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12·12쿠데타 진압 가로막은 대통령, 국방부 장관, 육본 상층의 기회주의
프레시안 : 5·16쿠데타와 비교하면 12·12쿠데타의 특성이 더 잘 드러날 것 같다. 1961년 5·16쿠데타의 경우 쿠데타를 막아야 할 세력이 제대로 막지 않거나 양다리를 걸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장면 총리는 쿠데타 정보를 여러 차례 들었지만 어떠한 실질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장도영 참모총장은 박정희에게 쿠데타 얘기를 들었음에도 오히려 박정희를 두둔했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군이 출동하지 못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2쿠데타 때 대통령, 그리고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상층부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전체 상황을 보면 정승화 참모총장부터 이건영 3군 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군 상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김재규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반란군 쪽 핵심은 12·12쿠데타 그날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모인 사람들인데 거기에 더해 보안사의 대령, 중령 등 영관급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승화가 빨리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12·12쿠데타가 성사할 수가 없었다. 군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상명하복 아닌가. 지휘 체계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도 육군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정승화가 빨리 체포된 것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승화가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도, 윤성민 참모차장이나 그 위에 있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 이 사람들이 장태완처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완하게 움직였다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컨대 윤성민은 처음에는 참모차장으로서 반란 진압을 좀 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중에는 방관했다. 그러면서 반란군을 좌시하는 쪽이 돼버렸다.
프레시안 : 장태완은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끝까지 동분서주했고 정병주는 1979년 12월 12일 자정이 지난 때에 쿠데타군에 체포됐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다. 이건영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장태완과 마찬가지로 이건영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을 동원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참모차장 등이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모총장이 없는 상황에서 명령은 참모차장이 내릴 수 있었던 건데, 참모차장을 비롯한 육본 상층에서 그렇게 나오면서 이건영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미국 쪽 움직임도 영향을 준 것 같다. 내가 12·12쿠데타 직후 들었는데, 이건영 쪽 등의 부대 출동을 미군 쪽에서도 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동하면 문제가 커진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노태우의 9사단 병력 같은 것이 서울에 들어오는 건 막지 못한 미군이 이건영 등의 군 출동에 대해서는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했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때 그런 얘기도 돌았다.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문제와 관련해 장태완의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서중석 : 장태완은 진압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육본 측, 이건 윤성민 참모차장을 가리키는 건데 그쪽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유혈 사태를 피하는 쪽으로 해결해보자'고 하면서 진압 병력 출동을 자제한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특히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 대해서는 아주 강한 분노를 드러냈는데,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장태완은 최 대통령이 1979년 12월 12일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10시간 동안 대통령으로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썼다. 대통령이 참모차장이나 국방부 장관한테 진압 명령을 내리면 되는 건데 어떠한 명령도 안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규하는 12·12쿠데타 때 '정승화 연행 지시를 내려달라'는 전두환 말도 안 들었지만, 반대로 진압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이다.
사실 당시 국방부 장관이 어디로 없어졌는지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몰랐다. 그렇지만 국방부 장관이 없으면, 장관 밑에 있는 국방부 차관 같은 사람한테 대통령이 명령을 내리면 된다, 이 말이다. 대통령은 최고 명령권자 아닌가.
장태완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임무 수행 포기, 상황이 발생한 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보인 기회주의적인 행위는 군 형법 24조의 직무 유기죄와 30조의 군무 이탈죄를 범한 게 명백하다고 썼다.
이처럼 대통령 그리고 국방부 장관이 기회주의적으로 나온 것이 12·12쿠데타 세력이 승리한 또 하나의 큰 요인이라는 건 틀림없다. 그리고 12·12쿠데타 세력에게는 상대방보다 유리한 점이 또 있었다.
12·12쿠데타 원인 중 하나는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5·16쿠데타와 닮은꼴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군의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보안사를 중심으로 해서 전군의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장태완이나 윤성민 쪽은 그 점에서는 약했다. 쿠데타 세력은 12월 12일 그날 보안사 상황실을 본부로 해서 보안사가 갖고 있던 통신망을 최대한 활용했는데, 보안사 참모들이 각 부대에 연락해 자기들 쪽을 편들게 했다. 그리고 육본 정승화 쪽의 주요 지휘관 밑에 있는 참모들도 설득했다. 진압 부대가 출동하지 못하도록 그런 식으로 노력했다, 이 말이다. 각 부대에 파견된 보안부대장, 이 사람들도 직접 설득에 나서고 그랬다.
이러한 설득, 다시 말해 부대가 출동하지 못하게 한 그것이 효과를 보게 된 데에는 인사 적체 같은 게 작용했다고 여러 글에 나온다. 전에 5·16쿠데타를 다룰 때 인사 적체 문제가 쿠데타를 일으킨 아주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얘기하지 않았나. 그것과 닮은꼴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들은 4년제 정규 육사 1기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육사 8기, 9기, 10기 등과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났다. 그런데 11기들은, 물론 전두환 등 몇 사람은 소장이 되긴 했지만, 그 선배들이 중장 등으로 쫙 올라간 것에 비해 자신들은 빨리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 점은 대령, 중령으로서 쿠데타에서 큰 역할을 한 육사 16~18기를 비롯한 육사 12기 이후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적체가 돼서 장군 진급이 앞으로 힘들어지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쿠데타를 계기로 그 위쪽의 상당수를 싹 쓸어버리면 그 문제가 풀리는 것이었다.
12·12쿠데타에서는 보안사에 있는 대령들과 중령들, 그러니까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같은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장군 진급이 막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보안사에만 주로 있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해서는 장군으로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12·12쿠데타에서는 그런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반란군 쪽이 유리했던 건 제일 중요한 수경사의 30경비단과 33경비단, 헌병 부대의 부대장을 그쪽에서 맡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수여단 중 서울권에 있는 것들의 부대장도 그쪽에서 다 차지하고 있었다. 군 상층을 장악한 건 정승화 쪽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일선 부대를 갖고 뛸 수 있는 건 반란군 쪽이 많았다. 그처럼 수경사 30경비단과 33경비단, 공수여단, 그리고 서울 가까이에 있는 9사단 같은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쿠데타 세력의 주축은 사조직 하나회
프레시안 : 12·12쿠데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하나회다. 전두환·신군부는 12·12쿠데타 과정에서도, 그 후 집권 공작에서도 5·16쿠데타 세력보다 훨씬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5·16쿠데타 후 숱한 반혁명 사건을 양산하며 쿠데타를 함께한 이들까지 상당수 제거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보인 건 전두환·신군부가 12·12쿠데타를 일으키기 전부터 하나회로 결집돼 있었던 것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서중석 : 제일 중요한 것은 12·12 반란군의 대부분은 하나회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쿠데타를 일으키기 훨씬 전부터 잘 단결돼 있는 세력이었다. 12·12쿠데타 이후 출현하게 되는 전두환·신군부 정권, 이 권력은 하나회 권력이라고까지 얘기해도 좋을 정도로 12·12쿠데타와 1980년 5·17쿠데타 이후에는 하나회 사람들이 군뿐만 아니라 정부 요직 등을 많이 맡게 된다.
12·12쿠데타 주동자들을 보면, 전두환보다 선배인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전두환부터 여러 공수여단장 등은 다 하나회 사람들이었다. 그중 전두환, 노태우 같은 육사 11기들은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부터 정치 군인으로 활약했다. 육사 생도들이 5·16쿠데타를 지지하게 하는 데 전두환 대위 등이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육사 11기들은 5·16쿠데타 직후 최고회의, 중앙정보부 같은 주요 기관의 요직에 있었다. 예컨대 최고회의에는 소령 손영길, 최성택이 근무했고 중앙정보부에는 소령 전두환, 김복동과 대위 권익현이 있었다. 육군 방첩대에는 대위 노태우가, 최고회의 공보처에는 대위 정호용이 있었다. 이처럼 하나회 구성원이자 육사 11기들은, 김복동 같은 경우 하나회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이미 이렇게 5·16쿠데타 직후부터 정치 군인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만큼 정치에 관심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그러면서 오성회라는 걸 만들었다. 오성회라는 건 전두환은 용성(勇星), 노태우는 관성(冠星), 이런 식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이 자기들을 다섯 별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오성회를 만들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오성회보다는 칠성회라는 이름으로 주로 알려져 있었다. 칠성회는 1961년 말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정호용, 권익현, 최성택, 백운택 등 육사 11기들이 친목 모임으로 만든 것이다. 이게 나중에 하나회로 바뀌는데, 오성회 구성원이었던 김복동은 그때 빠져나가는 걸로 돼 있다.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등은 5·16쿠데타 후 한때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프레시안 : 박정희가 5·16쿠데타 전에도 여러 차례 쿠데타를 꿈꿨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육사 11기들은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인가.
서중석 : 1963년 6월 말경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전속 부관이던 손영길 소령하고 육군 방첩대 노태우 대위가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을 찾아갔다. 손영길과 노태우는 쿠데타 비슷한 걸 일으켜서 4대 의혹 관련자, 부패분자 등을 처단하겠다고 했다. 김종필을 비롯한 육사 8기를 겨냥한 건데, 김재춘은 말렸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그해 7월초에 김재춘을 또 찾아갔다. 이때 김재춘은 안 된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정보가 다른 쪽으로 들어갔다.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일부 장교들이 공화당 김종필계 등 40명을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를 중앙정보부도, 치안국도 알게 된다. 그래서 최고회의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 박정희 의장은 민기식 육군 참모총장과 방첩부대장한테 긴급히 수사에 착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때 방첩부대장이 공교롭게도 정승화였다. 12·12쿠데타 때 연행되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바로 그 사람이다.
하여튼 그렇게 되자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정승화를 만났다. 손영길, 노태우가 자기를 찾아와서 한 얘기를 전하면서 '그냥 덮어두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 건이 덮이는 줄 알았는데, 박정희가 김재춘을 부르더니만 전두환, 노태우 등을 구속하라고 지시했다. 김재춘은 적극적으로 그걸 말리면서 중앙정보부장 사의를 표했다.
그런데 이때쯤 돼서는 박정희도 중앙정보부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 얘기한 것처럼 그 무렵 김재춘은 '공화당과 별개로 범국민 정당을 새롭게 만들라'는 박정희 지시에 따라 그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아무래도 공화당 쪽으로 대선에 출마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서 결국 육사 11기들 문제는 덮어두고 김재춘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이 사안은 정리됐다. 그런데 김재춘이 깜짝 놀란 건 바로 김형욱이 자기 후임이 됐다는 점이었다. 이게 노태우, 손영길 등의 쿠데타 사건이다.
12·12쿠데타, 5·17쿠데타 일으킨 하나회 키워준 건 박정희
프레시안 : 하나회 문제는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나.
서중석 : 윤필용 사건이 터지면서 하나회 문제가 크게 부각된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박정희 지시로 윤필용 사건을 조사했는데, 윤필용이 하나회 대부라는 걸 알게 됐고 그 하나회가 무서운 사조직이라는 것도 파악하게 된다.
육사 11기 이후의 정규 육사 장교 그룹, 그것도 주로 경상도 출신으로 구성된 장교 그룹인 이 하나회는 1979년 12·12쿠데타가 날 때까지 육사 한 기당 5퍼센트 정도를 선발했는데, 육사 이외 출신까지 포함한 전체 장교로 하면 1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나중에, 그러니까 1990년대에 김영삼이 숙청할 때에는 27기 이후까지도 하나회가 일부 있었다고 그런다.
문제는 소수에 불과한 이 사람들이 군의 핵심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회 회원들은 수경사, 보안사, 특전사,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권력 핵심에 자리 잡고 서로 편의를 봐줬다. 이 사람들은 하나회 사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일단 하나회에 가입하면 다른 어떤 장교들보다도 여러 혜택과 특전을 누렸다. 이들 중 일부는 고위층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일정한 활동비까지 받았다. 일부 재벌들한테도 자금을 받아냈는데, 일부 기업인은 자진해서 하나회에 자금을 대줬다고 한다. 하나회 회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급에 따라 승용차, 지휘봉 등을 받기도 했다. 일부는 일심(一心)이라는 휘호와 함께 지휘봉을 받기도 했다.
강창성은 하나회가 군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봤다. 또 윤필용 사건과 깊은 연관이 된다고도 봤다. 그래서 하나회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해서 박 대통령한테 보고했다. 강창성은 하나회 조사 대상 200여 명 중 수경사 참모장으로 윤필용 직속이었던 손영길 장군을 비롯해 법을 위반한 10명은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군에 누를 끼친 31명의 장교를 강제 예편시켰으며, 나머지 160여 명에 대해서는 보직을 바꿔서 분산시키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전혀 모르는 척하면서 전두환 쪽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는 걸 제지했다. 그리고 '당신 때문에 경상도 장교들 씨가 마르겠다'는 식으로 얘기하면서 결국 강창성을 보안사령관 직위에서 해제하고 다른 쪽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12·12쿠데타가 성공하고 나중에 5·17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박정희가 그렇게 만들어놓았다고도 볼 수 있다. 군 내부의 사조직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대통령이 오히려 뒷배를 봐주지 않았나. 더군다나 그 사조직 구성원들이 군의 핵심 요직에 많이 배치돼 있다는 건 박 대통령이나 차지철 경호실장의 적극적인 배려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자들이 12·12쿠데타를 일으켜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건 박정희, 차지철이 하나회를 키워줬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 일당은 쿠데타를 언제부터 모의했나
서중석 : 반란군은 언제 쿠데타, 반란을 모의했느냐.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 대개 국방부 과거사위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1979년 12월 9일 전두환을 동해안 지구 방위사령관(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얘기했다. 국방부 과거사위에서는 동해안 경비사령관 발령이 12월 13일 개각과 함께 예정된 상태였다고까지 보고서에 썼다.
그런데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반란 모의 시점에 대해 최소한 12월 5일 훨씬 이전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를 보자. 전두환 쪽에서 '수경사령관 부임을 축하하는 자리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마련하겠다. 그러니 만나자', 이 말을 자신들한테 전달한 때가 12월 5일이라고 장태완은 밝혔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전두환 쪽에서 이미 쿠데타 결정은 내린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걸 진압할 만한 핵심들을 불러내기 위한 연락을 한 때가 12월 5일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12월 12일 저녁에 비밀 요정으로 오라고 자신들한테 알려준 날짜는 12월 8일이라고 장태완은 밝혔다. 12월 8일에는 시간까지, 즉 12월 12일 몇 시에 정승화를 잡으러 가면서 쿠데타를 시작한다는 것까지 정한 상태였다는 얘기다. 그래서 장태완은 12월 5일 이전에 모든 거사 준비를 완전히 끝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썼다.
미국도 '12·12쿠데타 세력이 12월 5일 이전에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얘기를 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1979년 12월 13일 자로 미국 국무부 장관한테 보낸 전문이 글라이스틴 회고록에 수록돼 있는데, 그걸 보면 이렇게 돼 있다. "오늘(13일) CIA 지국장의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거사를 최소한 10일 전부터 계획했으며 전군의 젊은 장교들의 지지를 규합했음. 그들은 이미 군의 신규 보직 리스트를 준비하고 현 차관을 신임 국방부 장관에 앉히는 문제까지 생각했음."
그런데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그해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 사건과 관련된 김상현의 증언은 전두환 쪽에서 권력을 탈취하겠다는 생각을 그전에 이미 갖고 있었다는 걸 짐작케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다. 1979년 11월 1일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외무성 소식통을 인용해서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라는 제목으로 상당히 자세하게 보도했다. 마이니치신문쯤 되는 곳이 유언비어 정도를 가지고 이런 기사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용한 출처도 일본 외무성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일본 외무성에서는 전두환 쪽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파악하고 있었고 그걸 일본 정부 쪽이 지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기사를 마이니치신문을 통해 내보낸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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