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10일 20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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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4>
석방
나는 조금 들떠 있었다. 가라앉히지 않으면 실수할 것 같았다. 인사를 끝내고 재빨리 정릉(貞陵)에 있는 처가로 돌아갔다. 아내와 아기와 장모님과 아기의 고할매가 모두 잠들었다. 추운 겨울날 영등포감옥 앞에서 진종일 떨며 견뎠으니 지칠 만도 했다. 나는 전등 아래 오도
김지하 시인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3>
징역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가 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직결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후 천주교 교리방(敎理房)에서 자고 제본(製本)공장에서 징역을 살 때 그 흔해빠진 종이로 스스로 만든 수첩에 그 환영을 그대로 써놓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2>
통방
혹간 가다 구치소 간부에게라도 걸리면 다시는 안 하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서자마자 그 일을 가지고 또 통방! 그렇다. 통방으로 해가 떠서 통방으로 해가 지는 통방 징역이었다. 통방! 그것은 유신 시절의 메스컴이었던 '유비통신'(流蜚通信·유언비어를 그렇게 불렀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1>
군사재판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이겼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우리들, 이 집단의 영생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 이 집단의 사슬에 묶인 가슴 속에서 비로소 타오르기 시작하는 참된 삶의 저 휘황한 불꽃을 감격에 차서 바라보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니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0>
인혁당
어느날인가 출정하다 한 사람이 나에게 "김지하 씨지요" 하고 묻더군요."네, 그렇습니다만…" 하고 대답하자 "나 이수병이오" 하고 말합디다. "아하, 그 '만적론'을 쓰신 이수병 씨요?" "네." "어떻게 된 겁입니까." "정말 창피하군요. 이거 아무일도 나라 위해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9>
슬라이딩 태클
지주교님이 입국, 공항에서 연행되었다가 박정희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며칠후 200여명의 원주교구 청년신도들과 함께 상경하여 성모병원에 입원한 뒤 병실에서 내외신(內外信) 기자회견을 열고 그 자리에서 양심선언을 하셨다고. 그 내용은 유신 철폐를 위한 학생시위 자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8>
제6국
1975 년 2월자로 된 '동아일보' 지상의 글 '고행(苦行) 1974년', 그러니까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사형선고, 무기감형되었다 10여개월만에 석방된 직후 기고한 이 글은 제 6국에서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7>
부두에서
그렇게 심한 기침 속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마저 다 못먹고 출발하여 그 무렵에 운행되기 시작한 고속버스를 탔다. 호송하는 두 사람의 경관은 권총을 찼고 내 손의 수갑은 소매 속으로 감추어졌다. 그 경관이 호의를 베풀어 서비스했다. 고향의 인사였다. 그날 신문이었다.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6>
홍도
목포의 사촌누이 집에 들렀던 게 화근이었다. 아니, 화근이라기보다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니 반쯤은 이미 화를 자초한 셈이었다. 마음 약한 매형이 혹시 자기 가족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해서 일찌감치 경찰에 신고해버린 것이다. 우리가 대흑산(大黑山)에 묵지 않고 바로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05>
모래내
모래내는 영화판의 내 친구 고 김원두의 집이었다.나는 원두와 한 방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며 옆방에서 눈먼 그의 동생 고 김윤두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나 그애가 켜는 기타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원두의 처가 윤두를 마치 자기 애인이나 되는 듯이 거두고 돌봐