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1970년대 중후반에 학교에서 반공, 반북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를 지난번에 살폈다.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보도 사진이 있다. 그 시절 운동회 때 많이 한 오자미 던지기라는 박 터트리기 경기 풍경을 담은 사진이다. 박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지면서 커다랗게 표어가 적힌 현수막이 내려오는데 그 표어가 다름 아닌 "분쇄하자 공산당"이었다. '놀 때도 반공'인 셈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아이들한테 너무 심한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쨌건 그처럼 지나칠 정도의 반공 운동이 학생 때에만 강제된 게 아니지 않았나.
서중석 : 진중권 교수는 1970년대 반공 운동과 관련해 북한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러면 우리 남쪽 사회는 어떠했느냐를 물었다. 진 교수는 "어린 시절엔 조국의 총폭탄 얘기를 읽으며", 육탄 10용사라는 것인데, "입이 찢어져도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연습을 하다가 청소년 시절부터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군사 훈련을 받고 대학생 시절에는 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에 편입되어 문무대와 전방에서 정식 군대와 같이 훈련을 받다가 졸업해서는 아예 정식 군대에 들어가고 제대한 다음에는 어제의 용사가 되어 예비군에 편입되고 그다음에는 민방위가 돼서 겨우 숨을 돌릴 만하니까 반상회원이 되라고 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냐고 비판했다.
이 시기 반공 운동은 지난번에 얘기한 초·중·고 교육 같은 것을 넘어 모든 부문에 걸쳐서 일어났다. 전국 체육 대회가 열릴 때에도 이 시기에는 반공을 아주 강하게 관련시켰다. 예컨대 1974년에 있었던 전국 체육 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 식사(式辭)를 보면, '지금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철통같은 단결력을 안 갖고 있으면 큰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얘기를 거듭했다. 예비군, 민방위대에서 얼마만큼 반공 교육을 많이 시켰느냐 하는 건 새삼 얘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 방식이 어떠했느냐는 건 그간 이야기한 바에서 시사됐다고 볼 수 있다.
유신 정권은 반상회 같은 것도 반공 교육의 중요한 장으로 활용했다. 매달 한 번씩 반상회를 꼭 열도록 했는데 정부는 반상회를 활용해 반공 교육, 간첩 신고, 유언비어 신고 같은 걸 의무화하고 불순한 언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1970년대에는 반상회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반공 캠페인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영화를 보러 가면 꼭 대한뉴스를 봐야 했는데 여기서는 대통령 담화 내용, 반공 행사 소식과 더불어 북괴 무장 및 고정 간첩 검거 소식, 북괴의 남침 도발 소식, 자주 국방 태세 강화, 조국 수호 같은 것들에 대한 보도와 홍보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많이 보도됐다.
방송가에 범람한 반공 프로그램
서중석 : TV, 라디오 같은 것을 통한 반공 운동도 대단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북한을 소재로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건 <김삿갓 북한 방랑기>다. 김삿갓이 북한을 여행하며 북한의 실상을 비판한다는 가상 설정 아래 KBS 라디오에서 매일 내보낸 5분짜리 반공 드라마였는데, 이걸 듣는 사람이 많았다. 인기를 얻자 하루에 두 번(전날 부분 재방송, 당일 방송) 내보내기도 했다. 1964년 5월 18일 첫 방송을 내보냈는데, 유신 체제에서는 물론이고 유신 체제가 무너진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다. (이 프로그램은 2001년 4월까지 37년간 전파를 탔다. 그 사이에 국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프로그램 명칭도 몇 차례 바뀌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한때 제목에서 '북한'을 빼기도 했고, 1990년대에는 <김삿갓 세계 방랑기>로 바꿨다가 <김삿갓 방랑기>로 이름을 다시 바꾸기도 했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는 중앙정보부에서 직접 자료를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고료가 아주 후했던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이 프로그램의 작가였던 이기명은 2005년 "20분 분량 드라마 원고료로 1회당 1500원씩 받던 시절에 5분짜리 <김삿갓 북한 방랑기>는 그 두 배씩 받았다"며 "10여 년 동안 대본을 쓰면서 (북한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으로 그렸던 것이 몹시 미안했다"고 밝혔다. '편집자') 그리고 동아방송에서 1970년대에 내보낸 대공 수사 드라마 <특별수사본부>도 1000회 넘게 전파를 타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TV에서도 반공 프로그램을 많이 내보냈다. KBS는 1964년 11월부터 <실화극장>이라는 반공 드라마를 방영했다. 10년 넘게 방영됐는데, 인기 배우가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올해 1월 신문에 실린 김창남 교수 인터뷰에도 <실화극장>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중학생 때 TV가 있는 이웃집에서 <실화극장>을 재미나게 봤는데, 그 <실화극장> 대본을 중앙정보부 직원이 썼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는 얘기다. (<실화극장> 극본을 쓴 중앙정보부 요원 김동현은 중앙정보부 과장까지 지내고 1982년 9월 '방송의 날'에는 훈장도 받았다. '편집자') 이 시기엔 자기 집에 TV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동네의 다른 집에 가서 보는 일이 흔했다.
이런 반공 드라마는 KBS뿐만 아니라 MBC, 동양방송(TBC), 동아방송(DBS)에서도 방영했다.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개중에는 이름도 비슷비슷한 것도 있었다. 예컨대 MBC에는 <자유무대>라는 게 있었고 TBC에는 <자유전선>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TBC는 <추적>이라는 간첩 수사물도 만들었다. MBC도 <113 수사본부>라는 간첩 수사물을 만들었는데, 1973년부터 10년 동안 방영되며 인기를 모았다. 또 KBS는 <어선 일신호>, <조총련> 같은 일일 반공 드라마를 방영했다.
여기서 사례로 제시한 것 말고도 각종 반공 드라마가 이 시기에 참 많았다. 반공을 전면에 내세운 이런 프로그램들뿐만 아니라 인기 연속 드라마라든가 코미디 등 다른 여러 장르에서도 반공이 끊임없이 강조됐다.
(1970년대 간첩·첩보 서사를 분석한 이하나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체험담을 중심으로 한 실화(논픽션)의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이하나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여러 신문과 잡지는 수기 모집 형식으로 일반인들의 반공 경험담을 수집해 기사화했다. 정부에서 제작한 문화 영화가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장편 다큐멘터리 시대를 맞았는데, 특히 반공을 주제로 한 문화 영화 가운데 체험담 형식이 많았다. 또한 실록 소설이라는 장르가 유행했다. TV와 라디오에서도 실화 소재 이야기가 각광을 받았다. 각 방송사는 수사물, 간첩물, 범죄물, 전쟁물 등을 많이 제작했는데, '이건 언제 어디서 일어난 실화'라는 자막을 내보내곤 했다. 방송에서 인기를 얻은 시리즈는 책으로 출판되고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예컨대 <특별수사본부>는 21권의 실록 소설과 6편의 영화(이 중 다섯 편은 여간첩 얘기)로 재탄생했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이하나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의 드라마·영화 등의 미디어에서 실화 소재 이야기의 절대다수가 간첩과 관련된 이야기였으며, 간첩 관련 드라마·영화의 다수가 실화이거나 실화처럼 보이도록 홍보되었다"고 분석했다.
실화임을 강박적으로 강조한 이러한 여러 장르의 이야기들이 사실에 충실히 바탕을 두고 분단 현실을 온전히 재연한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 이하나는 "이들 수기와 체험담이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각종 허구적 요소들을 활용하고 있으며 극적 구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편집자')
특히 이 시기 반공 운동이 아주 강한 영향을 줘서 오늘날까지도 남북 관계에 대해 수구적이라고 할까 보수적인 견해를 견지하게끔 하는 걸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이 시기에 TV 보급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오락을 즐길 만한 게 별로 없던 때였기 때문에 TV만 있으면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1968년만 하더라도 세대당 TV 보급률이 2.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 1971년에 10.2퍼센트로 꽤 늘었고 1973년에는 20.7퍼센트로 늘었다. 총력 안보 물결이 거세게 일었던 1975년에는 30.4퍼센트, 1977년에는 55퍼센트가 됐고 1978년에는 70퍼센트를 넘어섰다. 이렇게 TV가 쑥쑥 보급된 것도 정부가 강조한 안보 태세, 반공 운동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북한과는 대화도 하면 안 된다? 반공 편향 교육·선전의 후유증
서중석 : 이런 식으로 반공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어떠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한 교사는 '북한에 대해 떠오르는 것을 이야기해봐라',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착실하게 반공 교육을 받았을 터이니, 그럴 때에는 이런 게 떠오를 것이라고 써놓았다. 붉은 이리떼, 아오지 탄광, 헐벗고 굶주린 북한 동포, 무장 공비 만행, 땅굴, 김일성의 혹, 남침 위협, 이런 것들이 떠오르지 않겠느냐고 썼다. 김일성의 혹, 이것도 그 당시 초등학교에 가보면 참 많이 붙어 있었던 내용이다. 김일성을 흡혈귀 비슷하게 그려놓은 것과 함께. 하여튼 이 시기 반공 교육이 '북한과는 어떤 대화도 해서는 안 된다. 북한은 절대적으로 없어져야 할 적이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갖게끔 하지 않았겠느냐고 봤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사고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겠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아일보에서 2006년 7월 13일에 보도한 걸 보면, 대학생들의 주요 걱정거리가 시기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도표화한 것이 있다. 그것을 통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가 그 시기 젊은이들에게 각각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2005년의 경우 경제 침체, 사회 빈부 격차, 물가고가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1993년의 경우 한국의 정치 후진성으로 나와 있다. 6월항쟁이 일어난 1987년에도 한국의 정치 후진성으로 나와 있다. 당연하겠지만 이때는 1993년보다 그 응답 비율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1977년을 살펴보면 1987년, 1993년, 2005년과 확연히 다르다. 이때는 압도적으로, 그러니까 63.5퍼센트가 북한의 남침이라고 대답했다. 참 무서운 일이다. 2005년의 경우 남침이라고 답한 비율은 4.7퍼센트에 불과했다.
1970년대에는 축구 대회를 할 때에도 북한하고 일본이 맞붙으면 많은 사람이 일본을 응원했다. 북한은 망해야 하는 존재로 교육받고 주입받은 결과 아니겠나. 문익환 목사가 써놓은 걸 보면, 인공위성이 궤도를 벗어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게 북한에 가서 떨어지기를 바라는 걸 보고 놀랐다는 내용이 있다. 한 여고생이 당시 써놓은 걸 보면 '북한은 인간이 사는 곳 같지 않구나. 너희들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돼 있다. 이건 공산당만 미워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주 강렬한 반공 교육을 많이 받은 결과 북한 사람이 사람처럼 안 보이게 되기에 이른 것이다. 황석영이 1989년 방북했다가 나중에 그것 때문에 수감되는데, 그때 방북한 경험을 정리해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을 냈다. 북한도 인간이 사는 곳이다, 이 얘기였다. 오죽하면 그런 제목을 붙여 책을 냈겠나.
그런데 1970년대에 반공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하도 강하게 그런 교육을 받은 결과 생긴 강렬한 인상을 머릿속에서 지우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1970년대 반공 교육에 인간에 대한 증오, 불신, 두려움, 공포를 조장하는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면이 꽤 있다. 어떻게 유년기, 청소년기의 교육을 그런 식으로, 그것도 국가적인 사업으로 대대적으로 벌일 수 있는 건가. 그런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그 시기에 많이 했고, 그 이후에도 갖고 있다.
죽이고 고문해서 조작 간첩 제조한 유신 정권
프레시안 : 반공 일색 교육·선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간첩 아닌가.
서중석 : 반공 교육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간첩이다. 그 당시 우리가 어떤 식의 사고를 했는가를 간첩 문제를 얘기하면서 되돌아볼 수 있다. 간첩이나 국가보안법에 관해 연구를 많이 했고 좋은 논문도 많이 쓴 한홍구 교수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는 북한에서 간첩이 별로 내려오지 않았는데도 1970년대 내내 어디에나 간첩이 있다는 식으로 해서 한국에는 어디에도 간첩이 있고 어디에도 간첩이 없는 상황이 초래된 게 아니냐는, 상당히 풍자적인 말을 했다.
나도 1970년대 초를 지나면서부터는 북한에서 간첩이 얼마 안 왔다고 본다. 오기는 했겠지만 1950~1960년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줄었다, 이 말이다. 왜냐하면 1970년대 북한에서 간첩을 내려보내면 너무 손해를 본다고 할까, 시쳇말로 하면 밑지는 장사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간첩 한 명을 교육시켜 내려보내는 데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드나. 여러 가지 부대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내려와서 뭘 얻어 가느냐, 이 말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 이전에 비해 정보 통신이 얼마나 발전했나. 아주 특수한 곳에는 간첩이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일반적인 사안의 경우 구태여 간첩을 보내 뭔가를 탐지해서 알아와라, 이럴 만한 것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더 많이 택하지 않았겠느냐고 본다.
프레시안 : 이 시기에 북한에서 간첩이 얼마 안 내려왔을 것이라고 했는데, 대규모 간첩 사건은 많이 발표되지 않았나.
서중석 : 큰 규모의 간첩단 사건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는데, 거대 규모 간첩단 사건 같은 게 1970년대에 많았다. 그런데 그것들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1970년대에는, 물론 진짜 간첩도 있었겠지만, 조작 간첩이 참 많았다.
예컨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문인 간첩단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그해 1월 7일 문인 61명이 '헌법 개정 청원은 당연한 권리다'라고 하면서 유신 헌법 개정 운동에 동참하는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나. 그로부터 20일도 안 지났을 때 유신 정권은 서명 문인 가운데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정을병, 장병희 이렇게 5명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들이 발행하는 <한양>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거기에 한국을 비방하는 글을 기고하고 그쪽 잡지 간부들과 회합했다는 게 주된 혐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한양>은 조총련계 잡지가 아니다. 당시 한국에도 많이 들어왔고 나도 여러 번 봤던 것으로 온건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창간호에 '5·16 혁명 공약'을 실었고 196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을 좋게 보는 글을 많이 실었던 잡지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잡아넣은 것이다. 이 중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나중에 재심을 청구한 사람들은 무죄가 됐다.
또 전에 최종길 교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이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당시에는 대단히 큰 사건으로 이야기됐다. 무려 54명이나 관련돼 있다고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재조사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도 간첩 혐의자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결국 단 한 명의 간첩도, 연루자도 없는 조작 사건이라고 이 위원회에서는 2002년 규정했다.
이 두 가지보다 더 큰 사건으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 있다. 사형을 당한 사람만 3명이나 된다. 사건 규모가 아주 컸다. 1974년 3월 박정희 정권이 울릉도를 거점으로 한 간첩단 47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고,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것도 중앙정보부에서 사람들을 고문해서 조작한 사건이었다. 나중에 재심에서 전부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국가로부터 보상금까지 받았다.
조작 사건 중 어느 하나 마음 아프지 않은 게 없지만,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제일 가슴 아픈 사건은 바로 재일 교포 간첩단 또는 간첩 사건, 간첩단이라고도 부르고 간첩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그 사건이다. 대규모 간첩단 사건 중에서 제일 큰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재일 교포 간첩단 사건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선 차별을 당하고 한국에선 간첩으로 조작되고
서중석 : 재일 교포들은 대대로 일본에서 지독한 차별을 받았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그래도 그전에 비해 외견상으로는 많이 달라졌지만, 197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대를 물려가면서 모든 면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국에 대한 정성과 관심이 유난히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국이라는 게 둘로 갈라져 있지 않았나.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양쪽을 다 방문해봤다. 북한은 어떤지, 남한은 어떤지를 직접 살펴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북한을 찾아가고 남한을 찾아오고 그랬겠나.
하여튼 1970년대에 들어와서 많은 재일 교포, 똑똑하다는 젊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러 왔다. 얼마나 벅찬 마음으로 조국을 찾아왔겠나. 일본에서는 사귈 수 없는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다는 기대, 그러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민족을 위해 정말 뜻깊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큰 뜻을 품고 오지 않았겠나. 그런데 이 사람들이 대거 간첩으로 체포돼버렸다. 그래서 사형 선고도 받고 지독한 고문도 당했다. 그때 이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나.
프레시안 : 한국에 왔다가 수사 기관의 손쉬운 표적으로 전락한 재일 동포는 어느 정도 되나. 그리고 대개 어떤 식으로 휘말렸나.
서중석 : 재일 동포 간첩에 관해 한겨레 김효순 기자가 2015년에 책을 한 권 냈다. 재일 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조국이 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인데, 여기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대선이 있던 1971년에 서승, 서준식 형제가 휘말린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게 일어났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김효순 이 사람도 그렇게 썼는데, 정부 기관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등의 영향으로 북한에서 직파되는 간첩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일본을 경유한 우회 침투 가능성 쪽에 눈을 돌렸다고 한다. 물론 재일 동포 간첩 사건 관련자 중에는 북한에 다녀온 사람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과 연결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행위를 월등 넘어선 일이 간첩단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북한에 갔다 왔다는 그 자체를 그렇게 큰 범죄로 본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재일 동포 모국 유학 제도가 1962년에 생겨서 그 이후 한국에 계속 들어왔는데, 특히 1970년대에 많은 학생이 들어왔다. 김효순 기자가 쓴 글을 보면 일본과 연관된 간첩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약 150명인데, 이 중에서 유학, 사업 또는 친지 방문 목적으로 일본에 갔다가 구속된 이들을 제외하면 재일 동포는 80여 명으로 추정된다고 쓰여 있다. 재일 동포 간첩 사건은 오랜 기간 제대로 검증되지 않다가 나중에 여러 가지 조사, 증언 같은 걸 통해 실체가 밝혀지게 된다.
재일 동포로서 정체성 문제 때문에, 그리고 조국의 분단 현실과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보면서 깊은 고민이 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정보 기관에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된 사례가 많이 생겼다. 재일 동포 유학생 간첩으로 양산된 단체가 일본에서 '한학동'으로 불린 재일한국학생동맹, '한문연'으로 불린 한국문화연구회, '유학동'으로 불린 재일본유학생동맹 이런 것들이 있다. '유학동'은 조총련 계통이고, 민단 계통으로는 '한학동'이 있고 '한문연'도 그 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쪽에서 김대중, 김지하 구명 운동 같은 걸 많이 벌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유학생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언제든 간첩 용의자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재일 동포 유학생 사건의 피해자들 중에는 정보 기관에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수사관의 가혹 행위와 회유를 이겨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대야 했던 사람도 있고, 검찰 쪽 증인으로 끌려나와 불리한 증언을 했던 사람도 있고, 자신의 친구와 동료가 간첩으로 몰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다. 김효순 기자는 이 사람들이 전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없는 정신적 상흔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봤다. (군사 독재 시절, 재일 교포와 더불어 납북 어부를 비롯한 섬사람은 고문으로 간첩을 조작·제조하던 자들에게 손쉬운 표적이었다. 박정희 집권기뿐만 아니라 전두환 정권 때에도 간첩 조작 사건 중 상당수가 섬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터진 것도 그 때문이다. 울릉도뿐만 아니라, 예컨대 박정희 정권 후반기인 1976년부터 전두환 정권 때인 1983년까지 다섯 차례나 간첩 사건이 터진 서해의 작은 섬, 미법도의 비극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더욱 비극적인 건, 이러한 사건에 휘말린 섬마을 사람들은 대개 교육 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고 유력자 또는 저명인사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사회에 억울함을 호소해 관심을 모으는 데에도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는 것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 가운데 훗날 재심을 청구한 사례는 얼마나 되나.
서중석 : 재일 한국인 정치범 일람표라는 것을 관련 단체에서 만들었는데 거기에 160명이 들어 있다. 그 가운데 유신 시대에 체포된 사람들만 살펴보면, 1971년 대선 때 서승 등 3명이 있고 그 이후에도 몇 명 더 있다. 1973년부터 많이 늘어나는데 이해에 12명이 체포됐다. 1974년에는 17명이 된다. 1975년에 가면 유명한 11·22 사건이 터진다.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학원에 침투한 간첩 일당 21명을 체포했다고 11월 22일 중앙정보부에서 크게 발표한 사건이다. 제1차 모국 유학생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이라는 엄청난 이름으로 얘기되는데 재일 동포 유학생 12명이 이때 걸려들었다. 그해 12월 11일 이철, 강종헌을 비롯한 다섯 명이 더 묶이는데 이게 바로 제2차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난 것이다. 이철과 강종헌, 두 사람 다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면서 1975년에 21명이 간첩 사건에 휘말렸다. 1976년에는 3명, 1977년에는 6명,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간첩 같은 것으로 체포되고 그랬다. 이런 식으로 체포되는 건 1980년대까지도 많이 나타난다.
이 사람들 중에서 일부가 나중에 재심을 청구했다. 체포돼 고생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에 돌아가서 '그러고저러고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재심 청구를 못 하겠다'고 한 경우도 많은데, 여기서는 재심을 청구한 이들 중 몇 사람 사례만 보자. 유영수라는 사람은 부산대에서 공부하다가 1977년 체포됐다. 무기 징역을 받았다가 7년간 감옥 생활을 했는데, 2012년 대법원에서 간첩 혐의를 비롯한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재심 과정에서 법원은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이 이 사람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각종 고문과 가혹 행위로 허위 자백을 하게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강종헌은 11·22 사건으로 들어갔는데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이나 감옥소 생활을 했다. 이 사람은 서울역 같은 데에서 사람들이 피를 파는 걸 보고 너무 딱해서 '의학을 공부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생각으로 서울대 의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사건에 휘말려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이나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강종헌은 재심을 청구해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고려대 대학원에 다닌 이철도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이나 감옥소에서 썩었다. 역시 2015년에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재일 한국인 정치범 일람표에는 재심을 청구한 사람이 31명으로 나오는데 이게 다는 아닐 것이고 그 당시까지 조사된 인원일 것이다. 1970년대에 걸려든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고 1980년대에 휘말린 사람들도 좀 들어가 있는데, 하여튼 재심을 청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김병진의 책 <보안사>에는 1970~1980년대에 간첩단 사건이 어떤 식으로 조작됐는가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인 것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인 것이지." 김병진이 기록한 어느 준위의 말이다. 재일 한국인 3세로 한국에 건너와 연세대에 다니던 중 1983년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북한 공작원으로 날조된 김병진은 그 후 보안사에 강제로 채용돼 다른 재일 한국인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일에 투입되는 기막힌 일을 겪었다. 보안사를 떠난 후 자신의 체험을 정리한 책 <보안사>를 통해 간첩을 조작한 한국 현실을 고발했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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