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상담을 하고 싶어요. 이게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억울해서…."
수화기 너머에서 그러잖아도 가냘픈 목소리가 머뭇거림과 떨림을 담고 전해진다. 법원에 소장을 내는 것도 아니고 수사 기관에 고소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망설이고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그저 변호사에게 뭘 물어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했나 보다.
며칠 후 사무실로 단정한 얼굴을 한 30대 초반의 여성이 찾아왔다. 첫인상만큼이나 단정하게 상황을 정리한 서면을 내밀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그녀는 제법 탄탄한 중소기업 인사 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는 일의 성격상 회사 대표로부터 직접 결재를 받거나 의논을 나눌 일들이 잦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대표의 그녀에 대한 시선이나 말투가 지나치게 다정한가 싶었다. 그러다 대표가 법인 카드를 내밀면서 일을 잘해서 주는 포상이라며 원피스를 사 입으라고 했단다. 다리가 예쁘니 치마를 입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법인 카드를 준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사 대표이고, 명목이 포상이라고 하니 옷을 사 입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부터 회사 대표가 회식 끄트머리에 그녀의 머리를 만진다거나 손목을 잡아끄는 일이 생겼다. 그러다 급기야 사귀자는 이야기를 건넸다. 짐작하겠지만, 회사 대표는 50대 후반의 유부남이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는 입장이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회사 대표의 구애는 계속됐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좀 더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사 보복으로 돌아왔다. 기존에 결정 권한을 주었던 일들에 대해서 갑자기 결재를 정식으로 득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다. 출근 시간 15분 전에 와 있지 않은 것도 지각인양 시말서도 요구했다.
그제야 그녀는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회사에 정식으로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이 문제를 고지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서 법인 카드로 원피스를 샀던 것을 문제 삼았다. 기가 막혀 엘리베이터 앞에서 회사 대표를 기다려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더니, 그가 도망치듯 뿌리쳤다. 따라가며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엔 회사에서 공문으로 회사 대표에 대한 명예 훼손을 운운하는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그녀의 질문은 몇 가지로 요약됐다. 첫째 자신이 법인 카드로 원피스를 산 것이 횡령 죄에 해당되는 것인지, 둘째 자신이 당한 일이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되는지, 셋째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된다면 취할 수 있는 법적 조치가 무엇인지 등이었다.
"횡령 죄는 보관자 지위에 있는 자가 불법 영득 의사가 있는 경우에 성립됩니다."
우선 횡령 죄는 고의가 요구된다. 그녀가 법인 카드 보관자의 지위에서 그것을 통해 불법적으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고의가 인정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횡령 죄는 회사 대표의 지시에 따라 옷을 산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회사 대표 자신에게 해당된다. 회사에서 정한 절차에 반하여 포상을 한 것이라면 그 책임은 법인 카드를 사용할 권한을 갖고 소지하였던 회사 대표에게 있다는 이야기다.
"당신이 당한 일은 직장 내 성희롱이 맞다."
꼭 몸을 만지거나 야한 농담을 하는 것만이 직장 내 성희롱이 아니다. 회사 대표는 직장 내에서 계급적 우위에 있는 자이다. 이러한 자가 업무 시간 중에,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부하 사원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만한 행위를 하였다면 당연히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된다. 가령 포상으로 "옷을 사 입어라" "다리가 예쁘니 원피스를 사 입어라"는 명백히 의도가 다른 경우에 해당된다.
우연히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떼 준다거나 손목에 손이 닿았다거나 하는 것 자체로 직장 내 성희롱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하 직원에게 사귈 것을 종용하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손목을 잡아끄는 행위는 실무에서도 행위자가 성적 만족을 추구하거나 피해자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고자 하는 '추행의 고의'가 인정된다.
"당신은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서 국가인권위원회나 노동부에 진정을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한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나 노동부에 진정을 할 수 있다. 다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경우는 회사가 직장 내 성희롱을 고지 받고도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준 경우이므로, 노동부에 갈 것을 권유하였다. 다만 이 경우에 형사 고소는 권하지 않았다.
회사 대표가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손목을 잡아끌고 했던 행위는 형법상 강제 추행에 해당하지만, 회사 대표가 완강하게 이를 부인하고 있고 이에 대한 입증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라 마음은 괘씸하지만, 실무적으로 기소가 많이 불투명하다고 판단되었다. 당사자가 정히 원하면 고소를 하는 것이 맞겠지만,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부담이 적은 방법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당사자의 진술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면 기소가 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가 흔치 않아, 이러한 설명을 하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권했다. 기타 민사 청구는 향후 진정 처리 결과와 회사의 태도를 지켜보면서 결정하도록 조언하였다.
직장을 다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당한 일이 성희롱인지 판단하기까지 망설임이 많고, 이를 다툴 수 있을지 갈등이 많다. 이후에 회사가 피해자의 직장 생활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건져 올려 내밀면 시쳇말로 '멘붕'이 온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다. 피해는 피해고, 잘못은 잘못이다. 나의 행동이 잘못이 될 수 있는지, 내가 한 잘못이 내가 당한 피해를 갈음할 만한 것인지, 또 내가 한 잘못이라 하더라도 이 시점에 이 문제제기를 당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객관적으로 계량해야 한다. 피해를 다른 잘못을 들이밀어 그 입을 막으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불법 행위이다. 용기를 갖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도 괜찮다.
이은의 변호사(ppjasmine@nate.com)는 이은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이나 아래 전화로 연락을 주십시오. (평일 오전 11시~오후 6시 : 02-597-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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