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양의 선비, 동양의 바울
성탄절을 예루살렘에서, 춘절을 로마에서 맞았다. 예루살렘은 뜨악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철거하라는 랍비들의 시위에 눈살을 찌푸렸다. 엄연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공히 섬기는 일지삼교의 성소이다. 오로지 제 것인 양 구는 태도가 마땅치 않았다. 예수가 이 땅에 임하신 날을 축복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연말은 어쩐지 쓸쓸하고 쌀쌀한 느낌이었다.
반해 로마는 넉넉했다. 음력 1월 1일 도시가 온통 붉게 피어올랐다. 백화점은 '福'(복)자가 새겨진 빨간 봉투를 선물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봄을 새해의 출발로 삼는 동방의 습관을 즐기는 것이다. 광장에서는 부채춤과 태극권 공연도 펼쳐졌다. 공자학원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로마 시민들이라고 한다. 동방은 성탄절을 기념하며 한 해를 마감하고, 서방은 춘절을 통하여 두 번째 새해를 맞이한다. 새천년의 새 물결, 동서회통의 진풍경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자그마치 반 천년에 달하는 대사역의 소산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 팔팔한 신교의 도전에 구교로 전락한 가톨릭은 절치부심했다. 그래서 발족된 것이 예수회이다. 쇠락하는 가톨릭의 갱신과 경장을 도모했다. 신/구 교회가 분열하고 있는 기독교세계 너머 유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유라시아의 극서에 한정되었던 기독교가 더 큰 세계와 만나기로 작심한 것이다. 다른 문명권으로의 진출, 해외선교에 나섰다.
마침 포르투갈이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가던 무렵이었다. 더 정확히는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촘촘히 엮어낸 무슬림의 상업망에 참여한 것이다. 응당 물류는 문류도 수반한다. 일백년 전, 이븐 바투타의 여행이 그러했다. 모로코에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모스크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이동하면서 숙식도 해결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울라마를 만나 철학을 논의하고, 타지에서 관료로 일하기도 했다. 후발단체 예수회는 그런 문류망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동방무역망을 따라 동방선교로를 개척해야 했다. 설탕과 커피와 시나몬이 전해지던 길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요 타깃으로 삼은 대상은 사대부 계층이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마침내 베이징까지 입성하면서, 학자 관료들이야말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관장하는 중추임을 확인했다. 합리성으로 중무장한 그들에게 신앙부터 들이밀다가는 거부감을 보일 여지가 컸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며 겁박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가급적 외래 산 종교의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선교사의 태를 지우고 서양에서 온 선비처럼 보이고자 노력한 것이다. 한문을 습득하여 사서삼경을 읽으며 중국의 철학과 문화를 배우고 익혔다. 명나라 학자들이 입는 비단 장의를 걸치고 높다란 모자까지 썼다. 그럴수록 가톨릭은 유교와도 부합하는 천주교로 재구성되어 갔다. 기독교의 눈으로 중국 경전을 읽는 과정은 곧 기독교에 중국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로 개종한 사대부들 또한 천주교를 유교를 대체하는 영판 새 것으로만 간주하지 않았다. 마치 주희가 불교(와 이슬람)를 소화하여 신유학을 확립했던 것처럼 혁신유교, 개신유학으로 천주교를 접근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유교적 기독교'라는 명명도 붙인다.
동쪽 선비들을 혹하게 하는 데는 서교보다 서학이 요긴했다. 천문학과 수학 등 자연과학을 마중물 삼아 천주교로 안내했다. <만국전도>와 <기하원본> 등 과학에 대한 사대부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충족시킴으로써 그 기저에 깔린 기독교의 신에 대한 호감을 끌어올린 것이다. 유교를 보완하고 완미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기독교를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당대 유럽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헤브라이즘 시대의 스토아 철학과 유교를 견주기도 했다. 로마의 키케로가 쓴 <우정론>을 전범으로 삼아, 리치는 <교우론>이라는 한문 저서도 집필한다. 대표작은 역시 1603년 완성된 <천주실의>일 것이다. 고대 유교 경전과 기독교의 상통성, '상제'를 강조함으로써 중국철학 유신론을 확립했다. 고로 천주와 천하 또한 물과 기름이 아니었다. 천하와 천주의 대연정, 동과 서의 통섭을 도모했다.
'기억의 궁전'의 문을 열고 중화문명의 핵심에 들어가는 순간, 그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라를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대사역에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이다. 중국은 유럽의 일부를 신교에 내어준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압도적인 규모였다. 중국을 얻으면 천하를 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도 바울의 전도를 훌쩍 능가하는 대성취라 할 만 하다.
실제로 리치는 바울을 참조했던 것도 같다. 초기 교회가 유대민족의 협소한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로마 세계로 뻗어나가던 때를 반추한 것이다. 그리스-로마문명에 견주어 유대문화는 보잘 것이 없었다. 민족문화와 제국문명 간 수준차가 현저했다. 바울의 혁신은 기독교의 본질을 과감히 유대문화에서 떼어내어 보편문명 속에 녹여낸 것에 있었다. 적응주의 노선으로 '로마제국의 기독교화'라는 쾌거를 일구어낸 것이다.
'서양에서 온 선비' 리치는 이제 '동양의 바울'이 되고자 했다. 유럽의 기독교를 고스란히 복제하는 것 아니라, 중화문명의 지평에서 녹여내고자 했다. 타고난 지성과 매력적인 성품에 불굴의 의지까지 보태어 '중화제국의 기독교화'에 일생을 헌신한 것이다. 토착 문명을 일소하고 유럽 문명을 이식하여 구세계를 연장시켰던 신대륙과 달리, 리치야말로 천하와 천주가 합류하는 지상천국, 하늘의 영광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신천지를 건설코자 했던 것(Mission)이다.
2. 가톨릭 계몽주의 : 잃어버린 근대성
중국의 예수회만 유별났던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는 힌두문명에 적응코자 했다. 싯다르타도 마호메트도 다신교의 일부로 수용하는 특유의 힌두문명에 그리스도 또한 녹여내려고 했다. 브라만처럼 이마에 붉은 점을 찍고 <베다>를 공부하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누구는 신약성서를 '잃어버린 베다'에 빗대기도 했다. 고아에서는 현지인 출신 성직자도 배출되었다. 교회의 토착화가 일찍이 가동된 것이다. 그래서 인도에서의 유럽 지배, 백인 통치에 대한 최초의 저항 또한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787년 포르투갈 식민정부의 백인 우월주의, 힌두교 탄압에 맞서 고아 봉기가 일어난다. 예수회 교회가 정의사회구현의 맨 앞자리에 선 것이다. 동시대 미국의 독립혁명에 못지않았다. 식민정부에 항의하며 인종 간 평등과 현지인 자치를 요구했다. 즉 고아의 신자들은 기독교를 외래의 종교로 인식하지 않았다. 세속에서의 정치적 요구가 신앙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포르투갈 정부가 고아에서 쫓겨난 20세 후반까지 단 한 명의 인도인도 관료로 채용하지 않았던 점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계몽 교회'가 근대 국가보다 훨씬 더 '선진적'이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주입된 신/구 관념으로 신교와 구교의 이미지가 재단된 바 없지 않다. 구교는 덜 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편견이 적지 않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충격을 수용하여 자기 쇄신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구교의 진화 과정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나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회 선교사의 다수는 경험주의에 활짝 열려 있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천연두 예방접종을 비롯하여 물리학과 생물학, 천문학, 의학 등을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전수해준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더불어 구교를 타박하고 적대하는 신교에 견주어 신교에 대한 똘레랑스를 발휘해온 것도 구교 쪽이었다. 기독교세계가 신/구로 갈라지는 것을 근심하고 우려하고 대처하고자 했던 쪽도 구교였다. 신교는 적폐 청산을 외치며 구교를 배제하고 배척했지만, 구교는 누습 타파를 통한 대통합과 대연정을 꾀했던 것이다. 그래야 종교개혁이 종교전쟁으로 비화하는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사는 결국 그러한 방향으로 흐르지 못했다. 종파 간 참혹한 전쟁 끝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 국제질서,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진다. 신교와 구교가 모자이크처럼 뒤섞여 있던 유럽을 딱딱하고 단단한 국경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이제 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은 하나의 신앙을 믿으라 했다. 구교국가에서는 신교 탄압이, 신교국가에서는 구교 박해가 자행되었다. 민족주의의 발흥, 근대국가는 태생부터 내전 상태를 내장하고 있던 것이다.
고/금을 신/구로 갈라 치는 개신교의 심리 구조는 프랑스혁명 이래 '계몽교'로 계승되었다. 혁명은 곧장 공포 통치로 이어졌다. 앙시앙 레짐의 부역자로 지목된 이들은 가차 없이 처단되었다. 한 해에만 12만 명이 처형된 1797년을 근대적 제노사이드가 벌어진 원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와 혁명의 깃발 아래 계몽교도들이 마녀사냥을 진화시켰다. 때를 맞춤하여 자연과학도 발전함으로써 인종주의, 백인 우월주의를 생물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유사 과학'(Fake Science)도 창궐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가장 열광했던 이들 또한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진화론을 섬겼던 계몽교도들이다. 그래서 거침없이 '문명화' 사업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혁명열로 들끓는 '계몽빠'들이야말로 자성과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십자군의 심리를 빼다 박은 것이다.
계몽교도들이 득세하는 혁명 정국에서 프랑스를 떠난 일군의 성직자들이 이른 곳이 하이티였다. 프랑스의 탈기독교화, 세속화, 혁명화에 자발적 망명을 선택했다. 식민지로 이주하여 교회를 교회답게,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겠다는 못다 이룬 포부를 실천한다. 계몽주의=인종주의가 과학의 이름으로 관철되는 유럽과 달리 흑인 노예 해방을 가장 먼저 달성한 곳도 하이티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것이 유럽인, 백인이었음을 성찰하고 성토한 것 또한 하이티의 가톨릭 신도들이었다.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이 일어난 것도, 프랑스가 식민지 알제리를 피로 물들인 채 떠난 것도 1960년대였음을 상기해 본다면, 20세기 후반의 탈식민주의를 150여 년 전에 선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가톨릭 계몽주의'라는 명명도 등장했다. 계몽교도들이 계몽을 독점했던 근현대사를 새로이 써내려고 한다. 뉴라이트, 뉴레프트도 아니다. 구좌파와 구우파는 물론이요 신좌파와 신우파도 소홀히 했던 성과 속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중국에서, 인도에서, 아메리카에서 면면하게 전개되었던 가톨릭 계몽주의의 역사를 복구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진보를 맹신하며 계몽교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유사 역사학의 '가짜 역사'(Fake History)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 인권 선언이 여성과 노동자, 유색인종을 배제한 미완의 것이었던 반면에 예수회 선교사들이야말로 성서가 가르치는 인류 평등에 바탕하여 흑인 노예와 원주민을 보호했음을 환기시키는 식이다. 나아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처럼 유물론에 기초하여 평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 식물, 광물에 사물에 이르기까지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영물론(=생태주의)에 기초한다. 계몽교도들이 노예무역을 옹호하고(=자유시장), 인종의 위계(=진보사관)를 합리화하는 헛계몽(Fake Enlightenment)을 역설하는 동안, 신의 창조물로서 모든 인간은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진계몽을 토로했던 것이다.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전투적 계몽교도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고자 했던 '가톨릭 계몽주의'는 목하 개창되고 비서구적 세계화, 지구적 근대화에도 부합하는 '대안적 역사'로서 유력한 위상을 갖는다. 이성과 영성의 공진화, 전통과 근대의 상호진화, 유럽과 비유럽의 상호대화에 정과 성을 기울였던 노력에 합당한 평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혁명의 구호,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예수의 정신과 별개라고 여기지 않았다. 예수가 실천한 용서와 사랑이야말로 자유와 평등과 우애의 근간이라고 역설했다. 즉 혁명을 통하여 영성을 더욱 고양시키고자 했다. 프랑스 혁명을 성과 속이 갈라서는 분기점이 아니라, 속된 성을 회개(Re-volution)하고 성스러운 속을 회복(Re-storation)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교회다운 교회와 나라다운 나라는 별개의 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자코뱅으로 상징되는 급진적 혁명파에 의해 기요틴에서 목이 잘려나간다. 혁명의 이름으로, 계몽의 이름으로, 진보의 이름으로 '가톨릭 계몽주의'를 척살한 19세기의 맹목은, 이후 지구 도처로 확산되는 인종학살과 전통말살의 전주곡이었다. 원수를 이웃처럼 사랑하기는커녕 나와 다른 남을 척결하고 궤멸시키려는 날카롭고 뾰족한 마음, '영성 없는 이성'과 '사랑 없는 정의'가 근대인의 정신을 잠식해갔다.
3. 서학, 북학, 동학
마테오 리치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바티칸으로 돌아가 교황을 알현하여 동방선교의 성과를 보고하지도 못했다. 로마의 교황보다는 베이징의 천자와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베이징에 자리한 그의 묘지에는 라틴어와 한문이 동시에 새겨져 있다. 중국식 이름은 리마두(利瑪竇), 호는 서해(西海)였다. 서쪽 바다에서 온 사도 리치가 동쪽 땅에 뼈를 묻은 것이다.
그가 자금성에 머물던 시점은 난세였다. 조선에서 전쟁이 한참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중국까지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일본을 물리쳤으나, 명이 입은 내상은 크고도 깊었다. 망국의 조짐이 스멀스멀 퍼져갔다. 리치의 절친이었던 서광계는 명말의 아노미 상태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천주교 보급을 궁리했다. 예수회 천문학자를 조정의 관료로 등용하는 개혁개방정책도 시행했다. 그럼에도 만리장성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만주족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북을 내주고 남으로 밀려난 명나라 조정이 황실 가족까지 세례를 받는 파격을 연출했으나,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청이 명을 제압하고 중원의 패자로 등극함으로써, '중화제국의 기독교화'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만주족 치하에서도 천주교는 후퇴하지만은 않았다. 커녕 계몽군주 강희제의 60년(1662~1723) 치세 동안 예수회는 재차 봄날을 구가한다. 강희제 본인부터가 라틴어 습득에 열성이고 열심이었다. 수학과 과학에도 조애가 깊었다. 대청제국 아래서 거의 모든 성에 교회가 세워진다. 건륭제 역시 계몽군주였다. 1773년부터 1782년 사이, 동방의 백과사전 <사고전서>를 편찬하는 대규모 출판사업을 펼친다. 여기에 리치의 책들도 몇몇 포함이 되었다.
<사고전서> 편찬이 시작된 바로 그 해,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예수회를 해산시킨다. 절대국가간 이전투구로 유럽 전역은 재차 전장이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지나서야 예수회는 재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 사이 세상은 크게 달라졌다. 300년 줄기찬 전쟁 끝에 유럽의 군사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아편전쟁이 상징적이다. 대청제국이 대영제국에 패배하는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는 원명원이 초토화되고 자금성마저 불에 탄다. 동과 서의 역관계가 극적으로 역전된 것이다. 아편무역도 자유시장 원리라며 윽박질렀다. 선교사들의 태도 또한 선배들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불평등 조약에 은근슬쩍 기대었다. 왕년의 존중과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중국문화도 미신으로 폄하하고 무시했다. 고압적인 선교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기보다는 군인들의 완력에 의탁하기 일쑤였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이다. 중국의 반응도 달라졌다. 서구열강의 대리인이자 제국주의의 주구로 선교사들을 표상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고 반발심도 깊어졌다. 청말 관료들은 명말 관료들과 달리 기독교에 부정적이었다. 유사기독교를 표방하는 태평'천국'운동까지 일어난 마당에 더더욱 적대적이었다. 민간에서는 음침한 소문도 퍼져갔다. 선교사들이 세례를 주고 개종을 시킨 뒤 아이들을 죽여서 약으로 쓴다는 괴담이 확산되었다. 누적된 불만은 기어이 의화단운동으로 폭발한다. 1899년, 공자의 고향이 자리한 산동성에서 반기독교 운동이 터져 나온 것이다. 반외세, 반제국주의, 반기독교를 외쳤다. 삽시간에 베이징까지 접수하여 선교사들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우고 재를 뿌렸다. 이에 8개국연합군은 재차 무력으로 응징했으니, 문명 간 대화는 온간 데 없이 적대와 충돌로 20세기가 열렸던 것이다. 그 내우외환 끝에 대청제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무너진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해 마테오 리치의 원본 서적들이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리비아를 침공하며 제국주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른 로마에서도 주목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는 20세기, 중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리치는 잊혀 진 인물인 듯했다.
1949년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선교사들은 곤경을 면치 못했다. 중국 인민에 복무하기보다는 로마 교황에 충성하는 이들이라며 강제노동과 사상개조가 빈번했다. 홍위병이 준동하는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교회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리치의 묘지만은 주은래의 각별한 배려 덕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애당초 그의 묘지 근처에 중국공산당 당교를 만들었던 복심이 있었던 것이다. 장차 백년을 내다보고 당교와 교회의 회합을 예비하고자 했다.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당교의 선생들이 간곡히 호소하고 만류한 끝에 리치의 묘지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훼손시키지 않되, 땅 속에 묻어두는 선으로 그쳤다. 문혁의 폭풍이 지나고 나서야 본래의 모습 그대로 땅 위로 올라온 것이다.
주은래의 백년 예감에 화답이라도 하듯 새 천년, 제3세계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테오 리치를 거듭 환기시키고 있다. 400년 전에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바티칸의 수장과 베이징의 정상이 만나는 날이 머지않은 것도 같다. 조짐은 마테오 리치 몰후 400주년이던 2010년부터 여실했다. 동과 서 양쪽에서 공히 그를 높이 기렸다. 그의 고향 마세라타에도 리치 연구소(Ricci Institute)가 세워졌다. 이탈리아와 중국, 유럽과 중국, 유럽과 아시아, 동서 유라시아의 만남을 연구하는 신생 연구기관이다.
베이징에서도 그의 비석은 말끔하게 재단장 되었다. 동서의 균형이 극적으로 붕괴된 아편전쟁 이후의 예외상태, 그 비정상이 (재)정상화로 돌아서고 있는 시점이다. 자연스레 동과 서가 선의로 대화하고 호의로 대면했던 '초기 근대'의 마테오 리치가 주목받고 있다. 그가 17세기에 뿌려둔 '꽌시'의 맹아가 2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만 같다. 고금합작과 성속융합과 동서회통의 선구자로서 그를 기념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베이징에 가는 날에는 나도 그의 무덤을 찾아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긋고 큰 절을 두 번 올리고 싶다. 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리치의 무덤 앞에서 절을 드린 조선인 선비들이 있었다. 담헌 홍대용을 비롯한 이른바 '북학파'들이다. 연행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서학 서적을 맹렬하게 수집하고 학습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천주실의>를 읽은 흔적이 여러 곳 등장한다. 서학 공부에 몰입하다가 서교에도 입신했던 다산 정약용도 빼놓을 수 없겠다. 즉 유라시아의 동쪽 끝 조선에서도 서학은 19세기 이후에나 밀려온 낯선 학문이 아니었다. 17세기 이래 이미 서학과 유학의 대화가 깊이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 200년의 소화가 있었기에 19세기 말 천하대란 속에 솟아난 동학에서는 '시천주'(侍天主)라는 신조어까지 고안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동학 또한 서학의 반대말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서학과 유학의 상호진화 끝에 탄생한 개신유교, 민주유교, 민중유교로서 동학이 발화되었던 것이다.
서학과 동학이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동아시아로만 한정할 수도 없겠다. 성호 이익부터 다산 정약용까지 열렬하게 서학을 학습하던 바로 그 시기에 유라시아의 극서지방에서는 중국학 열풍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독교 소개 이상으로 동방의 사서삼경이 유럽으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라이프니치부터 칸트를 지나 헤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계몽철학 곳곳에 '중국의 충격'이 아로새겨져 있다. 공자를 모서야 나라가 산다고 했다. '고대 중국의 발견'이 극서 유라시아의 사상계를 진동시켰던 또 다른 계몽서사를 살펴본다. 이성과 계몽의 나라, 독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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