇빛보다 강렬한 섬광을 내품으며 '핵의 시대(Atomic Age)'의 개막을 알렸다. 사전 예측의 3-4배를 뛰어 넘어 20킬로톤의 폭발력을 보인 이 실험은 12km 상공까지 치솟은 버섯구름과 깊이 3m, 폭 330m의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고 냈다. '화구(Fireball)'를 목도한 실험 책임자 케네스 바인브릿지 박사는 오펜하이머에게 "이제 우리 모두는 개자식들이 됐다(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고 탄식했다. 오펜하이머 역시 핵실험을 지켜보면서 힌두교의 한 구절을 인용해 "나는 죽음, 세계의 파괴자가 됐다"고 자책했다. 자신의 처지를 인간에게 불을 건넸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프로메테우스,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을 종식시켜 줄 것으로 믿었던 알프레드 노벨에 비유하기도 했다 인류의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듯, 트리니티가 실시된 사막의 이름은 '죽음의 여정(Journey of Death)'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연합국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간주한 '히틀러의 핵폭탄' 개발은 얼마나 진전되었었을까? 연합국은 '제3제국(Third Reich)' 패망 직후, 원자 폭탄 개발 시설과 과학자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결론은 히틀러가 핵 개발을 시도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무기화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역사학자 라니어 칼쉬(Rainer Karlsch)는 2005년에 출간한 '히틀러의 폭탄(Hitler's Bomb)'에서 나치 독일은 1944년과 45년에 걸쳐 세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책을 면밀하게 검토한 독일 주간 <슈피겔>은 칼쉬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어쨌든,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자살했고, 8일 후에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 주요 참고문헌

1. 리처드 오버리 지음, 조행복 번역, "독재자들: 히틀러 대 스탈린, 권력 작동의 비밀" (교양인, 2008년)
2. Joseph Cirincione, "Bomb Scare: The History & Future of Nuclear Weap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3. 정욱식, "글로벌 아마겟돈: 핵무기와 NPT" (책세상, 2010년)
4. 미국 에너지부 홈페이지의 '맨해튼 프로젝트'
5. Klaus Wiegrefe, "How Close Was Hitler to the A-Bomb?", Spiegel Online, March 14, 2005.

* 이어질 글 : 트루먼의 '장군' 스탈린의 '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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