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강제 해산 결정을 내린 가운데, 이번 결정이 미칠 정치적·사회적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교조나 공무원노조 같은 노동조합에 이어 '정당'까지 사법기구를 통한 해산이 현실화됨으로써 이 같은 방식이 정적(政敵) 소거 방식으로 고착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길게 보아서는 법령의 합헌성을 심판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할 헌재가 한 정당의 강령과 이념을 '위헌'으로 규정하는 규범 결정을 한 탓에 '헌재 무용론'이 확산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치적 독립'이 불가능한 사법 기구에 대한 국민적 회의가 누적될 것이라는 비판이다.
"헌법과 법률이 왜 '정당'을 규정해야 하나"
헌재 결정을 지켜본 전문가들은 '헌법과 법률이 왜 정당의 목적과 존립 요건을 규정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헌법에 정당이라는 자율적 정치 결사체의 해산 여부를 판단할 조항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제헌 헌법에도 정당 관련 조항이 없었고, 일본을 비롯한 상당히 많은 국가의 헌법도 정당의 해산 요건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면서 "정당법과 같은 하위 법률 또한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에도 없다. 독일은 2차 대전 중 나치를 경험한 결과로 정당법이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의 말처럼 헌법이나 법률이 '정당'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정당의 존속 여부는 전적으로 유권자의 심판으로 결정된다. 이런 방식이 정치적 다원성을 보장하면서도 이데올로기나 정책 경쟁을 통해 한시적 권력을 위임받는 민주주의 질서에 걸맞다는 지적이다.
박 대표는 "우리 헌법에 정당 조항이 생긴 것은 제2 공화국 때이고 박정희 정권 때였던 제3 공화국에 들어서야 해산 조항 근거가 분명해졌다"면서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만든 박정희 정권의 정신을 민주화 이후 되살아난 헌재가 그대로 수용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공안 몰이 나선 새누리당·검찰
헌재의 선고 기일이 당초 예상됐던 22~24일보다 앞당겨졌다는 점, 이날 발표된 헌재의 결정문이 법무부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은 헌재가 정권의 '제2 중대'로서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는 반발로도 이어지고 있다.
헌재는 통상 일주일 전에 선고 기일을 정해 통지했으나, 이번에는 선고 이틀 전에 기일을 정했다. 이를 두고 홍성규 전 대변인은 "최종변론을 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충분한 심의 절차 없이 서둘러 선고 기일을 잡았다는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도했든 아니든 소위 '비선 실세' 국면이 희석되는 효과를 불러왔다. 새누리당은 헌재 결정을 기다렸다는 듯 "민주주의란 보호벽 뒤에 숨어서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고 이적 행위를 하는 세력은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면서 '종북' 카드를 꺼내 들었고, 검찰은 통진당이 주최하는 "집회·시위를 엄단"하겠다면서 공안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사회는 진보적 변화에 준비됐는데 야권은 준비 안 돼 있던 탓"
이 같은 상황이 통진당에는 물론,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는 야권 전반에도 부정적이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정의당 등에 당장 끼칠 영향보다 장기적으로 진보·개혁 진영 전반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미 야권이 새정치연합, 정의당, 통진당 등으로 이념·정책적인 재편이 이루어진 상황이었던 터라 야권 지형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다만 한국 정당정치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진보 정당의 제도권 진입 이전으로 돌아가 협소해질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그런 면에서 헌재 결정에 대한 야권 공동의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교수는 "무엇을 종북으로, 체제 위협으로 볼 것이냐란 문제에서 정권은 불명확한 기준으로 또 다른 정당에도 '위험'이란 딱지를 뒤집어씌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애당초 사태를 미리 방지하지 못한 책임이 야권 전체에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상훈 대표는 "민주화 이후 정당들이 박정희 군사 정권이 만든 정당법을 없앴어야 한다. 개혁하겠다고 하면서 정당법을 살려둔 것이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오늘 헌재 결정은 보수 정권이 장기화하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안 세력이 잘못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면서 "사회 전반은 경제 민주화를 시대 가치로 받아들이는 등 진보적 사회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지만 정작 대안 세력들이 준비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헌재의 '비뚤어진' 직업 정신…헌재 무용론으로 이어질 것"
헌재를 향해서는 정권 입맛에 맞춘 사법적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헌재의 결정은 법률의 합헌성 여부를 따진 것이 아닌 '특정 이념은 정당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내용적 판단을 한 터라 헌재의 역할을 넘어서는 결정이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박 대표는 "그렇다면 헌재가 국제사회에서도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전체주의적 심성 구조를 과감하고 용기 있게 드러냈을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면서 "정치 영역에서 내렸어야 할 결정이 거듭해서 헌재 등의 사법기관의 판단으로 넘겨지면서 생긴 문제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사건들이 잇따라 헌재로 보내지면서, 헌재 스스로 마치 본인들이 '사회 규범의 보루'라는 식의 지도 의식을 갖게 된 것 같다"면서 "그 결과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통진당 같은 세력은 사회 정상 범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결정을 본인들이 해야만 하는 것 같은 비뚤어진 직업 정신을 갖고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했다.
박 대표는 이어 "헌재가 이런 판단을 거듭하면 헌재에도 결코 좋지 않다"면서 "헌재가 한 사회의 특정한 견해를 강요하는 존재가 되어버리면, '왜 헌재가 필요하지'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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