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당한 일의 정체가 대체 뭘까요?"
얼마 전 사무실에 정장을 한 30대 여성이 찾아왔다.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고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었다. 상담자 입장에서는 우르륵 쏟아내는 감정을 받아내는 조금 피곤한 상담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차분하게 자제하며 논리적으로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의뢰인은 지방자치단체 의회의 여성 의원이었다.
의뢰인은 며칠 전 의회의 정식 회의 석상에서 50대 남성 의원으로부터 '눈깔을 찢어버리겠다'는 막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지역 주민들이 성실하게 낸 세금이 쓰이는 예산을 의결하는 자리였다. 다른 이해관계와 생각을 가진 의원들 간에 견해가 당연히 충돌하고 있었다. 다소간의 언쟁이나 적당히 싫은 소리들이 오고갔다. 하지만 저잣거리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험악한 말이 오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회의 자리에서 50대 남성 의원이 의뢰인에게 "눈깔을 확 찢어버려"라고 말했다. 의회 안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회의실에 참석한 의원들이 당황해서 멈칫했고, 의뢰인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순간은 일단 우야무야 지나갔다.
의뢰인과 가해자 의원 간에는 해묵은 갈등의 골이 깊었다. 가해자 의원은 젊고 여성인 의뢰인을 동등한 동료 의원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 의뢰인과의 첫 대면 자리에서부터 악수를 청하면서 자신의 가운데 손가락을 의뢰인의 팔목으로 뻗어 꾸욱 누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해자 의원은 의뢰인과 안건에서 부딪힐 때마다 "네가 애인이 되주면 찬성 표를 주지" 같은 말을 수시로 뱉어냈다. 버젓이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이면서도 의원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신은 애인이 여럿 바뀌어 왔다며 자랑처럼 이야기를 했다. 긴 시간 서로 지역 사회에서 알아오고 지난 몇 년간은 함께 의회 활동을 해온 의원들은 그런 가해 의원의 언행에 무감각했다.
가해자 의원이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직접 의뢰인을 향해, 지역축제 부흥을 위해 예쁜 여자들을 불러 란제리 쇼를 시키자는 둥, 연애를 하자는 둥 무례한 언행을 반복하는 동안, 의뢰인은 주변 의원들에게 이를 호소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의뢰인에게 돌아온 답변들은 문제 제기를 해볼 용기조차 꺾는 말이었다. "네가 젊고 예쁜 여자라 그러는 거니 참아라", "사십을 넘기면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아진다" 같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청년인 것이 또 여성인 것이 무례를 당해도 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보다 끔찍한 것은 지역 사회의 다양한 견해와 이해관계가 공정하게 토론되고 합의돼야 하는 의회 안에서 이런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암담한 것은 지방자치 의회에서 발생한 이런 사안들에 대하여 내부적으로 문제제기하고 해결할 창구나 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성희롱으로 분류될만한 사안들이 발생한 장소가 직장이나 학교라면, 교육부나 노동부 또는 국가인권위원회라도 진정하여 다퉈볼 수 있겠지만, 의회를 대체 무엇으로 분류하면 좋을지도 애매한 것이 현실이다. 형사법상 강제추행으로 분류될만한 사안은 범죄특성상 입증이라는 지점에서 난항을 겪기 마련인데, 피해자와 가해자 양측이 모두 지방자치 단위의 의원이라는 측면에서 피해자 측으로만 신빙성을 실어주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다만 최근에 있었던 '눈깔을 찢어버리겠다'는 발언은 다분히 위협적인 데다가 이를 목격한 의원들이 다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협박이나 모욕으로 다퉈볼 여지가 있었다. 더구나 의뢰인의 주장대로라면 가해자 의원이 악수를 하면서 가운데 손가락으로 의뢰인의 팔목을 누른 행위는 강제 추행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가 틀림없으니, 입증 문제는 추후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하면서 풀어가야 할 문제지 고소조차 포기할 일이 아니었다.
한편 인권위원회가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은 직장 내 성희롱이 성(性)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인권의 문제라를 취지였음과 함께, 지금까지 지방자치 의회와 같이 조직 체계와 재직 기간이 정해져 있고 급여가 지급되는 조직이지만 막상 노동 현장으로 보기는 어려운 단위에서 발생한 성희롱 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결정한 전례가 없었음을 상기해볼 때, 인권위원회에 진정하여 이에 대한 판단을 구해볼 의미는 충분했다.
더구나 이를 둘러싸고 의회 내부에 이를 조사하고 시정 조치 등을 권고할만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은 청년이나 여성, 장애인 등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의원들에 대하여 쉽게 벌어질만한 침해 행위를 제재할 내규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비리 행위가 발생한 경우에 생긴 문제를 처리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차별일 수 있음을 고민해볼만한 문제였다.
"제가 당한 일의 정체가 뭘까요?"라고 묻는 의뢰인에게 "당신에게 일어났던 일은 강제 추행이고, 협박이나 또는 모욕에 해당할 수 있으며, 지속적인 성희롱이었다"라고 말해주었다. 개인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항들이 특수한 배경들과 혼재되어 생겨난 문제점들과 다퉈볼만한 지점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의뢰인에게 선택을 하도록 하였다. 의뢰인은 자신의 일을 겪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성적 수치심을 비롯한 정신적 고통도 컸을 뿐 아니라, 현재 이러한 사안이 의뢰인이나 의뢰인이 속한 지자체만의 문제가 아니고 바뀌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현재 이 사안은 형사 고소와 인권위원회 진정이 되어 그 조사와 판단이 진행 중에 있다.
한편 가해자 의원은 의뢰인이 자신으로 하여금 눈깔을 찢어버리겠다고 말하도록 화가 나게 만든 것이라며 의뢰인을 모욕죄와 무고죄로 역고소를 하였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역고소는 최근 관련 사건의 트렌드처럼 벌어지고 있다. 이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하지도 않은 발언이지만 설령 하였다고 하더라도 법리적으로 모욕죄에 전혀 해당하지 않을 것이 명징한데도, 지역 경찰서에서 사뭇 진지하게 피해자에게 소명을 하라고 독려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현재 이 사안은 의뢰인이 가해자가 주장하는 발언을 소명하든 안하든 법리적으로 범죄 구성이 될 만한 사안이 전혀 아니지만, 성폭력 사건에서 통상 피해자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히는 차원에서 고소권을 남용하는 일이 잦고 수사기관에서 본의 아니게 이를 조력하게 되는 상황들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유관 여성단체들과 논의하여 해당 경찰서에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사회에서 누리는 그나마의 평등은 아픈 개인들의 고된 어깨에서 비롯된다. 이 사건의 시작은 어느 개인의 피해였고, 이후 과정은 여느 피해자들이 겪는 고단함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끝에는 피해 입은 개인이 더 고단한 과정을 선택함에 있어서 절감하고 갈구했던 직장이나 학교가 아닌 곳에서의 성희롱, 성차별 문제가 현재 법테두리 안에서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나 제도 개선으로 이루어지기를, 함께 뛰며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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