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1975년 5월 13일 긴급 조치 9호 선포 후 야당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그해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야당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면서 야당이 힘없는 야당, 꿀 먹은 벙어리 야당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안보 바람 속에서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도 태도가 크게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는데, 긴급 조치 9호 선포 직후인 1975년 5월 21일 유명한 박정희-김영삼 영수 회담이라는 게 열린다.
이 영수 회담은 아주 유명한 영수 회담이 되고 마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뭐냐 하면, 회담 후 김영삼이 이 영수 회담에 대해 수년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야당은 각목 대회라는 전당 대회를 치르는 사태를 맞이하고 김영삼은 총재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역으로 궁금증이 생겼다. 도대체 그 회담이 뭐기에 김영삼이 그렇게 입을 꾹 다무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간의 관심을 모았는데, 김영삼은 자신의 야당 활동 가운데 최악의 정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이 5·21 영수 회담에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의 눈물 어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김영삼
프레시안 : 5·21 영수 회담에서 박정희와 김영삼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서중석 : 이 영수 회담이 끝났을 때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 "박 대통령과 김 총재는 지금 미증유의 난국에 처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야가 다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 이 회담에서 뭐라고 얘기했다고 김영삼이 자기 회고록에서 주장하느냐. 그걸 한 번 보자.
여러 가지 얘기를 처음에 주고받았는데 박정희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하니까 김영삼이 마음이 짠해서 '안됐다',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박정희 말이 끝나자, 김영삼은 '민주주의 하자. 대통령 직접 선거를 하자'고 하면서 유신 헌법을 빨리 철폐해 멋진 민주주의를 하자고 거듭 얘기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김 총재" 하고 부르더니만 말을 끊었다가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 총 맞아 죽고", 육영수 피격 이야기를 한 건데,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정희가 울지만 않았으면 '그럼 언제 할 거냐'고 따져 물었을 텐데 박정희가 울고 있어서 김영삼 자신이 추궁을 못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민주주의를 꼭 하겠다.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 이런 뜻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이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김 총재,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공표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조선놈들은 문제가 있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놈들이 생겨날 겁니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적어도 유신 체제를 바꾸자는 얘기를 김영삼이 했다는 건 김정렴 회고록에도 나온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도 김영삼이 이때 민주 회복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박정희가 "북한의 남침 위협이 현저히 줄어들면 현행 헌법도 개정될 수 있다"고 말하고 영수 회담을 마쳤다고 김정렴은 써놨다. 이런 걸 보더라도 김영삼이 자기 회고록에서 얘기한 게 대강은 맞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여튼, 그러고 나서 이 회담에서 김영삼은 가택 연금 중이던 김대중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것에 대해 박정희가 '김대중이 이런저런 짓을 했다'고 막 얘기하니까 더는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다. 그다음에 김한수를 비롯해 1972년 유신 쿠데타 직후 고문당하고 석방되지 않은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석방해달라고 김영삼이 얘기하자, 그것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호의적인 고려를 약속했다고 한다. 김한수 등 4명은 얼마 후에 석방된다. 그리고 김영삼은 동아일보 광고 사태가 자기 때문에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박정희한테 자기가 얘기해서 7월 16일부터 광고 게재가 정상화됐다는 것이다. 아마 이 부분도 사실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거듭 얘기하지만 김영삼이 주장한 것처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살해될 때까지 나는 1975년의 회담 내용에 대해 함구했다"고 돼 있는 바로 그 부분이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렇게 큰 문제가 된 것인가.
서중석 : 이게 왜 문제가 될 수 있느냐 하면, 5·21 영수 회담 이후 김영삼이 반유신 투쟁을 제대로 안 하기 때문이다. 이 회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옥선 사태가 일어나는데 그때도 대응을 제대로 안 했다. 그뿐 아니라 신민당 전당 대회가 각목 대회로 파행이 되고 그러면서 김영삼 자신이 총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지 않나. 그러면 박정희한테 속았다는 게 확실해지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그해 9월에는 김영삼 비서 김덕룡도 구속해버렸다. 그뿐 아니라 김영삼도 긴급 조치 9호를 위반했다고 하면서 김영삼을 입건하고 계속 검찰에서 소환했다. 김영삼은 거기서도 속았다. 검찰에 가기만 하면 김덕룡까지 풀어주겠다고 해서 김영삼이 출두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약속대로 하지 않았다.
이런 각목 대회라든가 입건이라든가 제일 믿었던 비서를 구속한 것이라든가, 또 김영삼 자신이 밀려나고 이철승이 야당 당수가 된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를 보면 박정희가 그렇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최소한 이건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영삼이 영수 회담 내용을 얘기하면서 '박정희라는 사람이 이렇게 신용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공격할 수 있는 건데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영삼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서 일각에서 금품 수수설이 강하게 돌았고, 박정희나 김영삼이나 여자를 좋아하니까 여자 문제가 낀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하여튼 별의별 이상한 얘기가 다 돌았다.
내가 보기에 김영삼이 계속 입을 다문 건 박정희한테 너무 우습게 속았기 때문 아닌가 싶다. 창피해서 말을 꺼낼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가 5·21 영수 회담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김영삼 자신이 입을 다물고 투쟁도 멈춰버렸는데, 그렇게 한 게 자기가 보기에도 우스꽝스럽고 변명하기가 아주 어렵게 돼 있었기 때문 아니겠나. 그러니까 아예 영수 회담에 대해 계속 함구해버리는 쪽으로 간 것이 아니겠느냐,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1975년이면 정치에 발을 들인 지 이미 20년이 넘었을 때이고 오랫동안 '정치 9단'으로 불리게 되는 김영삼이 그렇게 허무하게 당했다는 건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쨌건 김영삼은 1979년 5월 다시 신민당 총재가 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 강경하게 투쟁한다. 그런데 다시 총재가 된 때부터 10·26이 날 때까지도 5·21 영수 회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나?
서중석 : 안 했다. 김영삼은 1979년 5월에 다시 총재가 되고 나서 박정희 유신 체제와 정말 강력하게 맞서 싸우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5·21 영수 회담 문제도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뭐냐 하면 5·21 영수 회담 때문에 김영삼이 얼마나 우습게 됐느냐, 세상 사람들한테 얼마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느냐, 이 말이다. 또 박정희한테 속은 것에 강한 분노를 느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총재직에서 너무나 어이없게 밀려나 몇 년 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하지 않았나. 김영삼이 1979년 다시 총재가 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 그렇게 강력한 투쟁을 한 데에는 이런 여러 가지가 가슴속에 응어리질 대로 응어리진 것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사실 1979년 그해에 유신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한 개인으로서는 김영삼만큼 대단한 역할을 한 사람이 없다. 김영삼이 5·21 영수 회담과 관련해 취한 태도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용납받기도 쉽지 않지만,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최고의 역할을 한 정치인이 김영삼이라는 얘기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유신 독재 비판했다가 금배지 내놓아야 했던 김옥선
프레시안 : 5·21 영수 회담 다섯 달 후 김옥선 파동이 일어난다. 유신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사례 중 하나인 김옥선 파동,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1975년 5월 21일 이상한 영수 회담이라는 것이 있은 후 김옥선 파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그해 10월 일어난다. 신민당 김옥선 의원이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으로서 국회 본회의에서 발언한 것인데도 면책특권이 용납되지 않고 결국 사퇴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 사건이다. 거기까지 가는 김옥선 파동을 살펴보자.
사실 김옥선 의원 이전에 정일형 의원도 강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1974년 12월 14일 정일형 의원은 국회에서 "10월 유신은 정치적 변란이다"라고 규정하고 "매카시즘적 수법"이니 하면서 "대통령이 하야를 준비할 용의가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공화당, 유정회 의원들이 막 단상으로 쏟아져 나와서 본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이때 제일 날쌔게 단상으로 돌진한 사람이 유정회의 정재호 의원이었다. 유정회 대변인을 오랫동안 하는 사람인데, 이때 날쌔게 돌진해 투쟁한 것 때문에 비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옥선 파동에 대해서는 희한하게도 유정회에서 만든 책에 그 내용이 잘 나와 있다. 김옥선 의원은 1975년 10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8분 동안 발언했다. "오늘 우리 의회는 1인 통치를 합리화해주는 한갓 장식물에 불과하게끔 돼버린 정치적 현실", 이런 이야기도 하고 "누가 우리보고 독재 국가의 국회의원이라고 낙인을 찍을 때 우리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그리고 "독재자의 온갖 실정과 또 그로 인한 민생고는 국가 안보라는 절대적인 명제 아래 깔려 묻히게 됨으로써 국민은 독재 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사병이다", 이렇게 발언했다. 그러면서 톤을 높여 "지금과 같이 극에 달한 전쟁 위기 조성 이면에는 남침 대비라는 본래 목적을 넘어선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음을 간과할 수 없고, 지난 한여름 전국을 뒤흔든 각종 관제 안보 궐기 대회와 민방위대 편성, 학도호국단 조직, 요즘도 TV에 나오는 군가 그리고 정부의 끊임없는 전쟁 위험 경고 발언,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이렇게 총력 안보를 구실로 독재 체제를 구축해나간다는 얘기를 해나간다.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유정회와 공화당이 바로 합동 총회를 열었다. 김옥선 의원을 제명해야 한다, 적을 이롭게 하는 망동을 국민의 이름으로 규탄해야 한다는 결의를 한 후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강경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레시안 : 신민당에서는 어떻게 대응했나. 청와대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야당 의원이 여권 의원들에 의해 제명되도록 놔둔다면, 그건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야당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일 아닌가.
서중석 : 처음에 신민당에서는 좀 강하게 나오기도 했지만, 유신 체제 아래에서 뭘 어떻게 싸울 것이냐에 대해 제대로 감을 잡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뒷전으로 물러섰다. 결과적으로 제명하는 대신 김옥선 의원의 사퇴서가 제출되는 형태로 끝나고 만다. 이런 식이면 의원들의 면책특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얘기를 듣게끔 돼 있었다. (유신 독재를 정면 비판한 후과는 의원직 사퇴로 그치지 않았다. 유신 정권은 김옥선 파동이 일어나기 4년 6개월 전인 1971년 4월 선거 때 불법 선거 운동을 한 혐의가 있다며 김옥선을 기소했다. 1976년 12월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 유예 2년이 선고됐다. 1978년 3월 대법원은 1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고, 그로써 김옥선은 그해 총선에 출마할 길이 막혔다. '편집자')
이 파동 후 40년이 지난 2015년 9월, 김옥선 의원은 정의화 국회의장한테 청원서를 냈다. 1975년에 자신이 한 유신 정권 비판 발언이 "의장이 게재하지 아니하기로 한 부분임", 이런 설명과 함께 국회 회의록에서 삭제돼 있는 것을 확인하고 '속기록을 복원해달라. 사초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김옥선 의원은 여성인데 남성 복장을 하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프레시안 : 청와대의 심기를 거스른 정치인이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난 1975년 풍경은 바로 그 유신 체제에서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하던 분이 집권 후 자신과 다른 뜻을 밝힌 정치인에게 배신의 정치라는 해괴한 낙인을 찍는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쨌건 김옥선 파동 후 한동안 어떤 국회의원도 발언하기가 쉽지 않고, 뭔가 이야기하기 전에 청와대 눈치부터 살펴야 하는 분위기였을 것 같다.
서중석 :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 후에는 김영삼이 1979년 다시 총재가 될 때까지 야당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도 김옥선 파동은 대단히 중요하다.
볼썽사나운 각목 대회 거쳐 무기력한 들러리로 전락한 야당
서중석 : 1976년 5월 25일 신민당 전당 대회가 열렸다. 그전부터 비주류 쪽에서 방해 행위를 해서 '전당 대회가 과연 제대로 열릴 수 있겠느냐'가 의문이었는데, 5월 25일 전당 대회장인 시민회관에 비주류 측 주먹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류 측 완력 부대도 코리아나호텔 쪽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서로 맞섰다. 양쪽 주먹들이 피켓, 각목을 휘두르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면서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비주류 쪽 주먹들이 이겼다. 이들은 주류를 몰아내고 시민회관을 점거해버렸다. 그러자 주류 쪽, 그러니까 김영삼 쪽은 당사로 가서 거기서 다시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했다. 비주류는 시민회관에서 김원만을 당 대표로 뽑았다.
이게 유명한 각목 대회 또는 반당(半黨) 대회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사태가 일어난 건 배후가 있기 때문이다. (폭력 사태의 배후에는 중앙정보부와 차지철의 경호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집자') 그런데 관심을 끄는 건 주류와 비주류가 '어느 쪽이 당권 임자냐. 그걸 물어보자'고 하면서 중앙선관위로 이 문제를 가져갔다는 점이다. 중앙선관위에서 유권 해석을 내렸는데 '주류는 대회 장소를 바꿨기 때문에, 비주류는 대회 진행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하자가 있다. 둘 다 안 된다', 이렇게 돼버렸다. 그러면서 주류와 비주류가 각각 치른 두 대회 모두 무효가 되고, 1976년 6월 9일 자로 김영삼의 총재 지위가 소멸돼버린다.
그런 속에서 1976년 9월 다시 전당 대회가 열렸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 349표, 이철승 263표, 정일형 134표를 얻었다. 아무도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2차 투표에 들어갔는데, 정일형 쪽이 이철승을 밀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유신 체제에 맞서 선명 투쟁을 하겠다고 했던 김영삼이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영 달라져버렸다, 이 말이다. 그 결과 이철승 389표, 김영삼 364표로 이철승이 새 총재가 되고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무력한 존재가 됐다.
이철승 지도부는 중도 통합이라는 걸 내세웠다. 체제 부정은 있을 수 없고 안보 논의나 자유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런 속에서 중도 통합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1979년 5월 전당 대회 때까지 이철승 지도부가 이끌어가게 된다. 이건 옛날 유진산 당수 때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야당이 야당임을 포기한 것 아니냐, 유신 체제에 함몰된 것 아니냐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서 야당은 1978년 12·12총선이 있을 때까지 아주 무력한 존재로 들러리 역할에 지나지 않는 위치에 있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쉰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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