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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동 '대행사' 박정희 아이러니, 기이한 금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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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동 '대행사' 박정희 아이러니, 기이한 금욕주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6> 유신 체제, 스물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콘서트 7080' 등의 형태로 1970년대 대중문화를 추억하는 흐름이 주로 2000년대 들어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런 흐름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1970년대에는 그 이전과는 결이 다른 대중문화가 형성됐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70년대에는 대중문화가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꽃을 피울 수 있는 여러 조건이 형성돼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가 급속히 이뤄지고 1970년대에 그것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산업 사회에 어울리는 대중문화가 형성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다음에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농 현상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도시가 비대하게 된 것도 작용했다. 도시에 사는 많은 젊은 세대들은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당시 10대, 20대이던 이러한 새로운 세대들은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게 된다. 그 윗세대하고는 좀 다른 문화 감각을 자연히 지닐 수 있게 됐다.

그와 함께 이 시기에는 매체가 폭증했다. 라디오, 텔레비전이 크게 늘어났다. 예컨대 라디오 수신기만 해도 1945년 남한에 약 15만1800대가 있었다고 돼 있다. 이 수치는 통계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리고 1948년 8월에 등록된 것이 15만6700대로 나와 있다. 1960년 4월에는 78만 대였다. 이것도 대부분 도시에만 있고 그랬는데, 이게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엄청난 속도로 증가했다. 1970년에 401만 대가 보급돼 1000명당 126명이 라디오를 갖게 됐다. 열 명 중 한 명 이상이 라디오를 갖게 된 것이다. 1975년에는 1350만 대가 됐다. 5년 전에 비해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나 열 명 중 네 명 가까이 라디오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구를 감안하면 한 세대에 한 대 이상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이렇게 라디오를 갖게 된 집이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텔레비전도 비슷했다. 1970년까지 가구당 보급률이 6.3퍼센트밖에 안 됐는데 1975년에 가면 30퍼센트로 굉장한 성장을 하게 된다. 1975년은 바로 문화 대학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참 지독한 해였는데, 하여튼 그렇게 텔레비전도 늘어났다. 1979년에 가면 79퍼센트에 이른다. 그래서 도시 가구에는 거의 다 텔레비전이 있게 됐고, 시골에도 상당히 많이 보급됐다. 물론 이때는 흑백 TV였지만, 어쨌건 굉장한 보급이 이뤄진 것이다.

프레시안 : 세계사 차원에서도 격동기 아니었나.

서중석 : 네 번째로 들 수 있는 건, 이 부분도 아주 중요한데, 한국인들은 문화 감각이 뛰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국 문화를 상당히 빨리 받아들이는 면이 있는데 이 시기에 바로 세계적으로 문화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런 커다란 변화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나게 된다.

1960년대 후반기는 전 세계가 굉장한 변화를 겪던 때 아닌가.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 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면서 흑인 급진주의도 대두하고, 그와 동시에 월남전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서 미국의 주류 질서에 도전하는 급진적 흐름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함께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대항 문화적 반항이 청년 세대에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서독을 중심으로 68혁명이 일어났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기성세대의 부르주아적 가부장성을 공격하고 기술 사회, 소비 사회에 반대했다. 또 소유와 억압의 타파, 여성 해방을 주장했고 섹스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공동체를 모색하면서 노동자, 제3세계 인민과 연대할 것을 역설했다.

미국에서 분노한 청년들의 열기는 무려 45만 명이나 참가했다고 돼 있는 1969년 그 유명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대형 집회에서 뚜렷하게 표출되지 않았나. 당시 사진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엄청난 인파였다. 수십만 명이 모인 대규모 반전 시위도 워싱턴에서 일어났다. 백악관 앞에 쫙 늘어선 그 모습 있지 않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드러나듯이 분노한 청년들의 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예술은 거리로 내려왔고 청년 문화가 활기를 띠었다. 록 가수와 포크 가수들, 그중에서도 특히 밥 딜런이라든가 존 바에즈 같은 사람들이 대항 문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한국에도 1970년을 전후해 청년 문화가 유입됐다. 그 무렵 서울대 문리대 근처에서도 '하얀 손수건'을 기타로 치고 그러더라. 1968년인가 1969년인가 그런데, 참 재미나게 보였다. 하여튼 1970년을 전후해 포크송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저항적 반전 포크인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 노래도 많이 부르기 시작했다. 포크송을 한국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뱅크스 오브 디 오하이오(Banks of the Ohio)'가 '내 고향 충청도', 이렇게 바뀌고 그랬다. '통블생'으로 불리는 통기타, 블루진 그러니까 청바지, 그리고 생맥주, 이게 청소년, 젊은이들의 정서와 감각을 사로잡아서 대단한 인기였다. 장발이 많아졌고 미니스커트도 이 땅에 상륙했다.

이러한 새로운 대중문화로서 청년 문화는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대항 문화나 비판 문화의 성격은 좀 약했고 반전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아니냐, 겉모습만 흉내 낸 것 아니냐, 이런 비판도 받았다. 또 독점 자본의 상업주의적 대중문화와 뒤섞여 있긴 했지만,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화로 아까 말한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난 사람들한테 크게 각광을 받게 된다.

대중가요의 새로운 흐름을 짓밟은 1975년 가요 학살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러한 새로운 대중문화는 유신 쿠데타 세력에게 철퇴를 맞지 않았나.

서중석 : 한국 사회가 이렇게 새로운 문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유신 체제라는 게 출현하면서 이것을 꺾어버린다고 할까, 문화를 폭압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중 하나로서 가요 학살이라고도 불리는 사태가 1975년에 일어난다. 1975년 6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새로운 심의 기준을 내놨다. 그러면서 많은 음악을 금지하는데, 그 기준을 보면 국가 안보와 국민 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 풍조를 무분별하게 도입하거나 모방한 것,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것, 패배적이고 자학적인 것 등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나와 있는 음반 같은 것들에 대해 재심사를 하게 되는데 신중현이 만든 '거짓말이야' 등 43곡이 1차 재심사에서, 2차 재심사에서는 이장희의 '그건 너' 등 45곡이 금지됐다. 김민기의 '아침 이슬' 등도 금지곡 목록에 포함되게 된다. 이것에 관한 통계도 수치가 조금 다른 경우가 있던데, 하여튼 그해 12월에는 팝송 규제 조치도 발표했다. 1차 135곡, 2차 126곡에 대해 방송 및 음반 발매를 금지시켰다. 특히 2차 규제의 126곡 가운데에는 51개 그룹의 외국 좌익 작사가, 작곡가, 가수 목록이 들어 있었는데 유명한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 등 91곡이 저항, 반전 내용을 담았다고 해서 금지됐다.

프레시안 :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금지한 사례가 많지 않았나.

서중석 : 금지된 노래들에 대해서는 여러 책과 글에서 그 내력을 재미나게 쓰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한 번 살펴보자. 김민기는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부른 '꽃 피우는 아이'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연행됐고 음반 압수 등 수난을 당했다. '아침 이슬', 나도 참 좋아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부르는 노래인가. 1990년대에도 많이 부르고 그랬는데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이러한 노래가 선동적이라는 게 금지 이유였다. 정미조 노래 '불꽃'에는 "타는 가슴에 불꽃처럼 피었지/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도 똑같이 선동적이라고 해서 금지됐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서울대생 시위에서 이 노래가 나오자 바로 방송 금지가 됐다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신중현 곡에 김추자가 부른 노래가 금지된 사연이 기가 막혔다. 당시 김추자는 음조만 대단한 게 아니라 몸짓으로도 인기를 모았다. 그전엔 못 보던 선정적인 몸짓이라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야말로 최고의 대형 가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남자들한테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사회에 불신 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이렇게 쭉 나가는 노래인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 박정희 정권이 '이건 안 된다'고 해가지고 금지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랬다. 또한 음반이 100만 장이나 팔리며 대단한 인기를 모은 노래인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그리고 이장희의 '그건 너', 이것들의 경우 가사 저속과 퇴폐를 이유로 대고 금지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건전 가요를 국가가 장려했다. 일제 말의 국민 가요하고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LP나 카세트테이프에 꼭 한 곡씩 이 건전 가요를 집어넣도록 했다. 그 음반이 어떤 음반이냐, 그것과 상관없이 A면 또는 B면에 군가나 창작 건전 가요 같은 것이 삽입됐다. 건전 가요를 정부에서 그렇게 강조했는데 건전 가요로 볼 수 있는 노래조차 금지됐다. 애국심을 담은 '뭉치자'라는 노래가 방송 부적합 판정을 받았는데, 이 곡이 시위대한테 사용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뭉치자/ 우리 모두 다 나라 위해 뭉치자" 하는 것이 박정희 정권한테는 다르게 들릴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시간대별 방송 편성 지침까지 하달

프레시안 : 대마초 파동도 새로운 대중문화에 찬물을 끼얹지 않았나.

서중석 : 그런 식으로 금지한 것도 참 끔찍한 일이고 그래서 문화 학살이라는 얘기를 하고 그러지만, 대마초 파동이라는 것은 단지 몇 년간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 가수 생명까지 끊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1975년 말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을 비롯해 8명이 구속된 것을 필두로 1976년 초까지 100여 명의 연예인이 대마초 연예인으로 불리며 입건되고 그 가운데 수십 명이 구속됐다. 이 사람들은 유흥업소건 방송이건 일절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연두 순시 때 "공산당과 싸워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마당에 처한 지금 젊은이들이 대마초를 피우고 있다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이렇게 얘기했다.

이영미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대마초 사건이 일어나면서 1970년대 초에 활약한 참신한 작곡가, 가수, 청년 문화 기수들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예술 활동이 금지됐다. 그뿐 아니라 대마초 가수가 아닌 김민기도 군에 입대해 영창까지 들어갔고, 한대수는 두 번째 음반 '고무신'이 발매 직후 금지되자 미국으로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조영남도 미국으로 가버리는 식이 돼서 우리 가요계가 크게 바뀌게 됐다고 이 교수는 이야기했다.

프레시안 : 방송에 대한 검열도 광범위하고 노골적이지 않았나.

서중석 : 방송 검열도 유신 체제에 와서 아주 심해졌다. 1975년 9월 문공부는 새로운 방송 편성 지침을 하달했다. 새마을 정신을 생활화하고 퇴폐성 프로그램은 편성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1976년에는 문공부에서 아예 시간대별 편성 지침까지 하달해서 MBC, KBS, TBC 3개 TV에서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한 성격의 프로그램을 편성하게 했다고 그런다. 저녁 8시대에는 안보, 새마을 같은 걸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하게 한 것이다. 정부가 말한 계도성, 그리고 오락성 배제라는 것에 대해 김창남 교수는 계도성이라는 것은 유신 이념의 재생산과 다름없는 것이고 오락성 배제는 가부장적인 억압 체제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건강한 대중문화가 가야 할 길과는 대단히 다른 길이었다고 얘기했다.

권보드래 등 5명이 쓴 <1970 박정희 모더니즘>이라는 책을 보면 심야 방송까지 된서리를 맞은 게 기술돼 있다. 당시 라디오는 텔레비전에 비해 편성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심야 라디오 방송이 특히 인기가 있었고, 간첩 식별법에 "밤 12시 이후 남몰래 라디오 듣는 사람"이라는 것도 있긴 했지만 청소년들로서는 심야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재미가 정말 대단했다. 그러면서 리퀘스트 형식을 방송국에서 경쟁적으로 도입했다. 그런데 1971년 이후 정부가 맨 먼저 손을 댄 게 리퀘스트라고 한다. 청취자가 곡을 신청하고 그러는 것인데, 1978년에는 심야 방송에서 다시금 리퀘스트가 전면 금지됐고 AM 라디오에서 팝송이 완전히 퇴출되는 사태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것도 일종의 학살일 터인데, 이처럼 한층 강화된 통제에 따라 텔레비전에서는 음악과 코미디 등 대중문화 프로그램이 고사 직전까지 몰렸다고 이 사람들 책에 쓰여 있다.

광기 어린 검열과 수입 쿼터제 부작용으로 내리막길 접어든 한국 영화

▲ <별들의 고향>.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프레시안 :
영화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1970년대에 대중이 텔레비전 다음으로 사랑한 게 영화라면 영화인데, 영화도 아주 된서리를 맞았다. 우리나라 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살아나서 1960년대에는 대중문화의 총아가 됐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했던 영화가 1970년대에는 그야말로 쇠퇴하고 사양길로 접어드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권력의 작용이 큰 역할을 했다고들 이야기한다. 1973년 유신 영화법이라는 얘기도 듣는 영화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통제 장치가 한층 강화됐다. 예컨대 시설, 촬영 기계 등에서 영화사 허가 기준을 아주 엄격하게 정해서 14개가 독점하도록 했다. 그만큼 정부가 관리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1970년대 영화에서 제일 큰 문제로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건 국산 영화 3편을 만들면 외화 1편 수입권을 준 수입 쿼터제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때는 외화가 돈을 많이 벌어들였지 국산 영화는 별로 돈을 벌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업자들은 외화 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정부가 말하는 '우수 영화'를 비롯해 이런저런 영화를 졸속으로 후딱후딱 만들어내곤 했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들 중에는 우수 영화건 졸속 영화건 사실상 창고에서 잠자는 경우도 있었다. 우수 영화라는 것도 정부에서 우수 영화라고 한 것이지, 일반 관람자들한테는 그게 우수 영화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서 대형 국책 반공 영화 같은 것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으면서 만들어진다. 이 시기에 임권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영화 검열도 강화돼서 헌법, 그러니까 유신 헌법의 기본 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 권위를 손상하는 것으로 보이면 규제하게 돼 있었다. 검열이 아주 심했다. 그 당시 검열의 한 예를 <우리 영화 100년>이라는 책에서 보면, 영화 관련 단체들에서 안보 중심의 새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퇴폐, 저속 등 사회 발전과 영화 예술 향상에 저해가 되는 영화 제작을 중지하고 민족 주체성을 확립해 총력 안보의 새 가치관을 주입할 것을 다짐하고 그랬다.

프레시안 : 검열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이뤄졌나.

서중석 : 1978년의 경우 공연윤리위원회에서 각본 161편을 심의했는데 그 가운데 무수정으로 통과된 건 18편밖에 없었다. 수정 통과가 100편이나 되고 개작을 지시한 게 24편, 반려한 게 19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제작되기 전 사전 심사를 한 것이고, 제작이 완료되면 또 검열을 했다. 여기서 무수정 통과된 건 33편뿐이며, 이해에 256개소에서 화면이 삭제됐고 94개소에서는 화면이 단축됐으며 114개소에서는 대사가 삭제됐다고 한다.

그런 속에서 괜찮은 영화, 예컨대 호스티스 영화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새로운 감각을 선보인 <별들의 고향>(1974년), 그것에 이어서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가 나오고 하는데 이건 굉장한 흥행 기록을 세우고 그랬다. 그런데 1970년대 유신 체제를 김창남 교수는 엄숙주의라고 설명했는데, 김창남 교수가 또 비판한 그대로 아주 수준이 떨어지는 호스티스 멜로 영화가 선풍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1978년의 경우 정소영의 <내가 버린 여자>에 37만 명, 변장호의 <오 양의 아파트>에 28만 명, 박호태의 <나는 77번 아가씨>에 21만 명이나 관객이 몰렸다. 그러면서 영화계가 급속히 쇠퇴한다. 1971년에 영화관이 717군데였는데 1978년에는 488개소로 팍 줄어버렸다. 특히 대중오락 시설이 적은 중소 도시에 문 닫은 극장들이 아주 많았다.

이처럼 영화는 1970년대 말기로 갈수록 죽어갈 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도 계속 죽어 있다가 1990년대 하반기에 가서야 관객도 많이 찾아들고 수준도 높은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1990년대 하반기부터 선보인 그 영화들의 상당 부분은 1970년대 총력 안보 체제에서 강조한 건전 영화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공동 경비 구역 JSA>도 그렇고 <웰컴 투 동막골>도 그렇고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고지전>, <간첩 리철진> 같은 영화들이 대단한 환영을 받았는데 전부 박정희의 안보관과는 아주 거리가 먼 작품들이었다. 예컨대 <공동 경비 구역 JSA> 같은 경우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을 비롯해 그간 판문점과 그 주위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 우수한 영화 아닌가.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우리 영화가 살아났다는 것도 1970년대 문화에 대한 풍자랄까 비판으로 남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1970년대 극장에서는 보고자 한 영화 이외의 것들도 많이 봐야 하지 않았나.

서중석 : 1970년대 영화가 쇠퇴한 데에는 다른 요소도 있었다. 그 시절 영화관에 들어가면 맨 먼저 애국가가 나왔는데, 그러면 다 일어서야 했다. 예컨대 아까 얘기한 <오 양의 아파트> 같은 호스티스 영화의 맨 앞에 애국가를 튼다고 생각해봐라. 잘 어울리지도 않고, 말도 안 되지 않나. 그다음에는 뉴스 영화가 나왔다. 반상회에서와 비슷하게 이런 뉴스 영화에서는 위대한 지도자가 중요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고 나서는 문화 영화를 또 돌렸다. 정말 지겨울 정도였다. 어떤 때는 문화 영화를 두 편이나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본 영화를 틀었다.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우수한 영화도 있긴 했지만, 본 영화도 대개 시원찮은 것들이었다. 이러니 누가 극장에 갈 맛이 났겠는가, 이 말이다.

1970년대에는 오후 6시(겨울엔 오후 5시)가 되면 모두 쫙 서서 국기 쪽을 향해 경례를 해야 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예식이 있었는데, 농촌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마을 앰프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일손도 멈추고 모두 국가와 대통령한테 그런 경의를 표해야 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나 했더니만 이런 어이없는 시대로 가게 된 것과 관련해 사람들이 또 많이 이야기하는 게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이다.

엄숙주의 내세우다가 자신은 환락의 장소에서 종말 맞은 박정희 아이러니

프레시안 : 왜 그토록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에 집착하면서 국민들을 괴롭힌 것인가.

서중석 : 그간 내가 강조한 것처럼 박정희 대통령은 일제 시대의 그 군인 정신이 충만했다. 그래서 장발에 대해 대단히 강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일제 말에는 머리를 빡빡 깎으면서 군국주의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았나. 강준만 교수 책을 보면, 박정희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장발에 대해 한마디 툭 던지면 그것이 일제 단속령으로 나타나고 그랬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1976년에 이렇게 연설했다. "사회 기강을 해치고 국민 정신을 좀먹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일부 대중 예술을 과감히 정화해나가겠습니다."

1973년에 장발,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 개정 경범죄 처벌법이 발효됐다. 그전에도 단속을 했지만 이것을 통해 더 강하게 단속하게 된다. 장발은 저속한 외래 풍조, 그리고 유신 체제가 그렇게 공격했던 퇴폐 풍조, 이 두 가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돼버렸다. 방송사 같은 데에서 이것 때문에 참 골치를 앓았는데 늘 장발과 전쟁을 해야 했다. 방송사 자율 규제 방안에는 '장발자 출연 등을 극력 피할 것', 이런 게 들어 있었다. 1975년에는 장발자를 브라운관에서 제거하라는 지시가 방송사에 내려갔다. 그러면서 TV 외화에 외국인 장발 출연자가 나오면 그 부분을 삭제하고 내보내는 기막힌 경우도 나타났다.

그때는 접객업소, 특히 술집 같은 데에서 "장발자 출입을 금지합니다" 또는 "장발자 출입 금지", 이런 것을 써 붙이고 그랬다. 그래서 장발자가 돌아다니기 힘들었는데 장발에 대해서는 일제 단속을 많이 했다. 교육감이 된 조희연 교수 책을 보면 1973년 장발 단속 실적이 1만2870건에 이르렀고, 1974년 6월 2일부터 8일 사이에 있었던 서울시 장발 단속에는 1만103명이 걸려들었다. 이 1만103명 중에서 9841명은 머리를 깎고 내보냈다. 머리 깎기를 거부한 262명은 즉심에 넘겼다. 장발 단속이 이렇게 심했다.

미니스커트도 아주 강하게 규제했다. 이영미 교수 책을 보면,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람이나 장발자들이 제일 다니고 싶어 한 곳이 명동 거리였지만 겁이 나서 못 나설 정도로 단속이 많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자, 그러니까 큰 자를 들고 경찰들이 처녀들의 스커트 길이를 재는 풍경이 자주 나타났다. 이영미 교수는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보다 더 미풍양속을 해치는 게 남자 경찰들이 여자 치마 밑에 머리를 처박고서 대자 눈금을 쳐다본 것이 아니냐고 썼다. 대개의 책에는 무릎 위 17센티미터까지가 걸려드는 기준치였다고 돼 있는데, 강준만 교수 책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러니까 무릎 위 20센티미터 이상이면 무조건 즉심에 넘겼다는 기사도 나온다. 이렇게 되면서 대도시에서는 자를 들고 다니는 경찰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용감한 여성들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 시기 문화에 대해 김창남 교수는 엄숙주의라고 할까 보수적인 가치관을 강요하는 노력과 대중문화의 소비주의, 향락주의적인 성격은 가부장적 재벌 독재 체제에서 모순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모순된 문화 가치는 한국의 대중문화를 더욱 병적이고 불건전한 나락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온갖 엄숙주의와 금욕주의 기치를 내세우던 박정희가 스스로 방탕한 환락의 장소에서 종말을 맞았던 아이러니는 바로 그런 유신 체제의 모순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김 교수는 썼다.


▲ 2014년 10월 8일 광주 충장축제에서 재연된 19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 풍경. ⓒ연합뉴스

민중·민속에 주목해 대항 문화 일군 대학가

프레시안 : 김 교수 지적대로, 1979년 10월 26일 측근들과 젊은 여성들을 궁정동 안가로 불러 '대행사'를 하던 중 최후를 맞이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중문화 중 일부를 "사회 기강을 해치고 국민 정신을 좀먹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낙인찍고 이를 정화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건 여러모로 기이한 풍경이다. 한편 1970년대 대학가에서는 지금까지 말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문화도 나타나지 않았나.

서중석 : 그것과는 또 다른 문화가 이 시기에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강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민중 문화라고 얘기하는데 그걸 간단히 보도록 하자. 민중 문화는 전통 문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유신 체제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통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적 시각으로 오늘날 되살리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유신 체제와는 정면으로 대립됐다. 1975년 5·22 시위에서 탈춤, 가면극 쪽 학생들이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흐름은 1970~1980년대 반체제 문화에서 하나의 커다란 부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75년에 그렇게 큰 가요 학살이 일어나고 문화계 전반에 엄격한 규율이 강요되는 속에서 대중문화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대학에서는 이런 민중 문화가 굉장한 영향력을 갖는 모습을 보여줬다. 1980년대까지 그랬다.

1970년 전통 가면극의 원형 전수 및 창조적 계승이라는 기치 아래 서울대에 민속가면극연구회가 만들어졌는데 탈춤뿐만 아니라 농악, 무속, 민요 등 민속 연회가 각 대학에서 공연됐다. 그러면서 민속문화연구회, 탈춤연구반, 민속가면극연구회, 전통예술연구회 같은 것들이 여러 대학에 만들어졌다. 대학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또 노동자들 사이의 문화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민속 문화 또는 민중 문화, 탈춤 문화에서는 집단으로 신명을 내는 것을 강조했다. 그와 함께 공동체 의식도 강조했다.

황선진에 의하면 전통 문화, 민족 문화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민족 예술로서 민중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민중의 동질성 또는 동질감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역사 발전의 주체로서 민중이 이제는 등장하게 되고, 문화는 민중을 위한 문화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렬히 주장하게 된다. 분단 상황, 물질 만능, 비인간화된 사회 같은 문제와 박정희의 근대화 과정에 매몰돼가는 일반 민중의 정치, 경제, 문화적인 삶의 역량을 과시하고 새로운 문화를 찾고 꽃피우려는 노력으로 민중 문화를 제시했다.

이걸 채희완 교수는 마당굿 운동에서 주장했다. 삶을 집합화하고 이를 다시 고루 나눠 갖는 문화 운동으로 이 마당굿 운동을 파악하고, 은폐된 현실 문제를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는 사회 운동으로 마당굿 운동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제3세계와 연대하는 속에서 민족적 신명으로 이뤄가는 생명 공동체 운동이 마당굿 운동이라고 얘기했다. 민족 문제, 농촌 문제, 노동자나 도시 빈민 문제, 사회 일반의 시사 문제 같은 것을 마당굿을 통해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1970년대 대학들 축제를 보면 이런 민중 문화 또는 마당굿, 탈춤 같은 것들이 중심을 이뤘다. 예컨대 1976년의 경우 고려대 석탑 축전에서는 축제의 초점을 민속에 두고 각종 민속놀이와 판소리 대회, 봉산탈춤 공연, 농악 공연 등을 거행했다. 연세대에서 열린 무악 축전은 개교 이래 처음으로 민속제를 포함했다. 동국대도 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축전에서 민속 예술 대향연을 벌였다고 오제연 교수는 썼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에서 대항 문화로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과는 사정이 영 다르지만, 전통 문화에 대한 정부의 강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만들어낸 대항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권력에 대한 도전,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으로서 그렇게 나온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독재 권력이 눈엣가시로 여긴 금서들

프레시안 : 앞에서 영화 등의 부문에서 이뤄진 검열을 살폈다. 출판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마지막으로 금서 문제를 살펴보자. 1970년대, 1980년대 하면 금서의 시대인데 그 얘기를 간단하게 하도록 하자. 1975년 <창작과비평> 봄호가 판매 금지되고 회수 명령을 받았다. 그해 8월에는 신동엽 전집과 조태일 시집 <국토>, 둘 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것인데 이 책들을 비롯해 15종이 판매 금지됐다. 이것도 통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유신 전기에 불온 도서 33종, 음란 저속 도서 34종 등 77종이 판매 금지됐다는 기록이 있다.

긴급 조치 9호 시절에는 50여 종이 판매 금지됐는데, 장일조 교수의 <사회 운동 이념사>의 경우 민중적 관점에서 썼다고 해서 나오자마자 즉각 판매 금지됐다. 이 시기부터 1980년대에 걸쳐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리영희 교수의 <전환 시대의 논리>는 나온 건 1974년인데 희한하게도 유신 말기에 가서야 판매 금지가 됐다. 그런데 이 양반은 1977년에 <8억 인과의 대화>를 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또 구속됐다. 그리고 월간 <대화>, 참 뜻깊은 역할을 많이 한 잡지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라고 해도 좋은데 노동자 문제를 많이 다뤘고 민중 문제도 아주 많이 다뤘다. 그런데 이게 1977년 폐간 처분을 받았다.

방금 얘기한 책들을 제외하고 금서로 지정됐던 대표적인 책들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이건 그 당시 어떤 책들이 많이 읽혔는가를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박형규의 <해방의 길목에서>, 장준하의 <죽으면 산다>,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이 이름을 올렸다. 이 시기에 리영희 교수 책이 세 권이나 판매 금지된 것이다. 송건호 등이 쓴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 현기영의 <순이 삼촌>, 박현채의 <민족 경제론>, 백기완의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염무웅의 <민중 시대의 문학>, 김지하의 <황토> 등도 금서였다.

해외 책들도 이 시기에 금지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 신학>, 알베르트 돈대인의 <세상에 열린 신앙>, 허버트 마르쿠제의 <위대한 거부> 같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됐다. 마르쿠제 책도 그때 사람들이 좀 봤다. 이 양반이 유럽 68혁명에서 이념적으로 상당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제일 많이 본 책에 들어가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그리고 많은 관심을 모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 에버레트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 같은 것도 금서 목록에 포함됐다.

각각 어떤 책인지 여기서 하나하나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공통점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와 사회, 인간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게 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책들이 금지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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