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학원 민주화 바람 속에서도 신중하게 움직인 대학생들
프레시안 : 서울의 봄 시기에 대학가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서울의 봄, 1980년 3~4월에 학생들은 굉장히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해 2월 16일 문교부는 학도호국단 간부 선출 방법을 임명제에서 선거제로 바꾸고 학도호국단 기능에서 학생 군사 교육을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은 이러한 미봉적인 조치에 반발했다. 주요 대학에서 만들어진 학생회 부활 추진위원회가 학도호국단 폐지를 들고나왔다.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개강을 하자 학생들은 각 대학에서 학생회를 부활시켰다. 그런 가운데 4월 3일 서울대는 부활한 총학생회를 인정하고 학도호국단 관련 학칙을 삭제하겠다고 했다. 이때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연세대, 이화여대에서도 이미 총학생회가 발족한 상태였는데, 서울대에서 그렇게 나온 것이다. 이어서 4월 7일에는 전국 9개 국립대 학생처장들이 모임을 열고, 서울대와 마찬가지로 학도호국단 관련 학칙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1979년 10·26 이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신 정권이 억압했던 학생 자치 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런 속에서 1980년 4월 1일에는 전국 14개 대학에서 학생들이 학원 자율화, 어용 교수 퇴진, 교권 확립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했다.
그런데 이 4월에 병영 집체 훈련 문제가 등장했다. 4월 10일 성균관대 학생들이 입영 훈련을 거부했다. 24일에는 서울대 총대의원회에서 1학년을 대상으로 한 병영 집체 훈련을 거부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면서 몇몇 대학에서 농성이 시작됐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4월 24일 서울 시내 14개 대학 교수 361명은 '최근 학원 사태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교수들은 족벌의 대학 운영 반대, 교수 임용제 철폐, 교수 회의의 민주적 기능 확대 등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5월로 접어들자 학생들은 병영 입소를 하기로 결정했다. 병영 집체 훈련 거부 투쟁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해, 이건 신군부를 염두에 둔 것일 텐데,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처럼 학생들이 자치 조직을 부활시키고 학원 민주화 활동 같은 걸 벌이면서도 이 시기에 아주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을 볼 수 있다.
고된 노동, 힘든 생활, 진폐증, 어용 노조…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던 광부들
프레시안 : 서울의 봄 시기에는 노동 쟁의가 크게 늘어나는 등 사회 각계에서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분출했다. 그 가운데 오랫동안 관심을 모은 사건으로 강원도 사북의 광부들이 들고일어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을 부르는 이름이 다양하다. 그만큼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는 뜻일 터인데, 이 부분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1980년 4월에 큰 상황이 하나 벌어졌다. 사북항쟁이라고도 하고 사북사태라고도 하고 사북노동항쟁이라고도 하는 그 사건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호칭을 무엇으로 하느냐. 그 부분은 사북에서 일어난 이 일을 노조 집행부와 반대파의 싸움 때문에 생긴 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광부들의 불만과 분노가 분출한 것으로 볼 것이냐, 그리고 광부들이 공권력과 싸우면서 며칠 동안 사북이 공권력 부재 상황이 됐는데 그런 걸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그다음에 사북에서 싸운 사람들이 그 후 아주 혹독하게 당하는데 그걸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이런 것들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본다.
사북에서 일어난 일은 노조 집행부와 반대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그간 박정희 유신 체제의 억압 정권 아래에서 누적된 불만, 분노가 분출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광부들의 투쟁이 그렇게 강렬했던 것이다. 그런 점이 분명히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사북항쟁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런데 사북에서 일어난 일은 1971년 8월 광주 대단지에서 벌어진 일, 5만 명의 빈민이 들고일어난 그 사건과 유사성이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쪽은 광주 대단지 항쟁이라고 하지 않고 광주 대단지 사건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 점과도 연관시켜서 학계에서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북항쟁과 사북사태,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사용하느냐 하는 건 그러한 검토가 충분히 있은 다음에 정해야겠고 지금으로서는 그 두 가지를 병용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프레시안 : 사건이 발생할 무렵 광부들의 생활 실상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 사건이 나고 나서 몇 년 후 나도 <신동아> 기자로 탄광 지역인 강원도 사북, 고한, 장성 일대에 가서 한 200매짜리 기사를 쓰고 그랬는데, 광부들이 참 힘들게 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청계천 피복업체 노동자들을 비롯해 아주 불량한 노동 환경에서 저임금을 받고 일하던 노동자들의 상태가 다 나빴지만, 광산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도 그런 것들에 못지않았다.
광산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광산에서 일하면 그래도 농사짓는 것보다는 한꺼번에 돈을 손에 쥘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것들이 작용하고 해서 광산으로 몰려든 건데 그 일이 말할 수 없이 고됐다. 그뿐 아니라 10퍼센트가 넘는 광부가 진폐증에 걸렸다. 진폐증은 폐에 석탄가루가 쌓여 생기는 병인데, 불치병으로 알려진 무서운 병 아닌가. 그뿐 아니라 난청, 시력 장애 같은 것들에도 시달렸다. 사택이라는 데를 찾아가보면 그 생활이라는 것이 참 절박한 느낌을 줬다. 그러니까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많은 광산 노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일정한 수준 이상의 광산에는 대개 노조가 있었는데, 개중엔 사주 쪽과 결탁한 어용 노조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 당시 노조를 장악한다는 건 굉장한 이득, 특혜와 연결돼 있는 것으로 많은 광산 노동자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큰 광산의 노조 지부장들은 그 사회에서 일종의 권력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북과 고한은 특히 광부들이 일하는 광산 때문에 도시가 생겼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순전히 석탄 도시라고 볼 수 있었다. 사북, 고한에 3만 명 내외가 살았는데,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한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학생들이 하늘도, 하천도, 지붕도, 산도 전부 시커멓게 그린다고 얘기하는 곳이 바로 이들 지역이었다. 사방이 시커멓게 보였으니까.
사북에는 검은 노다지로 불리던 큰 석탄 광산이 있었다.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이었다. 거기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노동자가 4500명 정도였는데, 그중 3798명이 이 항쟁이 일어났을 때 노조원이었다. 이렇게 큰 탄광이고 노조였기 때문에 노조 지부장의 위세도 대단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을 해야 했지만 임금이 생계비에도 못 미쳤다. 사택 지역에서 수십 가구가 공동 화장실을 쓰고,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충분히 씻을 수도 없는 것 등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와 달리 사측은 정부 보조금 등 여러 혜택을 누리며 부를 쌓아갔다. 또한 식당 운영권 같은 이런저런 특혜로 어용 노조 지부장을 회유해 노조가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하도록 했다. 어용 노조 지부에서는 사측과 결탁한 것에 더해 조합비 횡령 문제까지 일으켰다. 그런 속에서 광부들은 말 그대로 막장 인생이라고 자조하며 울분에 찰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
회사·공권력·노조에 분노한 광부들, 사북을 장악하다
서중석 : 회사가 이 어용 노조하고 1980년 광업소 임금 인상률에 합의했는데, 그 결과가 노동자들의 기대에 너무나 어긋났다. '어용 노조 지부장이 이렇게 만들었다. 회사와 야합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가 커졌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모여서 충분한 임금 인상, 노조 지부장 재선거 같은 걸 요구하며 항의했다. 4월 18일에는 여러 조합원들이 조합 사무실에 몰려가서 항의했다.
그러다가 21일 오후에 노동자들이 조합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광산 노동자들을 감시하던 경찰이 지프차로 광부 4명을 치고 달아나는 일이 발생했다. 동료들이 경찰차에 치여서 쓰러지는 걸 본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곧바로 여기저기서 광산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경찰과 충돌하면서 곳곳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22일에는 이 노동자들의 시위가 훨씬 커졌다.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난 상태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인근 지역 경찰까지 동원됐는데, 이들은 소총으로 완전 무장을 했다. 3000여 명의 분노한 노동자들이 가두시위에 나서자 경찰은 공포탄도 쏘고 최루탄도 막 쏘면서 저지하려 했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면서 맞섰는데, 이때 부녀자들이 치마폭에 돌을 날라다줬다. 그전에도 부녀자들, 주로 광부 부인들인데 이 사람들은 시위나 노조에 대한 항의를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시위대는 갱목(坑木)장 바위나 통나무를 굴려서 경찰을 밀어내버렸다. 결국 경찰은 밀려났다. (충돌 과정에서 다친 경찰 중 1명은 그 후 사망했다. '편집자')
22일 오후 2시경 시위대가 사북을 완전히 장악했다. 경찰은 물러났고, 노동자들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노동자들은 외부로 통하는 두 개의 길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50명 내지 100명을 한 조로 하는 감시반을 편성, 운영했다. 예비군 무기고 등도 점거했지만 노동자들은 무기고를 부수거나 그 무기로 무장하지는 않았다.
그런 속에서 노동자 대표들과 정부 측 사이에 협상이 시작됐다. 정부 측에서는 강원도 도지사, 도경국장, 치안본부 2부장 같은 사람들이 나왔는데, 24일 새벽에 합의를 봤다. 주요 내용은 상여금을 150퍼센트 인상하고 노조 지부장인 이재기를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노동자들이 만족할 만한 결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 쪽이 힘이 달리고 협상력이 약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계엄군을 투입하겠다고 하니 광부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도 협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속에서 거의 제대로 얻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합의 후 돌아온 건 심한 고문과 폭도라는 오명
서중석 : 이 사건과 관련해 나중에 몇 가지가 문제가 된다. 21일 밤 분노한 노조원들과 그 부인들이 노조 지부장 이재기의 집과 노조 간부 15명의 집을 파괴했는데, 특히 이재기 부인을 붙잡아 4일 동안 묶어놓고 가혹 행위를 한 것이 난동 또는 폭동으로 몰리는 구실이 됐다. (어용 노조 지부장 이재기는 도망갔지만, 그 부인은 잡혀서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을 당해야 했다. '편집자') 반대편에서는 '이들이 난동을 일으켜 이렇게 지독한 인권 유린을 했다'고 공박했다. 그러면서 인권 유린으로 크게 비난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 당시 언론도 큰 역할을 했다.
4월 24일 합의가 이뤄지자 바로 그다음 날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5월이 되자 당국은 광부들을 계엄사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여자들도, 가혹 행위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재기 부인을 붙잡은 사람들이겠지만, 연행돼서 아주 심하게 당했다. 남자 광부들을 심하게 고문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도 옷을 전부 벗겨놓고 성 고문 비슷한 것을 하고 그랬다. (끌려간 사람들은 물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을 당해야 했다. 사건 당시 광부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원갑은 훗날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편집자')
그렇게 해서 구속된 사람이 31명, 불구속 기소된 사람이 50명이나 됐다. 정처 없이 모여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감옥 생활을 2~3년간 하고 형기를 마친 다음에는 대개 다시 정처 없이 흩어졌다. 이게 사북항쟁 또는 사북사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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