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김영삼 겨냥한 공작 정치의 도발, 총재단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프레시안 : 1979년 YH사건 이후 정국을 살폈으면 한다. 유신 정권이 YH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박정희와 김영삼은 극한 대립으로 치닫지 않나.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은 한편으로는 YH사건과 연결해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좌경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작업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영삼을 무력화하는 활동을 노골적으로 전개하게 된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것이 신민당 총재단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문제다.
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강제 진압 후 신민당 의원들은 마포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런데 농성이 한창이던 8월 13일, 신민당 원외 지구당 위원장 세 사람(윤완중, 유기준, 조일환)이 총재와 부총재를 모두 포함한 총재단의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1972년 유신 쿠데타 직후 정치적 보복이라고 할까, 탄압으로 여러 야당 의원이 보안사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그러면서 조윤형, 김상현, 조연하 이 세 사람이 구속되지 않았나. 조윤형은 그때 3년형을 선고받고 중간에 가석방으로 출옥하는데, 1976년 3월에 가서야 형 집행이 종료됐다. 김영삼은 1979년 5월 30일 총재로 선출되고 나서 부총재 중 한 사람으로 조윤형을 임명했다.
그러자 원외 지구당 위원장 세 명이 '5·30 전당 대회에 참가한 일부 대의원들의 자격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김영삼의 총재 당선이 무효라며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다. 이들이 문제 삼은 일부 대의원은 조윤형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1976년에 각목 대회가 있었을 때에는 조윤형이 그 전당 대회에서 김영삼이 아니라 이철승을 지지해서 그런 것인지 자격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김영삼이 총재가 되자 이런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사실 신민당 전당 대회의 대의원 가운데 일부가 법적으로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정보가 5·30 전당 대회 후 공화당에 들어왔다. 신민당 비주류 쪽에서 흘린 것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튼 신민당 전당 대회 직후 공화당에 이른바 신민당 무자격자 대의원 명단이라는 게 넘어왔는데, 신형식 공화당 사무총장은 정치 도의상 거론할 수 없다고 묵살했다.
그런데도 이 사안이 정국의 주요 현안이 된 건 역시 공작 정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총재단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의 공작에도 차지철이 깊이 개입했다. 이 사건은 심리 도중에 배석 판사가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의아심을 샀다. 신민당은 총재단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세 사람을 바로 제명 처분했다.
그런데 9월 8일 서울민사지법은 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부장판사는 조언이었다. 이 사람은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의 아들로 법조계에서 평판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정국이 워낙 그랬기 때문인지 이런 결정을 내렸다. 또한 조언 부장판사는 5·30 전당 대회 의장 정운갑을 신민당 총재 직무 대행자로 선임했다. 정당 대표가 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직무 집행이 정지된 건 한국 정당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이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정면으로 받아친 김영삼 "박정희 씨 하야를 요구한다"
서중석 : 법원에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해서 김영삼이 기가 죽거나 멈칫하는 태도를 보였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이틀 후인 9월 10일 김영삼은 기자 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이 불법, 무법 정권이라고 지적하면서 "나는 여기서 박정희 씨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라고도 하지 않고 박정희 씨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치인으로서는 아주 드문 발언을 했다. "오늘의 중대한 국면에 처해서도 궐기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함께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면서 국민들한테 궐기하자는 선동까지 강하게 했다.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을, 법원의 그러한 결정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기자 회견에서 김영삼은 "가처분 결정은 정치 권력의 지시에 의한 조작극일 뿐만 아니라 헌정의 일익을 담당하는 정당의 지도 기능이 민사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승복할 수 없다"고 공언했다.
그 무렵 전북 전주 중앙성당 기도회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김재덕 주교의 역할 때문에 그랬을 텐데 당시 전주 교구는 반박정희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이었다. 아무튼 전주 중앙성당 기도회에서 김재덕 주교는 김영삼에 대한 가처분 결정을 마치 조롱하는 것처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을 주장했다. 이 기도회가 끝난 후 1800여 명의 신자들은 침묵시위와 철야 농성을 했다.
가처분 결정을 그런 식으로 한다면 5·30 전당 대회에서 상임 고문으로 추대된 윤보선과 김대중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이 공동 의장인 민주통일국민연합은 성명서를 내고, 전당 대회 의장도 5월 30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됐는데 어째서 전당 대회 의장만 합법이 돼가지고 총재 직무 대행자로 선임될 수 있는 것이냐고 반박했다.
정치적인 사건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야당은, 특히 유신 체제 같은 데에서는 존속할 수 없었다. 유신 체제와 싸운 사람들은 다 입건되는 식으로 언제든지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걸 트집 잡아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결정한다면, 그건 야당 노릇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가처분 결정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자 정부는 사법부 비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건 10·26 이후 김영삼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총재직을 수행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걸 보더라도 이 사건은 정치적인 사건이라고들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법조계에서 촉망받는 인물이던 조언 부장판사는 6월항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86년 사법연수원장을 끝으로 판사를 그만두게 된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조언 판사가 그것보다는 더 높이 올라갈 사람이라고 보기도 했지만, 그해에 법복을 벗었다. (1986년 변호사 개업을 한 조언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 4월 국세청의 세무 조사를 받았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1979년 그 사건에 대한 보복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법원 결정 후 신민당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정운갑이 총재 직무 대행을 수락하면 신민당은 이제 두 조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영원히 불복하겠다고 김영삼은 선언하지 않았나. 양쪽 간 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정운갑이 총재 직무 대행직을 수락했다. 그러면서 신민당은 정치적 당수와 법적 당수의 기이한 이원 체제로 운영됐다. 이철승, 신도환 등 비당권파, 비주류는 정운갑 체제를 지지했다. 정운갑은 9월 2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총재 직무 대행직을 정식으로 등록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당의 지도 기능이 민사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승복할 수 없다"고 선언한 김영삼이 당 안팎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운갑이 총재 직무 대행직을 중앙선관위에 등록한 그날(9월 25일) 1500여 명의 신민당원이 마포당사에서 김영삼 총재 수호 전국 당원 대회를 열고, "김영삼 총재 체제가 정당하게 추대된 우리 당의 유일한 정통"이라고 선언하는 한편 "관선 대행은 반당(叛黨)의 표본"이라고 비난했다.
정운갑 대행 체제에 치명적인 타격은, 이건 박정희에게 큰 타격이기도 했는데, 김영삼을 지지하는 소속 의원이 42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신민당 의원 중 3분의 2가 김영삼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쥐 같은 일부 동물은 큰 지진이 나기 전에 그걸 사전에 감지하고 살기 위해 도피한다고 하지 않나. 박정희 정권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데 다수의 야당 의원들이 그러한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김영삼 쪽에 줄을 섰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김영삼과 함께했다가는 나도 김영삼처럼 호되게 당할 수 있다.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일 텐데 이때는 그렇지 않았다.
야당 의원들 중에는 민주주의 신봉자들 또는 '그래도 야당다운 야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야당 의원들 중 다수는 기회주의자나 정상배 또는 '유신 체제에 음으로 협력도 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듣던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김영삼 쪽에 다수가 줄을 서는 일이 일어난 건, 이 사람들이 '이 형국은 박정희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권력이 무너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봤기 때문 아니겠나. 갈 데까지 간 유신 체제가 이제 붕괴하는 것 아니냐는 강한 느낌, 그걸 수십 년간 정치 활동을 하면서 갖게 된 감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당시 기자들도 이 사람들이 투철한 민주 의식을 갖고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하여튼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점점 분별력 상실한 박정희, '김영삼 의원직 제명' 무모한 결정
프레시안 : 정운갑이 총재 직무 대행을 수락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쪽 공작은 없었나.
서중석 :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에도 안 나온다. 뭔가 있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해볼 수도 있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정운갑은 일제 말에 고등문관 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사람인데, 이승만 정권 때에는 농림부 장관을 거쳐 자유당 의원을 했고 박정희 정권 때에는 야당 의원을 여러 차례 했다. 최규하처럼 살살, 상황에 따라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계속 출세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 사람이다.
어쨌건 법원 결정에 대한 김영삼의 강한 반박, 그런 김영삼을 다수가 지지하는 야당의 분위기 등과 함께 박정희를 분노케 한 것은 9월 16일 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였다. 김영삼이 뉴욕타임스 도쿄 특파원 스톡스 기자와 인터뷰한 기사였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한국 정부에 대한 그(김영삼)의 거리낌 없는 반대로 체포 직전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는 카터 행정부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가 그야말로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냈을 법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그의 집에서 한 회견에서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고 했다", "그는 '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박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그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국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건 납득이 안 가는 논리다.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3만 명의 지상군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건 국내 문제에 대한 관여가 아니란 말인가'라고 했다"고 돼 있었다.
김영삼이 이렇게 딱 부러지게 얘기하자, 말할 것도 없이 박정희는 이걸 즉각 문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총재 직무를 정지시키는 데서 머물지 않고 극형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직 제명 처분, 그러니까 김영삼을 아예 국회에서 몰아내겠다는 참으로 무모한 짓을 벌이게 된다. 인터뷰에서 김영삼이 한 발언을 "용공적인 이적 행위이며 민주화 압력이라는 내정 간섭을 요청한 사대 발언"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손상했으니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면서 해외여행 중인 여권 의원들에게도 귀국 명령을 내렸다.
이건 정말 난폭하고 무모한 결정이었다. 그 당시 기자나 정치인이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썼듯이 1978년 12·12선거 이후 박정희는 점점 분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 상실 정도가 심했다. 1979년 3월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게 한 것도 12·12선거에 대한 도전이자 오기의 발동 아니냐고 난 보고 있다. 또 5·30 전당 대회를 앞두고 5월 21일 기자들한테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쪽에서 5·30 전당 대회에 깊이 개입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면서 '신도환 쪽과 지금 거래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나. 물론 그전에도 그런 식으로 공작 정치를 해왔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대통령이 직접 기자들한테 얘기한다는 건 분별력 상실이 너무나 심한 상태가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김영삼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컸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게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해 국회에서 축출해버리겠다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제명 전날 밤 김영삼 만난 김재규 '대통령이 당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서중석 : '의원직 제명까지 하면 그야말로 정치적 파국으로 갈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중대 사태다', 이런 걸 야당 쪽에서만 느낀 게 아니라 여당 쪽에서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여당 쪽에서도 여러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노력했다.
유정회 원내총무 최영희, 이 사람도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신민당 원내총무 황낙주와 접촉해서 타협안을 만들었다. 큰 테두리에서 'YH 여성 노동자 농성 강제 진압에 책임이 있는 내무부 장관, 치안본부장, 노동청장 중 한두 사람을 문책하면 김영삼 총재가 그것에 대해 뭔가 답변을 해준다. 그걸 통해 유화적인 국면을 갖는다'는 타협안을 만든 것이다. 박 대통령한테 그 얘기를 하니까 "한 번 검토해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김계원 비서실장이 아무래도 걱정됐는지, 경호실장 차지철을 설득해보라고 최영희한테 얘기했다. 그래서 최영희가 차지철한테 얘기를 했는데, 차지철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선배님, 정치를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김영삼 그 사람은 안 돼요.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으려는 위험인물입니다. 당장 잘라버려야 해요", 이렇게 나왔다. 대위 출신인 차지철이 육군 참모총장까지 지낸 자기한테 이렇게 얘기하니까 최영희가 팍 쏘아붙였다. 원내총무가 이런 걸 안 하면 그럼 뭘 하느냐는 식으로. 그랬더니 차지철은 "글쎄 저한테 맡기십시오"라고 얘기했다. 이러한 얘기를 들은 김계원은 "차지철 때문에 다 틀렸어"라고 얘기했다.
그러한 가운데 김영삼을 제명 처분하기 전날인 10월 3일 박준규 공화당 의장 서리, 태완선 유정회 의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이렇게 핵심 인물 네 사람이 모였다. '이건 안 된다. 각하께 재고하도록 건의하자',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차지철이 갑자기 나타났다. 차지철은 "각하 뜻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제명하라는 겁니다"라고 콱 못을 박아버렸다. 각하 뜻이라고 하니까 누구도 할 말이 없게 돼버렸다. 차지철은 뭔가를 할 때마다 박정희 뜻임을 내세웠는데, 이것도 그러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프레시안 : 그래도 김재규는 포기하지 않지 않았나.
서중석 : 김재규가 마지막으로 김영삼을 만났다. 10월 3일 그날, '꼭 좀 만나자'고 김영삼한테 요청해서 결국 중앙정보부 공관에서 만났다. 그날 밤 9시경이라고 하는데, 은밀히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사실 그 전날인 2일 밤 김재규는 박정희하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제명해서는 절대 안 된다. 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박정희는 이미 끝난 일이라고 얘기했다. 김재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하자, 박정희는 마지못해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김영삼에게 '당신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다. 제명, 구속은 물론 당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다. 그러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이 나라도, 총재님도 불행해집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러니까 10월 26일 그날 거사할 때에도 이런 입장이 많이 작용하게 된다. 그전에 3선 개헌(1969년)을 절대 반대했던 공화당의 핵심 의원이던 정구영, 양순직에게도 김재규는 이런 방식으로 '3선 개헌을 지지해달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당시 김재규는 '박 대통령 뜻대로 3선 개헌이 안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비상사태와 위기가 닥칠 수 있다. 그러니 지지해달라'고 했다.
하여튼 김재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김영삼한테 얘기했다. 김영삼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김재규가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했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연히 기자들하고 얘기하는 척하면서 '뉴욕타임스 회견 내용이 와전됐다', 이 한마디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대개 쓰는 수법 아닌가. 김영삼은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며 1시간쯤 버티다가 밖으로 나왔다. 김재규는 김영삼을 따라 나오면서 한 번만 더 재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김영삼이 뿌리쳤다고 한다.
김영삼 제명 폭거에 오히려 더 반박정희 진영으로 몰려든 야당 의원들
서중석 : 10월 4일, 여권은 김영삼 총재의 발언이 용공적인 이적 행위이자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손상한 행위라며 국회에서 의원직 제명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신민당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해 의장석에 오르지 못한 백두진 의장은 본회의장 출입구 쪽에서 20여 명의 경위들에게 둘러싸인 채 구두로 "김영삼 의원에 대한 징계 동의안을 법사위에 회부하는 데 이의 없느냐"고 물은 다음에 의사봉도 없이 손만 흔들어 처리했다. 이어서 경호권이 발동된 가운데 본회의 장소를 146호로 옮기고, 300여 명의 사복 경찰과 50여 명의 국회 경위를 동원해 출입구와 복도를 차단하고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막은 채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159명만으로 김영삼 총재 징계안을 단 10여 분 만에 전격적으로 처리했다.
경호권이 발동된 건 1958년 12월 24일에 일어난 유명한 24파동, 그러니까 이승만 정권이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우격다짐으로 통과시킨 그때 이후 21년 만이었다. 또한 30년이 넘는 의정 역사에서 정당 대표를 이런 식으로 제명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날치기로 그렇게 해버린 것이었다.
그날 김영삼은 제명 처리가 됐다고 하니까 "공화당 정권은 오늘 국회를 권력의 시녀로 타락시켜 야당 총재를 의회로부터 추방하는 폭력 정치의 하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지난 5월 30일 내가 신민당 총재가 된 이래 계속돼온 일련의 탄압 정치에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가 모두 동조한 것입니다"라는 강경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나에 대한 제명은 완전 불법이므로 영원히 승복할 수 없으며 제명을 12번 한다고 하더라도 여당이 내세운 징계 사유는 어느 한 구절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렇게 선언했다.
프레시안 : 거센 반발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떠했나.
서중석 : 미국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은 4일 "한국 국회가 오늘 김영삼 총재를 추방한 점에 대하여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한다. 이와 같은 행동은 민주적 정부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 날인 10월 5일에는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김영삼까지 제명됐는데도 국회의원들은 오히려 더 김영삼 편을 들게 된다. 하기야 제명 사건이 워낙 난폭하고 무도한 짓이니까 그랬겠지만, 10월 13일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통일당 의원 3명, 이것도 전원인데 이들도 여기에 동조해 이날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유정회와 공화당이 10월 15일에 합동 회의를 열고 의원직 사퇴서 처리 문제를 논의한 결과를 발표한 게 16일 보도됐는데, 이번에는 그게 문제를 일으켰다. 15일에는 이 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의 사퇴서를 일괄 반려하는 온건론 쪽으로 결론이 날 듯하다고 보도됐는데, 16일에 보도된 발표 내용은 딴판이었다. "일괄 수리 또는 선별 처리를 한 후 보궐 선거를 실시토록 하자는 강경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렇게 발표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명된 의원뿐만 아니라 사퇴서가 수리된 의원들까지 보궐 선거는 물론이고 다음 총선에도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국회의원 선거법을 개정하는 문제까지 논의됐다고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계나 국민들이 들끓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끼얹은 것이었다. 그래서 분위기는 더 싸늘하게 식고 정국은 폭발 직전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날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여든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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