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1976년 한여름, 한반도를 전면전의 수렁에 빠뜨릴 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살해하면서 벌어진 사건인데, 이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도 논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서중석 : 1976년 8월 18일에 일어난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을 지금부터 살펴보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라고 많이 부르지만, 다른 이름으로도 부른다. 이 사건에서 북한군이 있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과정이 너무나 명확하지 않나. 그런데 박정희 유신 정권은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구축된 총력 안보 태세를 이 사건을 계기로 또다시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반공 교육에서 북괴 도발로 제일 쉽게 사람들한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1968년, 1969년 그때 것보다도 이제는 이 사건이 되지 않았느냐, 그래서 총력 안보와 반공 운동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를 북한이 제공한 게 되고 만 것 아니냐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고등학교 교사가 1981년에 제출한 교육대학원 석사 논문을 보면 '고등학교 학생들의 반공 의식을 높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뭐냐'에 대해 응답자의 50퍼센트, 그러니까 반절이 북한의 도발 사건이라고 답한 것으로 돼 있다. 1970년대 최대의 도발 사건으로 얘기되는 것이 바로 이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다. 그 밖에 반공 의식을 높이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북한 현실'이 22퍼센트, '민주주의 우월성'은 14퍼센트로 나와 있다. 다시 말해 북한의 도발 사건이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것을 통해서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의 중요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이 아주 중요한 것은 1953년 정전협정을 맺은 후 1970년대 말까지, 또는 1980년대 말까지라고 해도 좋은데 최대의 전쟁 위기가 이때 있었다는 점이다.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고 기적적으로 전쟁이 안 일어났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국의 미루나무 절단 작업에 만일 북한이 대응 사격을 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 뻔했나. 이 점이 아주 중요한 것 아니냐, 난 그렇게 본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보다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춰서 논의가 됐으면 좋겠다.
일촉즉발 전쟁 위기로 즉각 이어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서중석 : <공동 경비 구역 JSA>, 참 잘 만들었고 관람객도 많았던 영화인데 이 영화에 나오는 대로 판문점은 항상 티격태격하는 곳이다. 이때도 티격태격하는 게 많았다. 공동 경비 구역 안에 유엔군이 운영하는 3초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루나무가 있었다. 절단했으니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데, 그 미루나무에 가지가 무성하면 유엔군 측에서 북측을 관찰할 수 없었다.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3초소 주위에는 북한군 초소가 3개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옆에 있다.
유엔군 측에서는 문제의 미루나무를 8월 초에 절단하려 했으나, 북한군이 저지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8월 18일, 이번에는 나무를 자르는 대신 가지치기만 하는 것으로 정하고 아서 보니파스 대위를 비롯한 11명의 군인이 5명의 노무자를 데리고 가지치기에 나섰다. 처음에는 북한군도 막지 않았는데, 얼마 후 북한군 장교 박철 중위가 나타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작업을 중단하라면서 막 협박하고 욕을 해댔다. 그래도 계속 작업을 하자, 북한군은 "전부 죽여"라고 하면서 달려들었다. 쇠파이프, 노무자가 버린 도끼 같은 걸 가지고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JSA에서는 총기 사용을 엄격히 규제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군 측이 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 총을 쏘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끼, 몽둥이로 공격당한 보니파스 대위가 쓰러졌다. 3분 후 보니파스 대위를 바로 후송했지만 후송 중 사망했다. 마크 바렛 중위는 제방 너머 늪지에서 발견됐는데 역시 후송 중 사망했다.
이게 북한군의 도끼 만행 사건이다. 그런데 판문점 사건에는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 그다음에 미루나무 절단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는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미군 장교 2명 피살 후 미국도, 북한도 바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각각 어떻게 움직였나.
서중석 :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주한 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대장은 일본에 가 있었는데 즉시 귀국, 밤 9시에 긴급 참모 회의를 열었다. '미루나무는 조속히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과 전쟁을 벌이는 건 피해야 한다'고 하면서 미국 정부에 자신의 복안을 얘기했다. 워싱턴에 특별 대책반이 마련됐다. 8월 19일 오전에는 데프콘 3이 발동됐다. 전투태세가 발효된 것인데, 정전협정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한 미군 휴가가 다 취소되고 귀대 명령이 떨어졌다. 김충식 기자 기술에 의하면, 남한 전역에서 즉 휴전선 쪽뿐만 아니라 부대가 있는 모든 곳에서 군인은 군장을 점검하고 실탄을 받았고, 모든 전투 부대는 진지로 투입됐다.
북한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19일 오후 5시 평양 방송은 북한군의 전투태세 돌입을 알렸다.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전시 사태를 선포하고 평양시민을 지방으로 분산시키고 대학생들의 학업을 전폐한 다음 교도대에 투입했다고 돼 있다. 비상사태였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의 주요 항공 부대들은 한반도 쪽으로 이동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에서 세운 미루나무 절단 작전은 폴 버니언 작전이라고 불린다. 이 작전에는 한국군도 참여했다.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바로 그 작전에 특전사 병력 일부가 차출됐다. 역시 김충식 기자 책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19일 오후 김포 제1공수특전여단의 여단장 박희도는 합참 본부장 유병현 방에 불려가 '특공 작전을 펼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특전사령관과는 상관없이, 그러니까 특전사 지휘 체계와는 무관하게 떨어진 지시였다. 20일 오전에는 합참의장인 노재현 대장, 육군 참모총장인 이세호 대장이 김포에 와서 박희도에게 작전 명령을 내리고 대통령 격려금도 전했다. 그러한 명령에 따라 편성된 특공대원 64명이 그날 밤 판문점으로 떠났다. 제1공수특전여단은 1979년 12·12쿠데타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대로 이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까지 전두환이 여단장이었다. 차지철이 이끌던 청와대 경호실에 전두환이 작전차장보로 임명돼 올라가면서 부임한 후임자가 박희도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보면, 폴 버니언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이 빅터 비에라 중령인데 이 사람은 특전사가 자기 작전에 배속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했던 것으로 돼 있다. 어쨌건 '한국군의 총기 휴대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거듭 강조됐다. 왜냐하면 여차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미국은 원치 않는 전쟁에 말려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군의 총기 휴대는 절대로 금한다는 것을 강하게 얘기했다.
그렇지만 한국군은 미군 몰래 M16과 수류탄 등 무기를 숨겨 가지고 들어갔다. 박희도 얘기를 들어보면 부하들의 생명을 지키려면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자신이 판단했다고 하는데, 대통령 쪽으로부터 '적을 많이 응징할수록 좋다'는 메시지를 받았던 것 같다. 20일에 두 대장이 박희도에게 와서 작전 명령을 내릴 때 그 얘기가 포함됐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은 8월 20일 바로 이날, 국방부 장관에게 대독케 한 육군 3사관학교 졸업식 훈시에서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게 그 당시에 참 많이 나왔던 말이다. 이처럼 박 대통령은 만행을 저지른 북한군을 응징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개성 초토화 계획까지…다급한 김일성, 정전협정 후 최초로 공식 유감 표명
프레시안 : 미루나무 절단 작전 당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스틸웰 대장이 강하게 비무장 명령을 내렸는데도 특전사 병력은 은밀히 무장을 한 상태에서 21일 작전 장소로 가게 된다. 이때 미국 쪽에선 핵 탑재가 가능한 F-111 20대가 떴고, 역시 핵 탑재가 가능한 B-52, 오늘날에도 대북 무력시위 때 한반도 상공에 출격하는 이 전략 폭격기가 이때 3대 날아왔다. F-4 24대도 출격했다. 북쪽에서 보이도록 출격 장면을 과시했는데 그건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니까 '너희들, 까불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일본 요코스카에서 출항해 한국 해역에 들어왔고,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항공모함 레인저호도 한국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데프콘 3에서 데프콘 2로 다시 상향된 상태에서 21일 아침 7시에 드디어 폴 버니언 작전이 시작된다.
이때 북한 쪽에선 어떻게 나왔느냐.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서 150명이 나타났다. 이제 정말 큰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초소를 넘어오면 도발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딱 초소 앞에서 이 병력이 멈추더니만 되돌아가버렸다. 북한 군대는 폴 버니언 작전에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루나무를 절단했는데, 그러고 나서 특전사 병력이 북한 초소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5, 6, 7, 8초소를 부숴버렸다. 만일 북한군이 이때 대응 사격을 했다면 어떻게 됐겠나. 유엔군 쪽에서는 폴 버니언 작전 과정에서 교전이 발생할 경우 개성의 인민군 막사를 포격하고 개성 위쪽 도시 주변까지 포격해 개성 일대를 초토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유엔군, 국군도 그렇고 북한군도 서부 전선 쪽에 중요 무기와 주력 부대를 배치한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그런 일이 생겼다면 순식간에 한반도 전체로 전쟁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이렇게 초소를 파괴한 건 박 대통령의 결단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고 김충식 기자는 썼다. 박희도가 육군 참모총장 이세호로부터 '공격해오는 적군에 대응하라. 불법 초소를 부숴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건 사실은 박 대통령 지시다, 김충식 기자는 이렇게 봤다.
프레시안 : 초소 파괴에 북한군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 정말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는데 끝내 북한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어떤 데에서는 "기적적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정렴 회고록을 보면 "우리 작전반이 그간 불법으로 설치해온 북한 초소도 차제에 때려 부수고 했는데 약 한 시간 반의 작전 시간에 방해나 저항이 전혀 없었다. 만일 무력 도발을 해온다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 평야 깊숙이까지 진출할 각오로 임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다. 전쟁을 확대할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북한이 대응 사격을 해온다면 전쟁을 크게 확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당시 한국 최고위층에서는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 또 하나 일어났다. 데프콘 2까지 발동될 정도로 전쟁 직전 상황으로 치달았는데, 일각에서는 전쟁 돌입 상황이라고도 이야기하는 사태에 이르렀는데, 그러면서 북한군 초소까지 부쉈는데도 김일성이 오히려 그날 대독의 형태이긴 하지만 인민군 총사령관 이름으로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에서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입니다. 앞으로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양쪽이 다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라는 발표를 한 것이다.
북한이 유감이라는 형태로라도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건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 사건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남북 관계와 관련해 북한 최고 권력자 이름으로, 그것도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사건은 없다. 1994년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도 그렇고 그 이후 김정일, 김정은까지 포함해도 그렇다. 물론 그간 북측이 유감을 표명한 사건은 이것 말고도 몇 건 더 있다. 예컨대 1996년 강릉 앞바다에 북한 잠수함이 침투한 사건에 대해서는 북한 외교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유감을 표명했고, 2002년 제2차 연평 해전에 대해서는 남북 장관급 회담 북측 단장이 유감을 표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최고 사령관 이름으로 유감을 공식 표명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때에는 김일성이 폴 버니언 작전 당일 유감을 공식 표명했다. 얼마나 사태가 위중한가, 위험한 상태인가를 김일성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최고 권력자의 유감 표명 사례로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기도 건도 생각해볼 수 있다. 1972년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21 청와대 습격 기도에 대해 김일성이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것은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과는 차이가 난다. '편집자')
무기 휴대하고 북한 초소 부순 한국 측 행동에 경악한 미국
프레시안 : 전면전 위기를 불러온 북한군의 미군 살해는 어느 선에서 결정·실행된 사안인가. 북한 최고위층이 직접 관련돼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사안인가?
서중석 : 북한군이 일으킨 이 사건이 평양 고위층의 지시인가 아닌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틸웰 대장은 '평양 고위층 지시는 아닌 것 같다. JSA 쪽 군대의 우발적 행동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국가안보회의 참모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도 그 지역 자체에서 했거나, 평양에서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고위층 지시는 아닐 것이라고 밝혔다. 글라이스틴은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내게 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별 고문 직위에 있었던 이문항도 이것은 계획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얘기했다. 이 부분에 관해 홍석률 교수가 논문을 썼는데, 홍 교수도 이 사건이 북한에 여러 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평양 고위층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봤다.
그러면 이 사건이 어떤 측면에서 북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느냐. 북한은 이 사건 때문에 여러 가지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때까지 북한은 유엔사를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제3세계의 지지를 받으면서 강력하게 펼치고 있었는데, 그것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북한이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비동맹 외교에 아주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뿐 아니라 북한이 당시 추진하던 대미 접촉 및 협상도 물 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북한을 한층 더 주시하게 됐다. 이처럼 매우 불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인데 북한 고위층에서 이런 우매한 짓을 사전에 계획을 세워 했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은 박철 중위를 비롯한 현지 북한군 장교들의 난폭성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북측에 그 미루나무 위치가 애매모호하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자기들 쪽에 있는 나무로 착각한 상태에서, 미군이 자신들을 관측하기 위해 자기들 쪽에 있는 나무를 가지치기하려는 것 아니냐고 잘못 판단해 이런 사건을 일으킨 것 아니냐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던 참에 가지치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런 사건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후 유엔군과 북한군은 군사 분계선에 따라 양측 경비 구역을 분할했다. 판문점 공동 경비에서 분할 경비로 바꾼 것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미루나무 절단 작전에 투입된 특전사 병력이 은밀히 무기를 휴대한 것에 더해 북한군 초소까지 부순 것에 대해 미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이 작전이 끝났을 때 미국 측은, 비에라 중령 증언에도 그렇게 나오는데, 한국 측이 아주 위험한 일을 한 것이 아니냐며 분노했다. 특히 책임자인 스틸웰 대장은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스틸웰 장군은 이건 한미 간의 작전 지휘 체계에 관한 중대 문제라며 흥분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누가 그런 일을 했느냐. 누가 책임질 것이냐. 무기 휴대는 도대체 누구의 명령이냐"라고 하면서 노장군은 얼굴을 붉히며 속사포처럼 울분을 터트렸다고 박희도는 회고했다. 미국은 당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경악한 것이다. 스틸웰 대장은 한국을 떠날 때 박희도 준장한테 굳은 표정으로 "당신은 군법회의에 회부돼야 했다. 내 부하라면 군복을 벗겼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미국 측에서 이렇게 강하게 반발하자, 특공대장으로서 64명을 이끌었던 김종헌 소령 등 장교 2명이 군법회의와 징계위 절차를 거쳐 처벌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인 불이익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반도 전쟁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에 한국전쟁을 다룰 때 '북측에서는 다시 전면전을 일으킬 생각을 하기가 아주 어렵게 됐다. 너무나 심한 파괴를 당하는, 미군 폭격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북한이 내심으로는 잘 알고 있지 않겠느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에 대한 김일성의 조속한 유감 표명, 인민군 총사령관 이름으로 그렇게 나온 것도 전쟁이 일어날 뻔한 상황에서 그걸 방지하려는 의사 표명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다룰 때에도 얘기했지만,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이나 지지가 없을 경우 북한이 설령 기습전을 한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과연 성공하겠느냐, 이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소련의 뒷받침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김일성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 최강의 미군이 서부 전선에 버티고 있었다. 중무장한 전폭기가 언제든 뜰 수 있지 않았나. 핵 탑재가 가능한 폭격기들이 이 사건 때 실제로 뜨지 않았나. 그리고 여러 연구자가 얘기한 것처럼, 1973년을 경계로 해서 1인당 GNP도 북한이 이제 뒤지게 됐고 더군다나 전체 경제력도 1973년 이후에는 남한에 현저히 뒤처졌다. 중국과 소련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걸 절대로 원하지 않고 있었고, 경제력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북한이 전쟁 엄두를 내기가 어렵게 돼 있었다. 도박을 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와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이 언급한 게 여러 가지 나온다.
객관적인 남북한 전력 비교 대신 청와대의 일방적 전달이 횡행한 시대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나.
서중석 : 전에도 말한 것처럼, 1975년 베트남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동북아 쪽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런 속에서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미국은 북한을 더더욱 주시하게 된다. 이런 것들은 북한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북한을 묶어두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한 얘기가 김충식 기자 책에 여러 가지 나온다. 그중 1976년 7월 31일, 이 사건이 나기 전달인 이때 진해에서 출입 기자들한테 이렇게 공언했다고 한다. "우리 국군이 더 강하다고 생각해. 월남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기도 해서", 아주 중요한 대목을 박 대통령이 정확히 얘기한 것이다. "군 지휘관들의 실력이 향상돼 있어. 북괴는 6·25 때 중대장들이 장성이 돼 있고 그 이하는 실전 경험이 없다", 이렇게 대단히 중요한 지적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전에는 "김일성이가 까불면 평양이나 원산, 함흥까지 때리고 올라가는 건 문제도 아냐", 이런 얘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7월 31일 오프 더 레코드로 더 이야기한 게 있다. 국군이 얼마나 강한 신무기 등을 개발하고 있는가 하는 얘기를 하면서 "우리 공군력은 북괴보다 1.5배쯤 강하다. 전투기 보유 대수야 그들이 많지만 현대 공중전에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MIG-21 기종은 얼마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북한 공군의 전투기 중 다수는 낡은 기종이고 연료 부족으로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전투력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근래에도 나오는데, 1970년대 중반에 이미 박 대통령은 우리 공군력이 북한보다 강하다고 분명히 얘기했다는 말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 후 경제력을 바탕으로 좋은 전투기를 계속 들여오지 않았나. 그리고 박 대통령은 1978년 말이면 공군 전투기와 그 기기를 포함해 방위 산업이 다 된다고 자신감에 차서 이야기하면서 "이런 맛에 대통령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도 했다고 한다.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 일어나자 여차하면 연백 평야까지 치고 올라가려는 생각을 한 것도 이런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하는 점을 김충식 기자는 자신의 글에서 시사했다.
프레시안 : 오프 더 레코드이긴 했지만 공군력이 북한보다 1.5배쯤 강하다는 얘기를 대통령이 직접 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정권이 언론을 강하게 통제하던 때였기 때문에 남북한의 객관적인 전력 비교 자료를 대중이 접하기 어려운 시절 아니었나.
서중석 : 당시 전문가건 국회의원을 비롯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건 박정희 대통령의 남침 위협 발언에 대해 '그 문제를 깊이 있게, 양쪽 군사력도 비교하고 국제 정세도 분석하면서 얘기해보자', 이런 말을 할 수 없게끔 돼 있었다. 그게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모든 건 일방적이었다, 이 말이다. 박 대통령 한 사람만이 뭐라고 얘기할 수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이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수도 이전 문제를 다룰 때 "다행이었던 것은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서 볼 때 이북이 당장에 남침해올 태세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에는 북한에 그런 능력이 없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고 손정목 교수가 얘기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부분도 그 당시 신문에서는 그렇게 쓸 수가 없었다. 알고는 있어도 공표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예컨대 신민당 정일형 의원이 1974년 12월 14일에 국회에서 "대통령이 하야를 준비할 용의가 없는가"라고 묻자 공화당, 유정회 의원들이 단상으로 쏟아져 나와서 본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됐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날 정 의원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발언을 했는데, 그중에는 박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 위협을 장기 집권 명분으로 삼는 건 문제라는 내용도 있었다. (발언 요지를 정리한 동아일보 1974년 12월 14일 자에 따르면 정 의원 발언 중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은 통일과 안보를 이유로 3선 금지 조항을 고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10월 사태를 일으켰으며 유신당법(維新黨法)을 개정하는 등 지난 13년 동안 우리 국민은 안보를 위해 협력해왔는데 아직도 안보가 문제가 되고 험악해졌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부와 여당은 박 대통령이 계속 집권해야 북괴가 남침하지 못한다는 논리인데, 남북한의 대결은 박 대통령과 김일성의 대결이 될 수 없으며 왜 대통령과 우리의 안보가 운명을 같이해야 되는가." 10월 사태는 1972년 10월에 일어난 유신 쿠데타를 가리킨다. '편집자') 그러자 공화당과 유정회는 그날 바로 합동 의원 총회를 열고, "북괴의 남침 기도가 없다는 맹랑한 망언을 농하는 등 극히 위험한 국론 분열적인 언동까지 서슴지 아니해왔다"고 신민당을 강하게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분위기가 이러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라도 '북한의 남침 위협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있느냐', 이런 발언조차도 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김옥선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면책특권을 가지고 발언했는데도 사퇴서를 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앞서 1974년 8월 29일 일본 외상이 "북한으로부터 위협이 있는지 없는지는 한국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일본 정부는 객관적으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얘기하자, 물론 다른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그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이 발언이 중요한 한 계기가 돼서 반일 시위대가 일본 대사관에 난입하는 큰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나. 그런 판에 일반 학자, 전문가 이런 사람들이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었겠나.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계속된 시기였는데, 특히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엔 총력 안보 문제와 결부되면서 더더욱 그랬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신문이건 일부 정치인이건 이 문제에 관해 좀 다른 얘기를 했다. 그런 속에서 조지 맥거번 상원 의원이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다음 달인 1976년 9월 15일 "유신 헌법에 관한 국민 투표는 사기극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맥거번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국내 정치 억압에 악용하고 개인 권력 강화에 주력해왔다"면서 "미국은 한국의 악명 높은 폭군과 제휴하고 있으며, 군사 원조와 신무기 제공으로 한국의 북침 계획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고까지 얘기했다. 근래 미국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진보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바람을 일으켰는데, 맥거번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미국 민주당에서 진보파, 자유주의 성향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맥거번이 말한 "북침 계획"이 뭘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하여튼 이런 발언이 나오고 나서 얼마 후 유명한 박동선 사건이 터지게 된다.
위험천만했던 1968·1976·1994년…전쟁은 해결책이 아니다
서중석 : 1968년 1·21사건은 특수 훈련을 받은 게릴라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것으로, 박 대통령이 미국에 강한 응징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그것에 응하지 않지 않았나. 그런 속에서 박 대통령이 단독으로 응징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와 달리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때에는 특전사 병력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바로 북한군 초소를 때려 부수고 하면서 위력을 발휘했지만, 1970년대의 다른 시기에는 그렇게 하기가 아주 어렵게 돼 있었다. 미국의 지원이나 암묵적인 무언가가 없이 어떻게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었겠나. 다만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의 경우 그와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1972년 이후락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1·21사건에 대해 미안하다는 뜻으로 얘기를 하면서 그건 강경파들이 저지른 것이라고 했다. 그 강경파들은 나중에 다 숙청된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 쪽에선 핵 추진 항공모함을 동해로 보내고 공군과 해군에 대한 부분적인 동원령도 내리는 식으로 위협적인 시위를 하고 경고도 했다. 그렇지만 북한을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구에 응하지는 않았다. 그다음 해인 1969년 미군 정찰기 EC-121이 북한군에 격추됐을 때에도 미국은 박 대통령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0년 미국 국무부가 비밀 해제해 공개한 닉슨 행정부 시절 외교 문서를 보면, EC-121 격추 사건이 일어나자 박 대통령은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윌리엄 포터 주한 미국 대사에게 직접 얘기했지만 미국 쪽에선 그것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북한에 대한 군사 보복을 검토하긴 했지만 전면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그 가능성을 접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 주장을 묵살해버린다고 할까,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박 대통령은 미국에 배신감도 느끼고 여러 번 화가 났다. 홍석률 교수 책에 그 이야기가 잘 나오지 않나.
울진·삼척 사건의 경우 국지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었고 국군을 월남에 파견한 때 아니었나. 북한이 울진·삼척 사건을 일으킨 건, 월남과 연결되는 제2 전선을 펴서 미국과 남한의 관심을 한국 자체로 돌리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게릴라 침투 지역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정도의 제한적인 것이었지, 휴전선 근처에서 제한전 또는 기습전을 벌인다든가 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크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도발 사건임은 분명하다.
프레시안 : 1994년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1994년에는 미국이 북한 영변의 핵 시설을 폭격할 계획까지 세우지 않았나.
서중석 :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때에 비해 1994년이 더 위험했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런 얘기를 쉽게 할 수는 없다. 어쨌건 1994년 이전까지는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때 전쟁 가능성이 제일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1994년의 경우 실제로 상황이 안 일어나긴 했지만, 만약 미국이 정말 폭격을 했다면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에는 미국이 그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예컨대 지난 이명박 정권 때, 그리고 박근혜 정권이 출현할 즈음, 또 그 후에도 한두 번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 있지 않았나. 연평도 사건 때에는 북한이 아주 위험한 짓을 했다. 이런 것들은 다 1994년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이처럼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위험천만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절멸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 전쟁을 해도 좋다,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건 곤란하다. 평화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기 위한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들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