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프레시안 : 박정희 사후 민주화를 향한 여정은 전두환 일당에게 발목을 잡혔다. 결정적인 계기는 12·12쿠데타다.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한 1979년 12월 12일 그날 상황을 되짚었으면 한다. 12·12쿠데타,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12월 12일 오후 6시경 전두환은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과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에게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해 오라고 지시했다. 반란군 진압 활동을 가장 직접적으로 펴야 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그 시각에 전두환 초청으로 수경사 사령부를 떠나 연희동 비밀 요정으로 가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경 수경사 30경비단장실, 경비단장은 장세동이었는데 그 단장실에 12·12쿠데타의 핵심 인사들이 다 모였다.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제1군단장 황영시 중장, 제9사단장 노태우 소장, 제20사단장 박준병 소장,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제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 그리고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과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등이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 시간에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이 있는 총리 공관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는 대통령이 아직 청와대로 거처를 옮기기 전이었다.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을 대동하고 가서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연행 지시를 내려달라고 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에게 그건 국방부 장관을 통해서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신이 직접 와서 보고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그리고 '계엄 시에는 계엄사령관이 매우 막중한 자리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계엄사령관을 임명했다. 따라서 국무위원인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는 내가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이렇게 나왔다. 그래서 전두환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정승화를 연행하라는 지시를 대통령한테서 끝내 받지 못했다.
정승화의 판단 착오 덕분에 유리한 고지 선점한 쿠데타 세력
서중석 : 12·12쿠데타 세력이 승리하는 첫 번째 계기는 정승화를 잡아가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게 아주 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경윤과 허삼수가 전두환 지시에 따라 참모총장 공관으로 갔는데, 오후 6시 50분경 도착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정승화한테 10·26과 관련해 조사할 게 있으니 자기들하고 같이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승화가 '나를 데려가도 좋다고 대통령이 승인했느냐'고 물어봤다. 두 사람은 '네, 승인하셨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거짓 답변을 한 것이다. 정승화는 부관을 불러서 대통령이 있는 총리 공관이나 국방부 장관한테 빨리 전화 연결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M16 소총 소리가 들렸고, 우경윤 대령과 허삼수 대령이 동시에 달려들어 좌우에서 정승화 총장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강제로 끌고 가려 했다. 그러면서 총성이 계속 울렸는데, 정승화가 사격 중지를 명령했다.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바깥에서 들어온 자들이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 아니었나. 그런데도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러자 12·12쿠데타 세력은 M16 소총을 쏘면서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총을 겨누면서 '빨리 가자'고 하고는 정승화를 차에 태워버렸다.
정승화가 판단을 아주 잘못한 것이다. 허삼수, 우경윤이 나타났을 때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정승화 자신은 항상 찜찜한 게 있었던 것이다. 10·26 그날 김재규 연락을 받고 궁정동에 불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는 그것에 대해서.
정승화는 소심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12·12쿠데타 그날 모습을 보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은 생각도 드는데, 아주 소심한 사람이어서 '이게 반란일 가능성이 있다. 전두환 쪽에서 지금 반란을 일으킨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프레시안 :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쪽을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가 12·12쿠데타 전에도 있지 않았나. 그런데 어찌하다가 그런 일을 당한 것인가.
서중석 : 전두환 쪽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가 사실은 그전부터 있었다. 10·26 직후 계엄이 선포됐으니까 이제 계엄사령관 밑에 보안사령관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보안사령관을 포함한 모든 일선 부대 지휘관 인사권까지 계엄사령관이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쿠데타가 있기 전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이 정치 장교들, 말하자면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서 그쪽 동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정승화 자서전을 읽어보면, 청와대나 중앙정보부, 보안사만 돌면서 특혜 근무를 하는 군인들이 문제가 있으니 그들을 예편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정승화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런데 정승화는 오히려 그걸 무마했다. 그뿐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만큼 총장 공관 경비를 강화해야 하는데, 오히려 경비를 맡고 있던 공수특전단 병력을 대부분 귀대시키고 일부만 남겨놓았다. 10·26 이후 공관 안팎에 배치된 병력까지 상당 부분 철수시켜버린 것이다. 계엄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너무 믿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12월 9일에 와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골프를 칠 때 전두환을 '동방사' 사령관으로 전임시키는 것이 어떠냐는 얘기를 하게 된다. '동방사' 사령관은 동해안 지구 방위사령관(동해안 경비사령관)을 말하는데 내가 군대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노재현이 국방부 차관 김용휴한테 그 사실을 알렸고, 그걸 김용휴가 바로 보안사령관한테 귀띔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12·12쿠데타가 일어나게 된다고도 일각에서는 주장한다. 하여튼 12월 9일에 와서야 그런 얘기를 국방부 장관한테 했다가 12월 12일 저녁에 그런 변괴를 당한 것이다.
프레시안 : 쿠데타 당일 무력하게 끌려간 것에 대해 정승화 본인은 뭐라고 해명했나.
서중석 : 정승화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허삼수와 우경윤이 나를 데리러 온 게 쿠데타의 수순인 줄만 알았다면 순순히 따라가진 않았을 것이다. 공관에는 외부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가 있어", 이런 게 있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공관 밖에서 놈들의 병력이 아무리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따돌릴 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대비를 전혀 하지 않다가 상황이 발생하자 정승화는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사실 자기 쪽 사격을 정지시킨 것인데, 그러고는 끌려가버렸다. 이것 자체가 12·12반란을 일으킨 쪽한테 정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다.
우왕좌왕한 육본·국방부 상층, 진압 위해 고군분투한 장태완
서중석 : 그 무렵 전두환 초청으로 연희동 비밀 요정에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헌병감 김진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승화와 함께 12·12쿠데타를 진압하는 데 제일 앞장설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대개 김재규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쪽 사람들이었는데, 12·12쿠데타 세력이 그걸 다 알고서 그 사람들을 불러낸 것이다. 하여튼 자기들을 초청한 전두환이 오지 않자, 이 사람들은 시바스리갈을 한 잔씩 비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총장 공관에서 총격 소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누가 뭘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사태가 일어난 것 같으니까 이들은 오후 7시 20분경 주연을 파하고 각각 자기 길을 갔다. 정병주는 특전사령부로, 장태완은 수경사령부로 갔다. 장태완은 사령부로 가는 차 속에서 첫 번째 지시를 내렸다. 수경사 예하 부대에 비상을 발령하고 모든 지휘관과 참모들을 상황실에 집합시키는 한편 특공대를 보내 정승화 총장을 모시고 오라는 지시였다.
그러면서 이제 드디어 양쪽이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먼저 육본 쪽을 보면, 참모총장이 끌려갔으니까 윤성민 참모차장이 대행을 해야 했는데 이 사람은 오후 8시에 육본 전 참모를 비상 소집했다. 그 후 육본은 경계 태세인 진돗개를 상향 조정했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8시 8분경 육군본부는 수도권 지역에 진돗개 둘을 발령했다. 8시 20분에는 1군과 3군에도 진돗개 둘이 발령됐다.
오후 8시 30분에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외부에서 유병현 한미 연합사 부사령관한테 문의 전화를 했다. 이때 노재현 장관이 정확히 어디 있었는지는 당시 알 수가 없었다. 정승화가 그렇게 된 상황에서 노재현은 윤성민과 함께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까 전군에 출동 지시를 내려야 할 위치에 있었는데, 당시 그런 상태였다.
프레시안 : 그 시기에 전두환 쪽은 어떻게 움직였나.
서중석 : 전두환은 결국 최규하 대통령한테 정승화 체포 결재를 못 받고 되돌아와서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그 사람들한테 얘기를 했다. 이들로서는 정말 초조한 순간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의 행동이 하극상, 반란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전두환은 황영시, 백운택 등과 함께 오후 9시 30분에 최 대통령을 다시 찾아가서 결재를 요구했다.
그 무렵 장태완, 정병주 그리고 3군 사령관 이건영 쪽에서는 반란 부대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이건영은 김재규와 상당히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사람으로 정승화 쪽의 주요 고위직 장교 중 한 명이었다.
오후 9시에서 10시 사이,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는데 이 시간에 노재현 국방부 장관하고 김종환 합참의장 등은 미 8군 벙커에 가 있었다. 그런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거기서 적극적으로 뭔가를 했다는 게 나오지를 않는다. 하여튼 거기서 두 시간 정도 있었다.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한 게 아니라 방관하면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나', 이걸 지켜보는 식이 돼버린 것이다.
자정이 지나서, 그러니까 이제 13일로 넘어간 건데,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병력이 M16으로 무장하고 특전사령관실에 난입해 김오랑 비서실장을 사살하고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 연행해버렸다. 이때 정병주는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 장태완만이 쿠데타를 진압하려고 동분서주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13일 오전 1시 30분에는 9사단 병력과 제2기갑의 1개 전차 대대가 구파발을 지나 서울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전 2시 30분에는 3공수여단, 5공수여단이 서울로 진입했다. 오전 3시에는 반란군이 국방부, 육본을 장악하게 된다. 반란이 성공한 것이다.
장태완은 이때까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했다. 그렇지만 수경사령관으로서 장태완의 활동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프레시안 : 12·12쿠데타의 그 밤, 육본과 국방부 상층은 우왕좌왕하다가 어느 순간 은근슬쩍 쿠데타를 용인했다고 큰 틀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장태완은 그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장태완은 어떤 점에서 활동에 제약이 있었던 것인가.
서중석 : 우선 이 사람이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때가 1979년 11월 16일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지나서 12·12쿠데타가 났으니, 장태완으로서는 너무 늦은 임명이었던 셈이다. 부대 구성이 상당히 복잡한데, 짧은 시간에 그걸 제대로 다 파악해서 장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건 장태완 밑에 있는 핵심 병력인 30경비단, 33경비단 이게 반란군의 핵심이었다는 점이다. 또 헌병 부대, 이것도 처음부터 반란 세력에 가담해서 움직였다. 김진기 헌병감은 정승화 쪽이었지만, 수경사에 있는 헌병 부대는 쿠데타 세력이 쥐고 있었다. 아무튼 장태완이 끌어낼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병력이 쿠데타군의 핵심이었으니, 장태완으로서는 수경사 군을 동원하는 데 상당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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