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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로 자충수 둔 양김, 회심의 K-공작 편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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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분열로 자충수 둔 양김, 회심의 K-공작 편 전두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6>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드디어 찾아온 서울의 봄, 그러나 보안사 행태는 심상치 않았다

프레시안 : 10·26으로 유신 정권이 종말을 고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높아졌지만,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를 거치며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찬탈로 귀결됐다. 이 과정에서 야권은 내홍을 거듭했다.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12·12쿠데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는 했나 하는 의문마저 드는, 즉 정치 일정에만 주로 관심을 보이며 집권 환상에 갇힌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학생, 재야 세력의 상당수도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냉정하게 대처했는지 의문이 든다. 10·26 이후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야당, 학생, 재야 세력의 상당수가 근거가 불충분한 낙관론에 기울어져 있었던 건 아닌지, 이 시기에 민주주의를 추구한 세력은 어떤 잘못 또는 실수를 한 것인지 찬찬히 짚어봤으면 한다. 우선 서울의 봄 상황과 분위기,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봄이라고 표현했으니까 서울의 봄이라는 것이 3월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개는 1980년 초부터 5·17쿠데타가 날 때까지 이제는 민주화로 나아갈 거라는 기대, 거의 모든 한국인이 가졌던 그런 생각 속에서 나타났던 민주화로 가는 과정을 서울의 봄으로 얘기하고 있다.

1979년 말에 12·12쿠데타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새해는 왔다. 드디어 1980년 신년을 맞이한 건데, 1월 1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개헌 시한을 앞당겨 1980년 하반기까지 정권을 이양하자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헌법 개정을 서둘러서 1981년 초에는 정권 인수인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모두 서울의 봄을 준비하는, 그러면서 서울의 봄을 구체적으로 얘기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신년사가 발표된 후 1월 16일 전년에 만들어진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개헌특위)의 첫 번째 공청회가 열렸는데 대통령 직선제를 지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2월 8일에는 개헌특위 위원장 김택수와 김종필 총재가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하고 임기는 4년으로 하되 1차 중임을 할 수 있다는 개헌 시안에 합의했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하게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갖고 있던 생각 그대로였다.

그런 속에서 2월 25일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이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불러서 만찬 회동을 했다. 이 자리에는 정일권,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 등도 참석했는데, 이 회동에 관한 기사가 동아일보에 크게 났다. 3김 중 김대중이 더 돋보이는 모임이었다. 그래서 동아일보가 김대중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돌고 그랬다.

(이 회동에 관한 기사는 만찬 다음 날인 1980년 2월 26일 자 동아일보 1면에 크게, 그것도 두 건이나 실렸다. 그런데 이 기사들에서는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김대중이 김상만 회장, 김영삼, 김종필과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도 실리지 않았다. 이 사진은 14년 후인 1994년 4월 1일 자 동아일보에 실리게 된다.

이렇게 된 건 보도 통제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에 그 이름을 쓰지 못하고 "한 인사", "한 참석자"로만 표현한 것이다. 1978년 12월 김대중이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 후 신문에서는 '원외의 모 인사', '당외 인사', '동교동 모 씨'로 표현해야 했는데,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보도 통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아일보의 이 회동 기사들에는 김대중이 참석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 곳곳에 있다. 예컨대 "(19)81년 선거의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는 인사들을 초청", "복권을 가까운 시일 내로 앞둔 가운데 대면했다는 점에서 내외의 비상한 관심" 같은 구절이 그러하다. 또한 "세 마리 사자(three lions)의 만남"이라는 글라이스틴 대사의 말이 누구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치인 이름에 대한 보도 정상화 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참석자들이 "그러면 생일을 오늘 새로 맞이한 셈"이라면서 한 인사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합창했다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이날 회동은 유신 쿠데타 이후 국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김대중이 오랜만에 참석한 행사라는 점에서도 김대중 쪽으로서는 의미가 있었다. '편집자')

2월 29일 최규하 정부가 687명을 사면 복권시켰다. 여기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등이 들어 있었는데 김대중도 이때 사면 복권이 됐다. 이 2월 29일 복권을 전후해서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나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복권되기 전 김대중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프레시안 : 어떤 일이었나.

서중석 : 김대중 자서전을 보면 1980년 1월말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뭐냐 하면, '전두환 장군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김대중 쪽에 왔다고 한다. 그래서 김대중이 합동수사본부에서 쓰던 안가로 찾아갔다. 그랬더니만 전두환은 안 나오고 보안사에서 권정달과 이학봉, 이렇게 두 사람이 나왔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이학봉은 위압적으로 김대중한테 각서를 쓰라고 했다고 한다. '해외에 나가지 않겠다. 정치적으로 자중하겠다. 그리고 정부에 협조하겠다', 이런 내용을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게 뭘 얘기하는 것이겠나. 감히 보안사의 영관급 참모들이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정도 되는 사람을 대면했을 뿐만 아니라 각서까지 쓰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갖는 의미, 그건 아주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복권시켜주겠다고 하면서 각서를 쓰라고 한 것이었는데, 김대중은 물론 거부했다. 감히 보안사 참모들이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것을 정치권에서는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한다고 난 본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걸 정부에서 요구한다면 또 몰라도 어떻게 보안사가 나설 수 있나.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여튼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3월 6일, 세간에 두 사람이 서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도 돌아서 그랬겠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 만나서 2시간이나 단독 회동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심각한 문제가 하나 제기됐다.

김영삼은 1979년 5월 30일 전당 대회에서 총재가 됐을 때 상임 고문으로 윤보선과 김대중을 모셨다. 그래서 김대중이 당연히 신민당에 입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1980년 3월 6일 회동 자리에서 김대중은 "난 신민당에 입당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이것은 김대중이 경우에 따라서는 김영삼과 다른 행동을 취하겠다는 것을 밝힌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각자 대권 행보에 나서는데, 4월 4일에 가서 다시 만났다. 그때 김대중은 신민당 입당 문제에 대해 재야인사들하고 논의해봐야 한다는 것으로 또 피했다.

줄다리기 끝에 끝내 결별한 김영삼과 김대중…1987년과 닮은꼴

프레시안 : 김대중은 1971년 대선 때 신민당 대통령 후보도 한 사람인데 1980년 이때는 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받아들일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본래 신민당 당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후 잡혀가고 납치되는 등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당원 자격이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당 대회가 있던 1979년 5월 30일 그때 김대중은 사면 복권된 상태가 아니지 않았나.

하여튼 이 4월 4일 대좌가 특이한 형식으로 돼 있다. 뭐냐 하면 두 사람이 알맹이 없는 4개 항의 공동 발표를 하고 그러고 나서 각자 자기 입장을 단독 설명하는, 아주 이상한 방식을 택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김대중 동지가 100퍼센트 신민당에 들어오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다'고 딱 잘라 말했다. '다만 그 시기는 재야인사들과 협의해서 결정하겠다', 김대중이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은 '4월 7일에 열리는 신민당 중앙상무위원회의 논의 결과를 보고 입당 문제를 결정하겠다'며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입당을 못하는 것은 새로운 재야 정당 출현을 막기 위해서다. 모든 재야인사를 흔쾌히 영입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했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 신민당에 김대중이 들어오면 총재인 김영삼이 훨씬 유리한 상황에서 대통령 후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고, 따라서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쪽으로서는 그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얘기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삼계 쪽 의사대로 중앙상무위원회 구성안이 채택됐다. 그러면서 4월 7일 유명한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 포기 선언이 나오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따로 놀게 됐다, 이 말이다. 1987년 여름 상황하고 거의 비슷한, 한 치도 다르지 않다시피 한 상황이 이때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신민당 입당 포기 선언을 발표하게 됐다고 김대중이 자서전에 쓰면서 그다음에 쓴 게 있다. "이문영, 박형규, 문익환 이분들이 긴급히 모여 나의 입당 포기 선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며 지지한다"고 했다고 썼는데, 이것도 1987년하고 거의 비슷한 상황이다. 그리고 "당시 재야 민주 인사들 가운데 대다수는 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써놓았다. 이 점 역시 198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분들은 다 김대중이 돼야 한다고 봤다. "특히 문동환, 이문영, 한완상, 박종태, 예춘호가 적극적이었다", 김대중은 이렇게까지 썼다.

(야권이 내홍을 거듭하던 이 시기에 공화당도 만만찮은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10·26 이후 공화당에서는 소장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정풍 운동이 전개됐다. 부정부패한 자, 타락한 자 등을 당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정풍 운동의 주요 표적으로 지목된 이후락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락은 1980년 3월 24일 기자 회견을 열고 "나를 몰아내야겠다는 정풍의 기준은 김(종필) 씨가 부여한 것"이라며 김종필 총재 퇴진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김종필 측은 이후락이 전두환·신군부의 보호를 받고자 김종필을 흠집 내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후락에게 탈당 권유 처분을 내렸다. 편집자)


▲ 김대중의 신민당 입당 포기 선언을 분석한 동아일보 1980년 4월 8일 자 1면 톱기사. '범야권 양분, 정국에 난기류'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민주화 열망에 거듭 찬물 끼얹은 양김 분열

프레시안 : 양김 분열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길목에서 거듭 나타나, 민주화를 열망한 다수의 국민들에게 연이어 찬물을 끼얹었다. 대표적인 시기가 1980년과 1987년이다. 1987년에 양김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12·12쿠데타의 주역 중 하나인 노태우는 대선 승리를 기대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대다수가 동의할 법한 사항이다. 1980년의 경우 1987년과는 상황에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양김 분열이 민주화로 나아가는 데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특히 12·12쿠데타로 전두환·신군부가 군을 장악한 이후에는 양김이 힘을 모아도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찬탈을 막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오히려 갈라섰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서중석 : 심각한 문제일 수 있었는데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대통령 직선제로 가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3김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인의 대다수가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다만 신현확 총리 쪽 또는 크게 봐서는 최규하 정부 쪽에서 나온 의견이라고 하면서 이원 집정부제 분위기를 띄우고 냄새를 피우는 얘기는 있었다. 예컨대 1980년 3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 형태로는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 내각제를 가미한 절충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시사했다. 이원 집정부제 쪽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대통령 직속 자문 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했다. 이건 국회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걸 얘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세를 얻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직선제가 될 가능성이 컸고 3김이 그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으며 국회에서도 그걸 통과시킬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군이나 최규하, 신현확 이쪽에서는 '1971년 대선 경험을 볼 때 직선제를 하면 김대중이 제일 유력하지 않겠느냐', 그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김대중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1971년 그때 박정희를 얼마나 위기에 몰아넣었나. 영남 몰표가 아니었다면 박정희가 될 수 없는 상황 아니었나. 더욱이 이제는 박정희도 없는 상황 아닌가. 물론 김종필, 김영삼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대중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군 또는 최규하, 신현확 정부 일각에서는, 김종필에 대해서도 그런 게 좀 있긴 했지만, 특히 김대중에 대해서는 아주 두려워한다고 할까 기피하는 게 있었다. 12·12쿠데타 이전 정승화 발언에서도 이미 그런 게 나온다. 여러 기록에 그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김대중 자서전에 나온 걸 한번 보자. "공산주의 활동을 한 일이 있는 사람은 장교가 될 수 없듯이 국가 원수도 미심쩍은 사람은 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1979년 11월 28일 기자 간담회에서 공공연하게 얘기했다. 이게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는 건 뻔한 것이었다. "정승화는 언론계 간부들을 세 차례나 육본으로 초청해서 나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김대중 자서전에 나와 있다.

그런데 12·12쿠데타로 군권을 쥐게 된 전두환 쪽은 정승화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 아닌가.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점에 아주 미묘한 게 많이 들어 있었다.

신군부 저지가 최우선 과제이고 대선은 나중 문제였거늘…

ⓒ오월의봄
프레시안 :
생각해볼 만한 다른 사항으로 어떤 것이 더 있나.

서중석 : 김대중은 4월 7일 신민당 입당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김대중 쪽 또는 3김 쪽에서 신군부 세력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제일 큰 무기가 뭐였겠나. 그건 국회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국회 하나는 열리고 있었다, 이 말이다.

물론 이 국회는 유신 헌법에 의해 제한된 민의밖에는 담겨 있지 않았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하는 유정회 소속이었고, 나머지 3분의 2도 좀 이상한 선거를 통해 뽑는 구조 아니었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1978년 12·12선거 결과에는 그래도 민의가 상당히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도 당시 민의를 어느 정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가 국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국회를 무시할 수 없었다.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국회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언론도 개헌 관계 보도를 포함해 국회 보도를 매우 중시했다.

국회를 통해야 3김은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었다. 5·17쿠데타를 다루면서 자세한 얘기를 하겠지만, 국회를 통해 계엄을 풀고 신군부를 견제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으로 얘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당을 포기했다고 할 경우 국회를 통해 신군부를 견제하는 게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양김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더 그랬다. 물론 그 이후에 와서 많이들 생각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양김이 힘을 합쳐도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 보안사 간부 이학봉 등이 김대중한테 한 짓이 있지 않나. 그런 걸 보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민당 입당 포기, 이건 신민당에 그대로 들어갈 경우 김영삼은 유리하고 자신은 불리하기 때문에 김대중 쪽 기준으로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갈 수밖에 없던 면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 큰 테두리에서 신군부를 어떻게 견제할 것이냐, 여기에다가 더 초점을 맞췄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그건 야권이 1987년에 마주치게 되는 상황과 똑같은 것이다. '노태우 집권을 막으려면', 이것과 같은 것이다.

그다음에, 4월 7일 입당 포기 성명에 이어서 재야인사들이 자신의 신민당 입당 포기를 지지했다고 김대중이 자서전에 썼다고 앞에서 말하지 않았나. 4월 18일에는 더 나아가서 동국대 강당 연설에서 김대중은 재야 세력이 민주 세력의 구심이라고 얘기했다.

재야 세력이 민주화 운동의 구심, 핵심이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야말로 간고(艱苦)한 상황에서 정말 헌신적으로 싸워오지 않았나. 민주화 운동에서 그분들의 위치는 굉장히 높다. 우리 현대사, 그중에서도 민주화 운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가질 수 있는 힘이라고 할까, 영향력이 제약돼 있었다. 그러한 재야 세력을 민주화 세력의 구심, 자기 자신의 활동의 구심으로 삼겠다는 시사를 하면 상대편, 예컨대 신군부 쪽이나 신현확을 비롯한 최규하 정부 쪽에서는 그것을 상당히 껄끄럽게 여기거나 강하게 반발할 수 있었다. 이 세력들이 김대중 다음으로 미워한 사람들이 어느 쪽이겠느냐, 이 말이다. 그 경우 오히려 더 강경한 대치, 대립 국면을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 좀 더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게 중요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거듭 말하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의 헌신, 그분들이 한 활동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정치인은 현실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최규하나 내각을 비판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를 열어놓고 그러면서 신군부를 제압하기 위해 연합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심사숙고하는 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최대 현안은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는 걸 막는 것이었고, 대통령 선거 부분은 나중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 신군부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는 신군부 견제를 위해 3김이 단결하고 최규하 쪽과도 맥을 통하면서 국회를 충분히 활용해 계엄을 푸는 것이 필요했다.

이 대목에서 지난번에 YWCA 위장 결혼식 사건(1979년 11월 24일)을 다루면서 소개한 김상현 얘기가 다시 떠오른다. 김상현은 민주 헌법으로 개헌하기 위해 최규하 체제를 오히려 강화해줘야 하며 그 체제로 직선제 개헌을 주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군부가 나온다고 김대중이 내다봤다고 얘기하지 않았나. 이때는 김대중이 사면되기 전인데, 그러한 김상현 얘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한 가운데, 4월 17일 신현확은 <뉴욕타임스> 회견에서 놀라운 소리를 했다. "개헌은 국회가 아닌 정부 주도로 하겠다." 그러면서 유신 체제에 대해 상당히 강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물론 신현확은 유신 체제 말기에 부총리를 지낸 자니까 당연한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의사를 표명했다는 건 양김 또는 3김에 대해 '그쪽이 집권하는 걸 우리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얘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쪽의 대립을 보면서 신군부가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았겠나.

김영삼·김대중 갈라설 때 전두환·신군부는 회심의 K-공작

▲ 전두환 보안사령관(1979년 11월 6일). ⓒ연합뉴스
프레시안 :
김영삼과 김대중이 분열하고 세 불리기 경쟁을 하고 있을 때 전두환·신군부는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서중석 : 이 시기에 신군부는 뭘 하고 있었느냐. 유명한 K-공작이라는 걸 펴고 있었다. 이 공작에는 이상재가 깊이 관여했다. 이상재는 보안사 준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한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쓰리 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이학봉, 권정달에 이어 그다음 정도로 이상재가 힘이 센 것처럼 당시 부각되고 그랬다. 하여튼 이상재는 1980년 2월에 이미 보안사 쪽에서 K-공작 계획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3월부터 K-공작 계획이 구체화된다.

권정달 증언에 의하면 K-공작은 이상재가 입안 단계부터 시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허화평, 허삼수 등 보안사의 핵심 인물들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침에 따라 배후에서 이상재를 조종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핵심 세력이 자신들의 정권 장악 기도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언론을 조종, 통제, 회유할 목적으로 그러한 계획을 수립, 시행했다고 권정달은 진술했다. (K-공작에서 K는 King을 가리킨다. 신군부의 언론 통제 문제를 조사한 국방부 과거사위는 2007년, K-공작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실시됐다고 밝혔다. '편집자')

그러니까 K-공작은 간단히 얘기하면 전두환 권력을 만들기 위해 언론을 조종, 통제, 회유한 작전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서는 이상재 쪽이 주된 활동을 했는데 언론사 간부들을 접촉해 '현재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안 된다', '3김은 안 된다. 군부가 집권해야 한다', 이런 취지의 보도를 하도록 유도하고 그러한 성향의 여론이 조성되도록 회유했다. K-공작 담당자들은 언론이 3김과 신군부를 분리, 차별화해서 다루도록 했다. 신군부를 안정 구축 세력으로 내세우면서 '지금은 선(先)안정이 중요한 때다', 이런 논리를 퍼뜨리고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을 분석해서 협조 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한 것이다.

K-공작이라는 건 나중에 언론인 접촉 공작이라는 것으로 진행됐는데 이건 1980년 8월 하순까지, 이때가 전두환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인데, 계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K-공작을 통해 전두환 쪽은 3김을 물리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겠다는 바로 그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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