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사건들은 평범하게 시작된다. 어느 날 오전, 직원이 추행 정도가 심하지 않은 직장 내 성희롱 상담 문의가 와 일정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 날 오후, 단정한 차림의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말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멈칫했다.
"사안이 심한 건 아니에요. 어쩌면 제가 예민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증거가 없어서 안 믿으실 수도 있는데…."
그는 심상한 얼굴로 심상하지 않아진 일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대기업의 인사 팀에서 간부로 근무하는 기혼 여성이었다. 그는 지난 1년간 상사로부터의 희롱을 당하고 있노라 이야기했다. 그의 상사는 그에게 버젓이 부여된 직급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줌마라 칭했다. 자기 집무실에 불러 업무 지시를 하면서는 립스틱 색깔이 야하다든가, 주말 부부인 남편과의 성관계는 잘 유지되는지 물었다.
회식 때는 화장실을 간다며 지나가면서 실수인양 여자의 허벅지나 어깨를 잡기도 하고, 택시를 잡아준다며 부축을 빙자해 팔뚝 안쪽을 손가락으로 주물럭주물럭하기도 했다. 퇴근 후 업무 때문이라며 전화를 걸어와 뜬금없이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중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심하게 만지거나 수작을 부린 건 아니지만…. 차라리 그러면 낫겠어요. 이건 문제가 안 되겠죠?"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성희롱에 해당이라도 되는 건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했다. 마음이 힘든 일들을 계속 당하면서 우울 장애 증상이 나타날 정도였지만, 발생 상황이나 가해 행위 패턴상 목격자나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좌절했다. 가해 상대가 직장 내 성희롱을 고지 받고 처리하는 인사 팀의 수장이다 보니, 지레 포기하면서도 억울함이 배가됐다.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그는 신분상 노조의 보호를 청하기도 입장이 애매했다. 포기해야하나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서 바로 위 상사인 파트장에게 먼저 의논을 했다. 그랬더니 같은 회사 다른 사업장에 있는 그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사내 커플인데 괜한 오해와 분란으로 둘 다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어쩌느냐 하면서 불안감을 조성했다.
"성희롱이라고 보긴 좀 그런 거죠? 그런데 저는 마음이 너무 힘들고. 그렇지만 남편에게까지 그런 전화를 한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화나고…."
그간 인사팀장의 행위를 감수하는 것만으로도 가랑비에 옷 젖듯 정신적으로 병들어왔다. 그런데 애써 용기를 내서 다른 직장 상사와 의논했더니 인사팀장에 대한 징계위원회는커녕 제대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편에게 그런 전화가 가다니 막막하고 불쾌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엔 그는 심상했던 표정을 허문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가 당한 일은 개별적으로 나누어보면 일부 행위는 애매할 수 있지만 일부 행위는 명백하게 성희롱에 해당하며, 그 행위가 복합적으로 지속되왔다는 점에서 직장 내 성희롱에 충분히 해당될 수 있음을 말해줬다. 애매한 지점 앞에서 객관을 유지하려는 예민함은 훌륭하다고 격려했다.
부족한 증거 대신 일자별로 구체적인 일시, 장소, 행위를 정리하도록 하고 회사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내용 증명을 보내기로 했다. 인사 팀 상위 간부가 이를 고지 받고도 남편에게 그런 전화를 한 것은 일종의 고지 후 불이익의 예비 행위로 해석될 수 있음을 기재했다. 다행히 아내로부터 평소 불편을 들어온 남편은 문제의 전화를 녹취해 두었다.
그녀는 회사를 계속 다니기를 원했고 피해가 멈추기를 원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공정한 조사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신뢰 있는 제3자 기관 등의 모니터링을 요구했다.
애매하지만 불쾌하고, 불쾌하지만 권력 구조상 말하기 어렵고, 그래서 참았더니 이어진다면, 최소한 그것은 힘희롱이다. 성희롱은 힘희롱의 한 갈래일 뿐이다. 그 행위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면 그것이 성희롱이다. 행위가 애매해서 경미해서 말을 못하는 것인지, 힘의 불균형상 '말하기' 애매했던 것인지를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행위는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말하기가 애매하다면, 당사자에게든 조직에든 말을 해야 한다.
현재 이 사안은 해당 회사에서 발생한 유사하되 전혀 반대 사안과 맞물려 계속 협상과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다음에는 유사하되 유사하지 않은 사안에 대하여 마저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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