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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라이벌은 왜 의문의 죽음을 맞아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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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라이벌은 왜 의문의 죽음을 맞아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7> 유신 체제, 열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가 발생하고 긴급 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여러모로 어려운 속에서도 5·22 시위가 일어났다고 얘기했다. 5·22 시위는 어떤 시위였나.

서중석 : 그러한 상황에서 긴급 조치 9호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선 학생 운동이 서울대에서 일어나게 된다. 김상진 의사의 죽음을 어떻게 헛되이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시위를 벌이게 된다. 1975년 5월 22일에 일어난 시위인데 다들 '오둘둘'이라고 부른다. 탈춤이라든가 가면극 쪽 학생들이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이야기가 되는 시위다. 서울대 문리대의 민속가면극연구회와 문학회, 사범대의 야학문제연구회 같은 곳이 중심이 돼서 고 김상진 열사 장례식 추진위원회 이름 아래 5월 22일 시위를 벌이게 된다.

정오쯤 돼서 하늘을 찢는 듯한 꽹과리 소리와 복학생들이 누른 화재 비상벨 소리를 듣고 학생들이 나왔다. 탈춤패 같은 데에서 중심 역할을 했으니까 꽹과리를 크게 치지 않았겠나. 김상진 열사 조시를 읽고 반독재 선언문을 낭독할 때 100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학생들은 애국가, 정의가,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불렀고 그중 500여 명이 교문 쪽으로 스크럼을 짜고 나아갔다. 그렇지만 경찰에 의해 바로 진압되고 만다.

이 5·22 시위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사람으로 65학번 김근태가 들어가 있고, 제일 아래 학번이 스크럼 짜고 나아간 500여 명 속에 있다가 체포된 1학년 박원순이다. 그래서 박원순은 100일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기소 유예로 석방은 됐는데, 서울대에서 추방당해서 다른 대학으로 옮겨 나중에 사법 시험에 합격한다.

프레시안 : 유신 정권은 5·22 시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박정희 정권은 총력 안보를 그렇게 내세우고 긴급 조치 9호까지 내렸는데도 이런 시위가 일어나니까 또 세게 나왔다. 그래서 서울대 한심석 총장이 사임했고, 유신 정권은 치안본부장도 갈아치웠다. 그러면서 서울대 연극회, 가면극회, 문학회 등의 학생 300여 명이 연행됐는데 그 가운데 56명이 구속되고 24명이 재판에 회부되는 상당히 큰 사건이 됐다.

긴급 조치 9호 발동 직후 이렇게 5·22 시위가 일어나긴 했지만, 이 시기는 워낙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또 학도호국단 같은 것이 조직되고 경찰과 정보원이 캠퍼스에 상시적으로 주둔한다고 할까 지키고 있어서 5·22 시위 이후 1975년에는 거의 시위가 없었다. 1976년에 가서도 몇 개의 중요한 시위가 있었을 뿐 큰 시위가 일어나지는 못했다. 1977년 10월에 가서야 드디어 서울대, 연세대에서 규모가 큰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제에 이어 박정희 정권과 맞서다 의문의 죽음 맞이한 장준하

▲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인 1975년 2월 21일, 민주 회복을 위한 모든 국민의 노력을 단일화할 것을 촉구하는 장준하. 그 오른쪽은 함석헌. ⓒ연합뉴스
프레시안 :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에 휘말린 8명, 그리고 김상진의 안타까운 죽음에 이어 8월에 다시 많은 이들은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숱한 의문을 불러일으킨 장준하의 의문사다.

서중석 :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장준하 이분은 유신 체제 반대의 상징적 인물 아니었나. 그런데 이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은 상태도 이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의혹을 품게 됐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에 관한 기록도 참 많다. 기자들이 쓴 글도 많은데, 여기서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힌 것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장준하 사체는 약사봉 절벽 아래 모로 누워 있었는데 머리의 귀 뒷부분 급소의 함몰 골절 외에는 외견상 손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의복에도 암벽에서 미끄러지거나 긁힌 흔적이 전혀 없었고, 사체의 위치 또한 절벽에서 50센티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추락한 사체의 위치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체 주변에 깨지기 쉬운 안경이라든가 보온병 같은 것이 깨지거나 긁힌 흔적도 없었다. 이런 점들을 인정했다. 또 중앙정보부가 1975년 3월경 장준하에 대한 공작 문건까지 작성한 사실까지는 인정되지만 장준하가 이러한 공작의 연장선상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됐는지, 당시 동행인 중 장준하 관련 사설 정보원이 있었는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장준하가 사체 발견 장소 위 암벽 지대에서 추락하여 사망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또한 관계 기관이 그 사망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였을 개연성이 있으나 진상 규명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다만 "변사 사건 기록 폐기, 수사 관련 경찰관들의 사망, 국가정보원 자료 미확보 등으로 인하여 이 사건 진상을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으나, 관계자들을 조사하여 본 바 당시 정부가 발표한 것과 같은 취지의 단순 추락사는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장준하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 특히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크게 확대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함께 장준하는 1973년 12월 100만 인 개헌 청원 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감옥소에서도 이 양반이 운동하러 나가면 '잡범'이라 불리던 일반 죄수들이 막 박수를 보내고 그랬다. 그걸 보면서 '이래서 박정희 정권이 장 선생을 두려워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처럼 호응을 받으면서 그 시기에 새로운 통일론을 제창하고 새로운 민족 사회 건설을 주장했지만 장준하의 비원은 피어나지 못했다.

추도식에서 함석헌은 자신이 그 몇 해 동안 하루도 장준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장준하는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민족이 가장 암울한 시기로 접어드는 것을 목도하면서 의문의 사고로 저세상에 갔다. 장준하는 중국에서 광복군 훈련을 받을 때 다음과 같은 비장한 글을 남겼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이렇게 노래했던 장준하는 결국 의문의 죽음으로 저세상에 갔다. 한 가닥 위안이 있다면 정치와 사회 문제에 참여하지 않던 동갑 친구 문익환이 장준하 뒤를 잇기 위해 민주화, 자주화, 통일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한 가닥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프레시안 : 박정희의 라이벌로 꼽히기도 하는 장준하의 삶은 박정희의 생애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이지 않았나.

서중석 : 장준하를 박정희와 비교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장준하가 일제 때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과 박정희가 만주에 가서 일본 군인, 만주국 군인으로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가가 크게 대비되지 않나. 또한 해방 후 두 사람의 생애에도 너무나 대비되는 게 많을 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와서는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맞서서 대결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줬다. 그런 것들 때문에도, 그리고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 싸운 분들에 장준하가 들어간다는 점 때문에도 많은 사람이 장준하와 박정희를 비교하면서 두 사람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약사봉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장준하의 묘를 이장하던 중 유골의 머리 뒤쪽에서 지름 6~7센티미터쯤 되는, 원형으로 함몰된 자국이 발견됐다. 단순 추락으로는 생길 수 없는 정밀한 함몰이었다. 그래서 재조사를 정부에 요구했는데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미사에서 나온 유신 체제 비판조차 정부 전복 선동으로 몰아간 정권

프레시안 : 원형 함몰 발견 이듬해인 2013년 1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장준하 사건 등 진실 규명과 정의 실현을 위한 과거사 청산 특별법안'(장준하 특별법)을 발의했다. 야당 의원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이재오, 정의화 의원이 발의에 동참했다. 특히 외과 의사 출신인 정의화 국회의장은 원형 함몰 발견 후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타살이라고!"라고 밝혀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특별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고, 국가 차원의 재조사와 진상 규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면, 1976년 초에도 유신 체제를 비판한 인사들이 대거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1976년 3·1 명동 사건이 그것이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2000여 명의 신구 교회 관계 인사 및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 미사가 열렸다. 1부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강론을, 2부에서는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개신교의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다. 마무리 기도 형식으로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재야인사 10명이 서명한 3·1 민주 구국 선언을 낭독했다. 긴급 조치 철폐, 민주 회복 등을 촉구한 선언이었다.

유신 정권은 이걸 정부 전복 기도로 몰아갔다. 3월 10일 서정각 서울지검 검사장은 이 사건을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0명을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을 보통 검찰은 3·1절 명동성당 민주 구국 선언 사건이라는 긴 이름으로 부르는데, 줄여서 3·1절 구국 선언 사건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서명자가 10명인데, 어떻게 된 건지 기소된 사람은 18명이나 됐다. 이 사건이 나기 전인 1976년 1월 신구 교회 연합 기도회가 원주에서 있었고 그쪽에서 원주 선언을 발표했는데, '그쪽과 연결시켜 신구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자들을 싹 거세하자'고 해서 합쳐놓은 것이다. 마치 민청학련 사건 때 몇몇 교수라든가 지학순 주교 등을 싹 잡아들여서 반대 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고 한 것과 비슷하게 이때도 한 것이고, 그래서 기소된 사람이 18명이나 된 것이다.

이 사건이 난 시기는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총력 안보 태세가 잡혀가고 정국이 유신 체제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때, 특히 1976년 1월 대통령이 '포항에서 석유 발견'이라고 말한 것도 작용해 유신 체제가 안정적으로 가는 쪽으로 분위기가 형성되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유신 정권이 반유신 세력을 또다시 강하게 제압하려 한 것이 작용해 이 사건이 그렇게 커진 것이다.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은 징역 5년, 다른 사람들은 그 아래 징역 처분을 받았다.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 이우정, 이태영의 경우 형 집행을 정지시켰지만 그중 정일형은 유죄가 인정되면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런 속에서 함세웅, 문익환, 이문영, 문정현 같은 사람들이 나중에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다. 3·1사건으로 다시 수감된 김대중은 1977년 12월 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가 1978년 12월 27일 유신 제2기가 시작되는 제9대 대통령 취임을 기해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다. 그런데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박정희 정권한테 꼭 유리하게만 작용한 건 아니다.

부마항쟁 소식조차 한동안 알 수 없었던 '깜깜이' 긴급 조치 9호 시대

ⓒ오월의봄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사실 이 사건에서 3·1 민주 구국 선언에 서명한 10명 중 천주교 신부는 한 명도 없었다. 여기에 서명한 건 거의 다 개신교 쪽 사람들이었다. 윤보선, 함석헌 이 사람들도 개신교라고 하면 개신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여튼 신부는 없었다. 그런데 정권에서 신부들을 이 사건에 많이 끼워 넣은 것이다. 그러자 신부들이 석방될 때까지 천주교 성당에서 기도회를 많이 열었고 그러면서 유신 체제를 비난, 비판했다. 특히 문정현, 함세웅 그분들은 얼마나 많은 법정 투쟁을 벌였나. 그런 내용이 자세하게 실린 유인물이 성당마다 많이 돌았다.

긴급 조치 9호 시대는 완전히 '깜깜이' 시대, 그야말로 암흑 시대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대다수는 전혀 몰랐다. 학생들이 '뭔가 움직임이 있나', 이런 걸 알아보려면 미국 문화원이나 일본 문화원에 가서 미국 신문, 일본 신문을 봐야 했다. 거기서 1단 기사로라도 실린 것을 보면서 '아,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전에는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긴급 조치 9호로 완전히 보도를 못하게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제일 기막힌 사례가 1979년 부마항쟁이다. 부마항쟁이 그렇게 크게 일어나면서 부산에 계엄, 마산에 위수령까지 선포되지 않나. 그런데 그 계엄과 위수령이 선포되기 전까지는 부산, 마산을 제외한 다른 지역 사람들은 부산과 마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신문에서 한 줄도 읽을 수가 없었다. 보도가 일절 금지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계엄, 위수령이 선포되고 나서야 '이런 큰 사건이 있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정도로 깜깜했다. '반유신 세력과 세상을 완전히 격리하자. 양자를 이제는 분리시키자', 그게 바로 긴급 조치 9호의 제일 큰 노림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76년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부들을 그렇게 잡아 가둠으로써 그 일각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천주교 성당 쪽만은 정권의 강력한 보도 통제와 상관없이 기도회라는 집회를 하고 유인물을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 정권에서 이걸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식으로 전개됐다.

그리고 이 사건에 휘말렸다가 석방된 안병무, 서남동 이런 분들이 그전부터 주장한 자신들의 신학을 더 깊이 있게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안병무는 사회 구원, 나아가 세계 구원을 촉구해야 한다는 신학 논리를 더욱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서남동은 해방 신학이 꽃을 피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의 교역자들이 주위 현실을 각성하면서 다시 펴본 성경 속의 예수는 굶주린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 등 밑바닥 인생을 옹호했지 결코 강한 자, 권세 있는 자를 편들지 않았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하나님의 선교로 사회악, 구조악 등에 도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사회 구원, 나아가 전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는 새로운 하나님 선교 신학을 펴게 된다. 그런데 서 목사 이 양반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 안병무 박사도 아주 오래 살지는 못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안병무와 서남동은 한국 민중 신학 1세대를 대표하는 이들이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쉰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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