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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북한이 김형욱 죽인 것 같다고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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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북한이 김형욱 죽인 것 같다고 아버지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8> 유신의 몰락, 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김형욱 회고록 출간 막으려 직접 나선 박정희

프레시안 : 김형욱의 미국 의회 증언에 이어 박정희가 크게 우려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또 생겼다고 얘기했다. 무엇이었나.

서중석 : 바로 회고록 문제였다. 김형욱이 회고록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977년 6월에 작업을 시작해 1979년 9월 말에 완성했는데, 이것도 참 어떻게 죽기 직전에 완성했는지…. 하여튼 이게 우리가 얘기하는 김형욱 회고록이다. 이걸 저지하려 한 것이다.

청문회에서 증언한 것보다 회고록에서 훨씬 폭로를 많이 할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회고록 출간을 막으려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78년 11월 말이나 12월 초로 보이는데 한홍구 교수 책에는 이때 박 대통령이 직접 윤일균한테 전화를 건 것으로 돼 있다. 당시 윤일균은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이었는데, 대통령이 얼마나 속이 탔으면 중앙정보부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전화까지 했겠나. "자네, 미국 좀 다녀와야겠어." 대통령 지시에 윤일균은 준비되는 대로 가겠다고 답했다. 그랬더니만 박정희가 "아니야. 당장 가", 이렇게 재촉했다고 한다. 김형욱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이 사람을 보낸 것이다.

회고록 출판을 막기 위해 사람을 보낸 일이 그전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윤일균이 이때 드디어 성공한 것으로 돼 있다. 양측은 대화를 통해 회고록 원본을 주는 조건으로 한국 정부가 120만 달러를 순차적으로 보상하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보고서인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보통은 그냥 <성찰>이라고 부르는 책자인데 여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 120만 달러면 엄청난 돈 아닌가. 한홍구 교수 책에는 금액이 다르게 나온다. 50만 달러로 돼 있다. 어느 쪽이든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때 건네기로 합의한 회고록 분량은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성찰>에는 200자 원고지 2000매 분량으로 돼 있으나, 윤일균은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B4 복사 용지 2000장 분량이라고 밝힌 바 있다. 편집자)

프레시안 : 김형욱 회고록은 결국 출간되지 않았나.

서중석 : 윤일균이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김형욱이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 책에 의하면, 김형욱은 일본의 유명한 출판사인 고단샤에서도 회고록 출간을 준비했는데 한국 정부가 고단샤에 다른 이권을 주고 출판을 막았다고 한다. 그런데 1979년 4월 '창'이라는 일본의 작은 출판사에서 <권력과 음모>라는 제목으로 김형욱 회고록의 축약판이 나왔다.

문제의 핵심은 이 원본을 어떤 식으로 받아내느냐 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찰>에는 그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재미난 부분이기도 하니 한 번 살펴보자. "박 대통령은 이와 별도로 육인수 국회 문공위원장 및 이병희 무임소 장관 등에게 가또가와 출판사의 김형욱 회고록 출판 저지 교섭을 지원하도록 개인적으로 지시." ("이와 별도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자신의 손위 동서인 최세현 주일 공사에게 가또가와 출판사와 교섭하라고 주문한 것과 별도로 청와대에서도 움직인 것을 가리킨다. 편집자) 이처럼 전부 박 대통령이 지시하고 챙기는 걸 볼 수 있는데 그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박 대통령이 수사 담당자인 중앙정보부 6국장을 여러 차례 직접 만난 것을 빼놓고는 다른 사건에서는 이런 식의 일이 별로 안 일어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성찰>에는 가또가와 출판사가 김형욱에게 이미 지불한 계약금 30만 달러와 기타 손해 배상을 한국 측으로부터 받는 조건으로 출판 포기를 약속했다고 쓰여 있다.

그랬는데도 원본을 회수할 수 없었다, 이 말이다. 그래서 최후의 담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김형욱이 죽기 직전 마지막에 이뤄진 것이니까, 교섭을 김재규가 해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용운을 통해 하게 된다. 그런데 김재규가 이용운을 통해 교섭한 것은 박정희의 지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뭐냐 하면 이용운은 미국에서 반박정희 활동을 열렬히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국전쟁에 대해 한국의 북침설 같은 걸 주장하면서 사실상 북한을 대변하는 것 같은 활동도 벌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 때문에 '너무 심하다. 지나치다'는 이야기를 듣는 면이 있었다. (이용운은 박정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군인으로 얘기되는 이용문의 형이다. 편집자)

한홍구 교수 책에 의하면, 이용운은 김형욱의 집에서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의 통화를 주선했는데 김재규는 김형욱이 요구하는 150만 달러를 주고 압류 중인 김형욱의 국내 부동산도 풀어주고 여권 문제도 해결해주는 대가로 회고록 원본임을 이용운이 확인한 원고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이 시점이 1979년 9월로 쓰여 있는데, <성찰>에는 8월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는데,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어쨌건 김형욱이 죽기 직전 시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난 본다.

요구 조건을 다 들어주겠다고 김재규가 얘기하면서 교섭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듯했으나, 마지막에 여권 문제가 발생했다. 뉴욕 총영사관에서 여권을 직접 찾아가라고 김형욱한테 얘기하니까 김형욱은 '거긴 치외법권 지역이기 때문에 납치당할 수 있지 않느냐. 우리 집으로 가져와라', 이렇게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재규가 화를 내며 '지금까지 약속한 것, 다 취소하겠다. 김형욱 그자는 혼 좀 나야겠다'고 얘기하는 걸 주변에서 들은 것으로 돼 있다.

박정희, 딸에게 "북한이 김형욱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 김형욱 실종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1979년 10월 16일 자 1면) 기사. ⓒ동아일보
프레시안 :
그로부터 얼마 후 김형욱은 파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누가 김형욱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김형욱이 어떻게 죽은 것인지 등을 놓고 그간 다양한 주장이 나오지 않았나.

서중석 : 이용운을 매개로 한국 정부 쪽과 교섭한 후 김형욱이 알 수 없는 일을 하게 된다. 1979년 10월 1일 파리에 혼자 나타났다. 가족들은 만류했다. 혼자 그렇게 파리에 가는 것을 부인도, 아들도 만류했는데도 그랬던 것이다. 김형욱은 10월 2일에서 7일까지 골프 치고 카지노를 전전하다가 10월 7일 실종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이 살해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무수히 생겨나게 된다. 워낙 특이한 사건 아닌가. 나도 그중 여러 개를 읽어봤는데, <성찰>에 실린 것 중 일부, 대표적으로 알려진 몇 가지를 살펴보자.

소설가 이병주는 다국적 살인 청부업자 4명이 보상금 3만 프랑을 받고 김형욱의 후두부를 쇠망치로 때려 살해한 후 우아즈강에 수장했다고 주장했다. 신용석은, 이 사람이 쓴 것도 많이 읽혔는데, 중앙정보부가 개입했더라도 직접 살해하기보다는 외국의 킬러 조직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탈리아인과 일본인을 활용한 것 같다는 주장을 했다. 심지어 국내로 끌고 와서 김형욱을 죽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외교 행낭 같은 걸 활용해 국내로 끌고 왔다는 건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007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 아닌가.

또 많이 읽힌 것이 파리 근교 양계장 살해설이다. 파리에 밀파된 전 중앙정보부 특수 공작원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사료 분쇄기에 집어넣어 살해했으며, 납치 과정에서 여배우 최아무개가 이걸 목격했다는 주장이다. 국내로 끌고 와 죽였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1979년 10월 16일 청와대 지하실에서 차지철과 김재규가 목격하는 가운데 박 대통령이 직접 총을 쏘아 살해했다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주장도 나오고 그랬다.

조갑제가 쓴 글을 보면 박근혜가 이 부분에 관해 언급한 게 있다. 박정희 일기에 관한 내용을 조갑제가 다룬 글인데, 그걸 보면 조갑제와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이렇게 얘기했다. "박근혜 씨는 1979년 10월 중순, 그러니까 김형욱 실종이 보도된 뒤 식사 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김형욱이는 미국에서 북한 돈을 받아서 반정부 활동을 한 것 같다. 이번 실종 사건은 김(형욱)에게 돈을 대주던 북한 조직이 그 사실의 탄로를 막기 위해서 그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로부터 중요한 사건, 그러니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에 대해 들은 게 많은 것 같다. 지난번 선거 때 한 얘기 같은 것을 봐도 그런데, 이 김형욱 사건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밝혔다.

(1989년 4월 <월간조선>에 실린 인터뷰다. 1979년 10·26 이후 한동안 침묵하던 박근혜는 1988년 하반기부터 여성 잡지 인터뷰 등을 통해 아버지를 옹호하는 대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는데, <월간조선> 측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조갑제는 "박근혜 씨는 김대중 씨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둘 게 있다고 말했다"며 그 내용을 전했는데, 그중 다음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아버님은 북괴가 김(대중) 씨를 납치해놓고 우리 소행으로 덮어씌우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니, 집무실로 서둘러 내려가셨습니다." 김형욱 실종도, 김대중 납치도 북한 소행인 것 같다고 아버지가 딸에게 얘기했다는 점도, 진실과는 거리가 먼 그런 얘기를 딸이 '아버님을 바로 알리겠다'며 기자에게 전한 점도 눈길을 끈다.

또한 박근혜는 이 인터뷰에서 "아버님은 인명을 가볍게 보는 분이 아니었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정인숙 피살 사건, 김대중 씨 납치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같은 것은 아버님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울러 "구약의 모세처럼 이 민족을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인도"한 인물로 아버지를 치켜세웠다. "박정희라고 존칭 없이 꼭 써야 합니까"라고 기자에게 항의성 부탁을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편집자)

국정원 과거사위가 규명한 김형욱 살해의 그날…그러나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 있다

프레시안 : 아버지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부친의 명예 회복을 다른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박근혜 대통령이 김형욱 실종 사건에 대한 박정희의 잘못된 설명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다시 돌아오면,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도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지 않았나.

서중석 : 김형욱 살해와 관련해 국내 신문들은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씨의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1979년 10월 16일에 일제히 실종 사실을 보도했다. 파리 경시청에서 수사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진실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파리 경시청은 1980년 1월 24일 수사를 종결하면서, 김형욱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납치됐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어느 나라인지는 밝혀낼 수 없었다고 밝혔다. 만일 김형욱이 살해·암매장됐을 경우 매우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시체 발굴이 가능할 것이라는 발표도 했다. 이 뒷부분 발표는 맞는 내용인 것 같다.

하여튼 진실을 남김없이 알 수는 없지만, 노무현 정권 때 국정원에 설치됐던 과거사 위원회에서 이 부분에 관해 상당한 진실 규명 작업을 했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 들은 가장 중요한 증언으로는 그 사건이 났을 때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연수생이었던 신현진(가명)이 7차례에 걸쳐 얘기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이게 사실 또는 사실에 가장 가까운 진술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1979년 9월경이라고 돼 있는데 이상열 프랑스 주재 공사, 그러니까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책임자인 이 사람이 연수생이던 신현진과 이만수(가명), 두 사람을 불러서 김형욱 처치가 상부의 지시라는 점을 은연중에 암시하면서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현진한테 "자네가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며 살해 임무를 부여했다고 한다. 신현진은 '이 일은 혼자 할 수 없다. 전문가가 필요하다' 싶어서 절친한 사이였던 제3국 출신 친구와 외인부대 출신인 그의 친구를 접촉했다고 한다.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쪽에서 청부 살해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10월 7일,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이상열한테서 왔다고 한다. 그러고는 김형욱을 이상열 공사 차량에 태우고 갔는데 이상열은 중간에 내렸다고 한다. 파리 시내에서 벗어났을 때 제3국 친구들이 김형욱의 머리 뒷부분을 가격해 실신케 한 후, 계속 이동하다가 작은 숲 근처에서 머리에 권총을 쏴서 죽였으며 땅을 깊이 파지는 않고 두껍게 쌓인 낙엽으로 덮어버렸다고 신현진은 얘기했다.

이 살해 사건에 대해 제일 정확하게 알고 있을 사람은 이상열 공사였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 이상열 공사를 만났지만, 이상열 공사는 살해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홍구 교수 책에는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가 김재규-이상열-신현진으로 이어진 김형욱 살해 체계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김형욱 살해에 제3국인 2명이 동원됐다는 신현진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봤다고 돼 있다. 마지막까지 함구한 이상열은 2006년 사망했다. 신현진도 김형욱을 죽이고 시신을 처리한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김형욱은 그때 왜 혼자 파리에 갔을까

ⓒ오월의봄
프레시안 :
이 사건에서 개인적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는 김형욱은 그때 왜 혼자 파리에 갔을까 하는 점이다. 살아온 과정을 보면 김형욱은 권력의 생리에 어두울 수 없는 인물이다. 몸조심해야 할 때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골프, 카지노 도박을 즐겼다고는 하지만 그건 파리에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파리에 홀로 간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중석 : 이 사건에 의문점이 많은데 그것도 그 중 하나다. 왜 가족들이 만류하는데도 그걸 뿌리치고 갔을까, 그동안 그렇게 조심하던 김형욱이 그때는 왜 그랬을까, 뭔가 굉장한 미끼가 있었기 때문 아니겠느냐, 이 부분에 관해 이런저런 설이 있긴 한데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는 건 없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쪽 설명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것과 관련해 난 김형욱이 이 사건 이전에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한 여러 증언, 그리고 김형욱 회고록 원고 문제 같은 데에서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리고 윤일균한테는 빨리 가라고 전화까지 한 것 같은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사건을 김대중 납치 사건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하고 김형욱 납치·살해 사건에는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 김형욱은 박 대통령의 비행, 치부 같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김형욱이 배신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배신자는 당연히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김형욱이 일본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미국과 일본은 공권력 문제에서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국 정부의 공권력이 개입됐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나오고 일본 언론에서도 그 부분을 계속 강하게 쓰지 않았나.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그 부분을 끝내 애매모호하게 처리했다. 박정희와 일본 자민당 정권 간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과 있었던 커넥션과도 연결시킬 수 있겠지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김대중 납치 사건에서는 일어났다.

미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가 취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나.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의 책임을 분명히 지적했다. 특히 미국 국무부의 한국 담당 과장이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나. 그런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만일 김형욱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미국의 공권력이 어떻게 나왔겠나. 특히 코리아게이트 직후 시기, 그 여파가 여전히 있던 시기였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만약 김형욱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을 경우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정권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나왔겠는가 하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김형욱 본인도 미국에서 안전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김형욱은 미국이 아니라 결국 프랑스에 와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김대중 납치 사건과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김형욱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짓밟으며 박정희 정권을 떠받쳤고, 부정 축재도 적잖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돌아서서 박정희 정권을 강하게 공격했다. 이러한 김형욱 같은 사람을 역사에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 당시 박정희 정권 쪽에서 몰아세운 것처럼, 지금도 일각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배신자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때리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부하들이 때려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식으로 중앙정보부장 시절에 대해 변명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회고록을 남긴 것도 평가할 만하다.

서중석 :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보다는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들을 바탕으로 다각도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몇 마디 덧붙이면, 김형욱은 반(反)박정희 활동을 하면서 상당히 근사한 소리를 많이 한다. 김형욱의 활동 중 미국 의회에서 한 증언 같은 것은 박정희와 관련된 추문 같은 것을 중점적으로 폭로한 것이 아니었다. 격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일정하게 갖췄다고 볼 수 있는 면이 있는 증언이었다. 말하자면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얘기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김형욱이 박정희를 비난하는 내용도 많이 나온다. 마치 한국 정부를 정말 위하는 것처럼, 그러면서 미국 정부의 철군 계획을 비판하기도 한다.

죽기 직전에는 통일 문제에 대해 꽤 긴 글을 썼는데, 어떻게 보면 잘 썼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김영삼이 1979년 6월 11일 외신 기자 클럽 연설 제목에 민중이라는 말을 넣은 것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쨌건 미국에서 일었던 통일 여론 같은 것을 김형욱이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글을 써주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에 김형욱이 일정한 수준을 갖춰 박정희의 대북 정책, 통일 정책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는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김형욱이 1960년대에 한 행위하고 1970년대에 망명한 후 반(反)박정희 활동을 하면서 그럴싸하게 주장한 것은 상당한 괴리감을 보인다. 이런 점은 '딱 이런 거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선 것이다. 인간은 언제든지 그런 양면을 가질 수도 있는 거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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