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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마법사" 맥아더, '승자의 저주'에 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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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마법사" 맥아더, '승자의 저주'에 걸리다

[정욱식의 '핵과 인간']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핵 위협

미국의 신속한 한반도 참전 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핵 우위에 대한 자신감이다. 비록 대규모의 군비 감축으로 재래식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지만, 트루먼은 핵 우위를 통해 한국전쟁 참전에 따른 전략적 위험과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의 세계 전략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전쟁 개입을 선택한 미국의 가장 큰 우려 사항은 소련의 유럽 침공 가능성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트루먼은 한국전쟁 개입 직후인 7월 11일 영국에 원자 폭탄 탑재가 가능한 전략 폭격기 B-29를 배치했다.

이는 미영동맹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과시한 것이자, 영국의 우려와 미국 공화당의 공세를 동시에 달래고자 하는 성격이 짙었다. 동시에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보다 유럽 방어에 압도적인 중요성을 부과하고 동북아에 쏠린 미국 군사력의 공백을 틈타 소련의 유럽 공격을 억제하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핵 전문가들인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와 버드(Kai Bir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원자 폭탄은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 참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국이 핵무기가 없었다면,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도) 유럽 방어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핵 우위를 자신한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억제하고 북한군의 총공세로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남침 소식이 전해진 6월 25일 일요일 저녁, 트루먼은 반덴버그(Hoyt S. Vandenberg) 공군참모총장에게 미국 전폭기가 한반도 인근의 소련 기지를 쓸어버릴 수 있는지 물었다. 반덴버그는 핵무기를 사용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답변했고, 이에 트루먼은 소련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 핵공격을 단행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개전 초기 유엔군이 북한군에 의해 패퇴를 거듭하면서 트루먼 행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핵의 위력에 너무 의지한 탓인지, 참전 미군은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준비가 안 된 어리고 경험 없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중국과 소련의 개입을 걱정하기에 앞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 자체도 버거워진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미국의 핵공격 계획은 소련에 맞춰져 있었다. 이로 인해 육군보다는 핵 공격을 담당하는 공군에게 예산 배정의 우선권이 주어졌다. 또한 한반도와 같이 작고 대규모의 군사 및 산업 시설이 없는 지역에 핵무기를 투하한다는 것도 낯선 일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해 트루먼의 핵 공격 계획은 북한보다는 소련의 개입 억제 및 개입시 보복에 맞춰졌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국의 핵의 위력에 대한 맹신은 소련과의 갈등을 제외한다면, 미국인이 또 다시 전쟁터로 나갈 일을 없을 것이라는 환상을 야기했고, 그만큼 한국전쟁과 같은 재래식 전쟁에 대한 대비도 소홀한 원인이었다. 결국 핵 독점과 우위가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는 미국의 믿음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급격하고도 예상치 못하게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을 거듭하자 지상군으로는 이를 저지하는데 한계를 느낀 미 육군 참모부는 급기야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 1950년 12월 4일 웨이크 섬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트루먼과 맥아더. ⓒ트루먼 도서관


"핵무기는 그냥 무기가 아니야!"

그러나 당시 <뉴욕 타임즈>가 지적한 것처럼 "원자폭탄은 (일반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이 신문은 "한반도에서 원자탄 사용은 아시아에서 우방국들과의 관계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원자탄을 투하할 만한 적절한 목표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시아의 친구들과 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잃기를 원한다면, 북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억은 한국전쟁에서 원자탄 사용에 따른 인종 차별주의 문제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국무부 일부 관리들 역시 소련이나 중국이 참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을 상대로 핵 공격을 가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 정책기획국의 새비지(Carton Savage)는 도덕적 차원에서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군사적으로는 원자 폭탄 투하에도 불구하고 전세가 바뀌지 않을 우려가 있으며, 외교적으로는 유엔과의 관계에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의 상관인 폴 니츠 국장에게 소련이나 중국이 개입하기 전에는 핵무기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니츠는 니콜스(Kenneth D. Nichols) 장군을 만나 그의 의견을 물었고, 니콜스는 새비지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면서도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위험에 직면하면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전 초기 트루먼 대통령 역시 원자폭탄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7월 27일 기자회견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답했다. 미군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핵무기 사용에 신중했다. 미 육군의 정보 부대는 7월 중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원폭 사용의 신중론을 제기했다. "지금 단계에서의 원폭 사용은 아시아인들의 생명을 멸시한다는 미국 정책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로 인해 아시아 국가들의 반미 감정은 핵무기 사용의 군사적 이점을 완전히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공군의 심리전 부대는 8월 초 북한군을 상대로 한 원자탄 공격이 남한 영토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자 발생으로 인해 "아시아의 반미감정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핵무기 사용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맥아더는 1950년 7월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리지웨이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원자폭탄 사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청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구상이 있었다.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에는 터널과 다리가 많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차단공격을 가하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할 둘도 없는 곳이다."

맥아더의 청원을 접한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7월 중순 일본 도쿄를 방문해 맥아더와 핵무기 사용에 관한 협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을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서는 원폭 투하가 필요하다며, B-29 전폭기의 운용 권한을 자신에게 위임해주면 그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맥아더는 북한에 대규모의 공습을 가하는 한편, "적의 주요 축선을 방사능 물질로 만들어 한반도를 만주와 분리시키겠다"는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최대 10일 안에 승리"할 수 있고, 중국군의 개입 저지는 물론이고 미국이 중국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점도 전달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훗날 북중 국경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기 전에, 북한에 "30-50개의 원자폭탄 투하를 희망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

반덴버그는 맥아더의 요청에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지만, 워싱턴에 돌아간 이후 신중론에 직면했다. 미국의 원폭 투하가 동맹국들로 하여금 미국에 등을 돌리게 만들고,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또한 트루먼은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라는 인식이 강해, 핵 사용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이에 따라 트루먼은 '절충'을 선택했다. 핵 공격 태세를 갖추기 위해 10기의 B-29 전폭기를 괌에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면서도 핵폭탄의 핵심 물질(fissile core)이 '분리된' 폭탄을 탑재하게 함으로써 핵 사용의 최종 권한을 자신에게 담겨둔 것이다.

'강압 외교'의 수단이든,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절대 무기'이든 원자폭탄을 한국전쟁이 이용하기로 한 트루먼은 8월 1일 "즉각적인 핵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제9 전폭비행단을 괌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명령에 따라 10기의 B-29 전폭기가 미국 본토에서 괌으로 출격했고 이 가운데 1기는 샌프란시스코 인근 공군기지에서 추락해 수십명이 사망하고 기지 일대가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전폭기 배치는 대외적으로 미국의 단호함을 과시해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극비에 해당하는 전폭기 파견 정보를 <뉴욕타임즈>에 흘려 "적들에게도 알렸다."

괌에 핵 전폭기를 배치할 즈음, 미국 내부에서는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 한반도나 그 인근에 원자 폭탄을 투하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려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사용이 필요하다는 강경론을 펴고 있었지만, 미국 군부와 행정부는 보다 신중한 입장이었다. 대체로 국무부는 소련이나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경우 원폭 투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군부의 지배적인 의견은 유엔군이 북한군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될 상황에 직면하면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 투입된 바 있는 B-29를 통한 '강압 외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을 염두에 두고 8월 들어 동북아에 자국군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무력시위'를 통해 중국군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괌에 파견되었던 B-29 전폭기들도 이렇다 할 소득 없이 8월말에 미국 본토로 돌아왔다.

인천상륙작전과 승자의 저주

미국이 원자탄 투하를 검토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전세는 9월 중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맥아더가 주도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고 곧바로 서울을 수복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자연스럽게 핵 공격론도 수그러들었다. 이를 상징하듯 열렬한 핵 공격론자였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만큼, 핵무기 사용 결정을 유보해달라는 입장을 워싱턴에 전달할 만큼 여유를 부리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아시아에 관한 한 자신이 전문가라고 으스대며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맥아더에게 인천상륙작전은 "조선인민군에 대한 승리"이자 "워싱턴에 있는 반대 세력"에 대한 승리였고, 애치슨의 표현처럼 "인천의 마법사"가 된 맥아더를 막아설 사람은 없었다.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과 처음으로 만난 맥아더는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만약 "중공군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온다면"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중국군을 쓸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승자의 저주'에 직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맥아더는 중국군이 절대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며 38선 이북으로의 진군을 트루먼에게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38선을 넘어 북진하되, 중국이나 소련과의 충돌은 피하라는 모호한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미국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혹한과 함께 중국군의 공포가 어우러진 '콜디스트 윈터'였다. "냉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북진 결정이 중국군의 개입을 야기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이 임기 중에 내린 가장 재앙적인 결정"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가 말한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한 미국은 핵 공격을 더욱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다. 3차 세계대전을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문을 노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북진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 미국은 중국이 수만명의 병력을 만주에 주둔시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을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할 의도로 보지 않았고, 중국 방어를 위한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주중 인도대사인 파니카르(K.M. Panikkar)를 통해 미국에게 38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했는데, 정작 미국 정부는 파니카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하기 2주 전에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미국이 북진 결정을 내린 데에는 북한에게 침략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것과 함께 북한을 제거함으로써 향후 미국의 안보 부담을 줄여보고자 하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이러한 계산은 개입 초기부터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6월 29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남한을 전쟁 이전 상태로 회복하고 평화를 정착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남한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남한을 요새화하고 지원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남한의 전략적 가치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반면에 국방 예산 부담이 컸던 미국으로서는 한반도에서 현상을 회복하는 수준에 머물 경우와 북진을 감행해 북한이라는 도발의 씨앗을 아예 제거하는 것 사이의 득실관계를 고민했던 것이다. 전자는 확전의 위험을 피하고 조기에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북한을 담겨두면 이후에도 남한 방어라는 부담을 안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후자의 장단점은 거꾸로 생각하면 된다. 결국 미국은 중국의 개입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 하에, 그리고 한국에 대한 방어 부담을 덜어보고자 북진을 선택했다.

한편 10월 1일 절멸의 위기에 처한 북한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요청받은 중국에서는 참전을 둘러싸고 상당한 논쟁이 벌어졌다. 지도부의 상당수는 직접 개입을 꺼려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총리이자 외무장관인 저우언라이, 중국공산당 부주석인 류사오치, 훗날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린뱌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 재건의 시급성, 국민당 잔당 세력의 소탕, 미국에 대한 군사적·산업적인 열세, 오랜 내전으로 치친 인민해방군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전 참전을 무리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미국이 원자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 공산당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국내 반동 세력의 발호와 국민당의 중국 본토 공격을 야기할 수 있고, 미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면, 중국 본토보다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의견을 제시해 반대파들을 설득·제압했다. 특히 마오쩌둥은 미국이 한국전쟁 개입과 동시에 대만해협에 7함대를 파견한 것을 미국이 '양수겸장'을 둔 것을 간주했다. 이에 따라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해전이나 공중전으로는 미군을 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지상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핵무기를 "종이호랑이"에 비유할 정도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물리력이 아니라 인민들의 정신력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면 "수류탄으로 대응하겠다"는 발언 속에 잘 담겨 있다. "중국 인구가 얼만데, 원자폭탄으로 모조리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근 오산이죠." 마오쩌둥이 인도의 네루 총리에게 한 말이었다. 마오쩌둥의 최측근이었던 녜륭전 장군은 소련의 핵무기 보유가 미국의 핵 공격을 억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키신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전을 가까스로 끝낸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전쟁"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북진을 감행하고,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협을 느낀 중국이 대규모의 참전에 나서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1950년 11월 들어 소련의 미그 15기가 투입된 것이 확인되고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으면서 미국의 핵 카드는 다시 등장했다.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낼 수 있다고 들떠있었던 미군은 중국군에게 패퇴를 거듭하면서 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패퇴를 거듭하자 트루먼 행정부는 방어 거점 구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미국 합참은 평양-원산 선을 우선 추진하되,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38선을 방어선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강력하고도 독립적인" 두 개의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며, 하나는 서울-인천 선을, 또 하나는 함흥-흥남, 최악의 상황에서는 부산을 방어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요새화된 작전 거점을 확보하더라도, 중국군이 소련 공군의 지원을 받아 공습을 해오면 큰 피해를 당할 것으로 우려했다. 이를 저지하고자 트루먼 행정부는 또 다시 북한 및 중국에 대한 원자폭탄 사용 옵션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일부 미국 국민들도 트루먼에게 편지를 보내 소련에 대한 선제 공격과 중국에 대한 핵 보복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의 여론도 원자 폭탄 사용에 호의적이었다. 1950년 10월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는 중국과의 전쟁시 원자 폭탄 사용 찬성 답변이 52%에 달해 반대 답변 38%를 압도했다.

중국군에게 패퇴를 거듭하자 맥아더는 이를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참전 미군의 수를 두 배로 올려줄 것과 원자 폭탄 사용 권한을 요구했다. 그는 30여발의 핵폭탄을 북중 국경지대에 투하하면 전세를 또 다시 역전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또한 "동해로부터 서해에 이르기까지 코발트 방사선이 막을 형성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지역의 생명체는 60년, 혹은 120년 후에야 다시 소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랬다면, 북한에서 한국을 지상으로 침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내 계획은 확실한 것"이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내에서는 대규모의 미군 증파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원자 폭탄 사용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하는 것은 "핵무기는 대통령의 무기"라며 핵 사용의 독점적 권한은 미국 대통령에게 있다는 트루먼의 철학과도 배치된 것이었다. 대신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를 통한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후술하겠지만,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적으로 원폭 투하를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의 전면적인 개입이 확인된 11월 20일, 육군참모총장인 콜린스(Lawton Collins)는 '한반도에서의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이라는 제하의 비밀 비망록을 작성했다. 4개 항으로 이뤄진 이 문서에는 ▲중국의 개입으로 "다시 한 번 유엔군에 의한 원자탄 사용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중국의 전면적인 참전시 "원자탄을 사용하게 되면" 중국을 신속히 격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핵 공격의 목표, 시점, 준비 조치 등 "원자탄 사용 지시의 조건을 결정하기 위한 검토가 이뤄져야" 하고 ▲"이 문제를 다른 문제보다 우선적으로 합참의 해당 위원회에 상정해 합참의 견해를 회신해줄 것을 건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1월 28일에 랄로(W.G. Lalor) 미해군 제독 역시 핵무기 사용 시점과 목표물 등을 묻는 비밀 전신을 합참에 보냈다. 이러한 건의를 받은 미국 합참은 소련의 개입 징후시 "개입을 억제하고 유엔군 소개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핵무기 사용 계획 검토에 들어가는 한편, 중국에 대한 핵 공격 계획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획을 전달받은 트루먼은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핵 공격 계획을 강하게 시사하고 나섰다. 동북아는 물론이고 세계 지정학이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주요 참고문헌>

Gar Alperovitz and Kai Bird, "The Centrality of the Bomb," Foreign Policy. Spring 1994.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Bevin Alexander, Korea: The First War We Lost (Hippocrene Books, 1986).
브루스 커밍스 지음·김동노 등 옮김, 『한국현대사』(창비, 2003).
Callum A. MacDonald, Korea: The War Before Vietnam (Macmillan,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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