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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숭배한다며 기생 관광 부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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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숭배한다며 기생 관광 부추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5> 유신 체제, 스물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유신 체제에서 많이 이뤄진 작업 중 하나가 이순신 성웅화다. 박정희는 이순신의 어떤 면을 주목했나.

서중석 : 이순신 장군의 성웅화, 이 부분은 이미 1960년대 후반기부터 진행됐기 때문에 꼭 1970년대 유신 체제와 연결시켜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교육헌장이 1968년에 만들어졌지만 사실은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박정희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가 거기에 많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측면이 있다. 1960년대 박정희의 사고가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더 구체화되는 면이 강하지 않나. 이순신 장군의 성웅화에 대해서도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교육헌장이 나오기 2년 전인 1966년 4월 28일 충무공 탄신 기념사에서 박 대통령은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민족 재기의 전기를 마련하신 장군의 그 탁월한 전략과 불굴의 무공을 숭상하기에 앞서" 무엇을 중요시해야 하느냐, 이걸 얘기하고 있다. "또는 시기와 모함을 일삼던 간악한 조신들의 무고와 견딜 수 없는 옥고에도 불구하고 충정과 선견지명으로 일을 해나갔다",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서 박 대통령이 중시한 건 "시기와 모함을 일삼던 간악한 조신들의 무고와 견딜 수 없는 옥고"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기념사에서 박 대통령은 "미래를 내다본 장군의 밝은 총명과 선견지명"을 강조하면서 "야당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과 아무런 계획이나 한 가지 실천도 없이 덮어놓고 헐뜯고 불평하는 비생산적인 정신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대조하는 방식을 통해 야당이나, 박 대통령이 하는 일을 비판하는 교수, 학생 등의 모든 세력이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을 시기와 모함으로 못살게 군 간악한 조신들과 비슷한 면이 있지 않느냐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전재호 박사 같은 사람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성웅화되는 것이 아니냐, 이 점을 대단히 중시했다.

어쨌건 박 대통령이 그런 이야기를 한 1966년부터 이순신 관련 성역화 작업이 이뤄진다. 1967년에는 이 충무공 탄신일이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고 현충사가 사적 제155호로 지정됐다. 1968년에는 광화문 네거리에 유명한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고, 서울시민회관에서 국극(國劇) <이순신>이 공연되고, '충무공의 노래'가 전국에 보급됐다. 1969년에는 현충사 중건이 완료됐다.


▲ 2004~2005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KBS

유신 체제에 이용당한 이순신 장군

프레시안 : 박정희는 보통학교 5학년 때 춘원 이광수의 책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숭배하게 됐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박정희에게 이순신을 각인시킨 이광수의 이순신상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은 뭐니 뭐니 해도 뛰어난 지략으로 일본 군대를 격퇴한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을 중시하는 것은 보통 항일 정신과 연결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그런 뛰어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현지 주민들과 결합한 면도 상당히 작용하지 않았나.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의 뜻에 따라서 잘 싸워준 측면이 분명히 있다. 아울러 임진왜란 때 일본 군인들이 우리 주민들을 얼마나 괴롭혔나. 교토의 귀 무덤 같은 것도 그것의 하나이지만 정말 임진왜란 때 한국인들이 얼마나 심하게 당했나. 그렇기 때문에도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적극 협력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같이 강조된다면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 사람들의 코나 귀를 벤 다음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공의 근거로 전락해 그렇게 일본으로 가게 된 귀와 코를 매장한 것이 귀 무덤(코 무덤)이다. 교토시 명의로 된 이 안내문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 무덤(코 무덤)은 전란 하에 입은 조선 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패퇴함으로서'는 '패퇴함으로써', '전해지고'는 '전하고'를 잘못 표기한 것이다.) 귀 무덤(코 무덤)의 길 건너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편집자')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정말 억울하게 당하고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민(民)들을 위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1931년 6월부터 이순신에 대해 연재한 소설의 골격과 기본적으로 비슷하게 당파 싸움에 초점을 맞춰서 '간신들이 무고, 모함해서 이순신 장군을 감옥에 넣는 등 나쁜 짓을 했다. 그런데도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했다', 이런 논리에 중심을 두는 것이라면 그건 문제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진중권 교수는 이렇게 썼다. "이광수가 이 소설에서", 이건 소설 <이순신>을 말하는데, "진정으로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은 왜적과 용감하게 싸우는 이순신이 아니라 문약하고 시기심 많은 선비 정치인들에 의하여 당하고 마는 비극적 군인이었다." 그러면서 진 교수는 '박정희 등 많은 청소년에게, 더구나 식민 사관에 물든 이들에게 한국 사회가 분개, 통탄해 마지않는 상태로 보이게 한 것 아니냐. 그래서 박정희는 이순신과 조선조 지배층에 대해서 이광수와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된다', 이렇게 썼다.

같은 얘기일 수 있지만 박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의 성웅화를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과 함께 특히 강조한 데에는 총화 안보 단결, 국가주의 고취, 그래서 국가 병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강화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학도호국단이 '일면면학(一面勉學) 일면호국(一面護國)'을 내세우는데 거기에서도 제일 떠받들 수 있는 사람이 이순신이었다.

반공 교육이나 새마을 교육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했다는 점을 무엇과 연결했느냐 하면 바로 유비무환이다. 이 시기에 박정희가 아주 강조했던 유비무환 논리와 다 연결해서 설명했다. 물론 유비무환은 그 뜻 자체는 나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유신 체제 시기에는 이게 국가 병영화와 직결돼 있었다. 복고주의, 국가주의 성향을 갖게끔 하는 데에도 기여하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순신 장군이 유신 체제에 이용당했다는 측면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특히 유비무환과 이순신, 그리고 이율곡을 연결시켜서 그 당시에 참 많이 이야기했다.

▲ 교토에 있는 귀 무덤(코 무덤). ⓒ김덕련(2012년 4월 촬영)


한쪽에선 이순신 성웅화, 다른 쪽에선 기생 관광 장려

프레시안 : 소년 시절부터 이순신을 숭배했다면서 침략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만주군 장교가 된 것도 그렇고, 집권 후에는 일제 시대 행적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으면서 이순신 성웅화 작업을 한 것도 엇박자 느낌이다. 그에 더해, 박정희 정권이 한쪽에서는 이순신 성웅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기생 관광을 부추긴 것도 기괴한 일이다.

서중석 : 기생 관광은 박정희가 말한 민족 주체성, 이 단어를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 주체성으로 해석한다면, 그런 민족 주체성이든 또 충효 사상이든 전통 문화든 조상의 빛나는 얼이든 이순신 장군 성웅화든 어떤 것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정반대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오랫동안 청와대 비서실장을 한 김정렴조차 청와대에 대통령이 양윤세를 장으로 한 관광 진흥 전담 경제 비서실을 설치했는데 기생 관광이 주류를 이룬 건 국가적으로도 수치다, 이렇게 써놓았다.

기생 관광은 두 가지와 연결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박정희의 여성관, 여기에서는 일본 군인들의 남성 중심적인 사고 그리고 일본 정치인들의 요정 정치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러한 박정희의 여성관이나 당시 공화당에서 풍미했던 요정 정치와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자유당 때도 이런 요정 정치는 없었고, 내가 알기로는 전두환 정권도 요정 정치는 그렇게 많이 한 것 같지 않은데 공화당 정권, 박정희 정권 때는 요정 정치가 대단했다.

그다음에 직접적으로 기생 관광에 정부가 강력하게 개재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은 1972년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음에 따라 일본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일본 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섹스 관광을 하러 대만으로 주로 갔는데, 대만에 가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런 속에서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생 관광을 키워나가니까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대거 오게 된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후 박정희 세력은 일소해야 할 구악의 하나로 성매매를 꼽고 그 뿌리를 뽑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1961년 11월에는 윤락행위방지법도 만들었다. 또한 재건국민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밀어붙이면서 사회 전반에 건전한 기풍을 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전한 기풍 확립' 주장은 '명랑한 분위기 조성'과 더불어, 1970년대에 자유주의 성향 문화를 퇴폐로 낙인찍을 때에도 전가의 보도로 활용된다.

이처럼 국민들한테는 건전하게 살라고 강제한 권력 최상층은 정인숙 사건(1970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기생 관광 문제 역시 박정희 정권의 그러한 속성을 잘 보여주는 사안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이와 관련해 당시 어떤 역할을 했나.

서중석 : 기생 관광에 대해선 이준식 박사가 잘 써놓았다. 우선 이즈음 외국인 관광객이 어느 정도였느냐. 1969년에는 13만 명이었다가 1973년에는 68만 명이 됐다. 그전에는 미국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일본인이 급증했다. 1969년에는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일본인이 25.4퍼센트밖에 안 됐는데 1973년에는 69.9퍼센트나 차지했다.

그러면 이 시기에 정부는 어떤 일을 했느냐. 1972년 8월 교통부는 기생 파티를 하는 요정을 지정하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여성 단체에서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벌이자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탄압했다.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이 유신 과업 수행을 가로막는 반정부 행위라고 하면서, 반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관광 기생이라고 불린 접객 여성들한테 허가증을 내주고, 1973년에는 법령을 개정해 등록제를 법제화했다. 그래서 그러한 여성들이 호텔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게끔 했고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런 가운데 문교부 장관이 1973년 매매춘이 애국이라는 취지로 발언해 논란이 되고 그랬다. (이준식의 글에 따르면,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1973년 10월 도쿄에서 "한국 여성은 경제 건설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기생 호스티스가 대거 일본에 진출해서 몸을 바치며 밤낮으로 분투하는 애국 충정은 훌륭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편집자')

이렇게 한국에서 기생 관광이 성하니까 1973년 미국 언론 <타임>은 기생 관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해 한국 정부의 고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있다"고 하면서 기생 관광 실태를 폭로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해에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과 이듬해인 1974년에 발생한 8·15 저격 사건이 또 영향을 끼쳐서 일본인 관광객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교통부는 1975년 3월 관광 업체 대표자들을 모아놓고 여행 알선 업체에 7000명씩 목표까지 할당했다. 그러면서 해외 선전물에 기생 파티, 특별 파티 같은 말은 쓰지 말라고 업체들에 지시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풍경이다.

하여튼 일본인 관광객 가운데 80~90퍼센트가 남성이었는데 그야말로 섹스 관광을 하러 온 것이었다. 유신 정권이 무너진 1979년에는, 주로 기생 관광으로 온 것일 텐데 약 65만 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왔다고 돼 있다. 1973년에 그 전해의 2배인 43만 명으로 갑자기 늘어났는데 그게 1979년에는 약 65만 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당시 이 사람들을 색정단(色情團)이라고도 불렀다. 이화여대 학생들과 여성 단체가 기생 관광을 반대하고 나서고 그랬는데, 이화여대 같은 곳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섹스 애니멀이라고 부르고 그랬다. 일본인들이 1970년대 초에 유럽에서 이코노믹 애니멀(economic animal)이라고 많이 불리지 않았나. 경제적으로 굉장히 성장하면서 상당수의 일본인이 하는 짓이 이코노믹 애니멀과 같다는 얘기였는데, 그것에 빗대어 그렇게 불렀다.

1978년 매매춘으로 일본인한테 벌어들인 돈이 700억 원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그게 이 여성들한테 온전히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수익의 대부분, 그러니까 80퍼센트 정도는 중간착취를 당했다. 정부가 이런 착취를 묵인했다.

외화 벌면 성매매도 애국이라는 기괴한 논법

ⓒ오월의봄
프레시안 :
기생 관광 문제에 대한 고찰이 1970년대 일부 일본인들과 박정희 정권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 오늘날 적잖은 한국 남성들도 행하는 원정 성매매에 대한 사회적인 성찰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돌아오면, 기생 관광과 더불어 이 시기에 성매매 문제에 정부 차원에서 관계한 대표적인 사례가 미군 기지촌 문제 아닌가.

서중석 : 매매춘과 관련해 기지촌 문제도 간단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신 쿠데타 한 해 전인 1971년 12월 22일,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 정화 정책을 내놨다. 그러면서 기지촌을 육성하고 이전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그 일환으로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좌 같은 것도 여러 가지로 마련했는데, 교육 시간에 강사들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그런다.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은 숨은 애국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1971년부터 1976년 사이에 미군의 안락한 섹스를 위해 기지촌마다 성병 진료소를 만들고 성병 검사를 정기화했다.

이 과정에서 외화를 버는 애국자, 심지어 민간 외교관이라는 낯 뜨거운 수사까지 동원했다. 민족주의자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사회적으로는 기지촌 여성들을 양공주 혹은 양갈보라고 비하하고 타락한 민족의 딸로 취급했다. 그래서 이 여성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도 큰 고통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50년대에도 그랬는데, 한국 사회에서 참 지독하게 인종 차별을 당해서 한국에서 마음 편히 살 수가 없었다. 다문화 가정 청소년 중에서 유명한 연예인이 된 경우가 간혹 있다고도 하지만, 심한 인종 차별과 편견 같은 것 때문에 많은 경우 해외 입양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기지촌 여성들은 약물을 과다 복용하면서 자살 기도를 하거나 미군에 의해 린치당하면서 갖가지 악몽에 시달리는 생활을 해야 했다. (2014년,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인단 122명은 정부가 "모든 성매매를 불법으로 정해놓고 '특정 지역' 설치라는 꼼수를 써 '위안부'가 미군 성매매를 하도록 했으며 '애국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신교육까지 시켰다", "국가의 누구도 우리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외화벌이로 이용했다"며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법적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앞서 2013년 국정 감사 시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담긴 '기지촌 여성 정화 대책' 문건이 공개됐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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